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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등어 Jul 24. 2022

헛소리의 여행

단어와 어보이드 노트avoid note에 대하여






    단어에 실체가 있다면 짙은 색에 단단한 모습일 것 같다. 단어는 말하는 이의 생각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단호하고 힘이 있는 무엇이다.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면 중언부언하지 않고 깔끔하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 어휘력이 좋은 이들을 볼 때마다 감탄하는 이유이다. 짧은 시간 내에 어쩜 저리도 적절한 단어를 고를까? 이 사람은 순발력이 좋구나, 두뇌 회전이 빠르구나! 하며 속으로 박수를 친다. 단어를 잘 고르는 사람,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정말 멋있다.

    나도 멋있고 싶다. 하지만 말하기는 너무 어렵다. 그래서 의사 표현을 해야 할 때마다 진땀을 뺀다. 생각을 뚜렷이 인지하는 것부터 문제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섣불리 이름을 부여해도 되는 걸까. 머뭇거리는 내게 상대방의 눈은 빨리 대답하라고 말한다. 다급해진 나는 사족을 붙여가며 핵심을 빙빙 돌거나 헛소리를 늘어놓다 결국 상대를 피곤하게 만든다. 장황설을 늘어놓는다고 찝찝한 감정이 해결되지도 않는다. 유난히 주절거리고 집에 온 날은 의미 없이 소음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사람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바보가 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바보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니 말이다. 마음은 불확실하지만 말은 해야겠으니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해놓고 생각을 하는 게 버릇이 됐다. 머릿속에서는 입 밖으로 나간 90퍼센트의 헛소리와 10퍼센트의 연관어들이 다시 합체하고 분해되기를 반복한다. 운이 좋으면 말들이 퍼즐처럼 들어맞는다. 그럼 그제야 ‘이게 내 생각이었어!’라며 개운하게 잠이 든다.

    곡을 쓸 때도 그랬다. 특정 시기의 감정에 아무 말들을 붙여가며 곡을 썼다. 마음에 드는 프레이즈를 만들고 그 위에 아무 말 아무 코드를 붙이고 떼다 보면 이별 노래는 어느새 폭력에 관한 노래로 바뀌어 있고 빠르면 1주, 느리면 1년 뒤에야 ‘아, 내가 쓰려 한 곡은 이거였구나’ 하고 확신하게 된다. 이렇게 대책 없는 방식으로 곡을 쓰다보니 2년 동안 5곡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느리고 대책이 없더라도 소소한 확신의 순간이 있다면 사는 재미가 생긴다. 반대로 감정이나 생각을 계속해서 놓치고 뚜렷한 완결 없는 날들이 지속되면 기운이 없어진다. 헛소리가 그냥 헛소리로 전락할 때, 그것은 그저 소음이 된다. 그럴 땐 고장난 스피커가 된 기분이다. 무용한 말들을 연발하며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무력하고 절박하게 시간을 보낸다.


    이럴 때면 뜬금없게도 어보이드 노트avoid note가 생각난다. 헛소리를 늘어놓는 내가 이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보이드 노트는 연주 시 사용하면 안 되는 음계를 말하는데, 앙상블 시간에 실수로 어보이드 노트를 누르면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되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런데 연주를 배우면 배울수록 어보이드 노트가 사용해도 되는 음계라는 걸 알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피해야 하지만 너무 조성 안에서만 놀면 재미가 없으니까 관용적으로 허용하고 있단다. 가끔의 일탈은 곡을 풍요롭게 한다나. 최근에는 음과 음 사이의 음계, ‘미분음’을 주로 사용하는 재즈 아티스트가 그래미를 수상했다. 나름의 기준만 있으면 틀려도 그만인 거다.

    그러나 음악에도 변하지 않는 규칙이 있다. 엔딩은 무조건 시작 코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변주를 하고 아무 음이나 쓰며 난장판을 쳐도 멋지게 해당 키, 1도로 돌아가는 순간 모든 방황은 용서 된다. 나의 선생님은 이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악보는 삶과 같아. 마음껏 방황해도 돼. 불안해할 것도 없어. 잘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선생님이 멋있는 척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말은 아직까지도 내게 교훈을 준다. 선생님이 말하는 ‘엔딩’과 내가 생각하는 ‘역시!’는 비슷한 게 아닐까. 알아내고 싶은 무엇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삼천포로 빠지기를 반복하다 보면 만나는 개운한 순간 말이다. 확신이란 비확신이나 의심과 같은 거친 조각들의 불협화음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하는 순간일 것이다. 정답은 없지만 멋진 완결은 있다. 그러니 조금 힘을 빼도 좋지 않을까. 조금은 헛소리를 하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나는 계속 그런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 섣부른 말들과 소음, 후회의 밤과 지겨운 아침을 맴도는 중얼거림 속에서 언젠가 명확한 모습으로 마주할 무언가를 기다리게 된다. 난 또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역시 말하기는 너무 어렵다. 마무리를 위해 이 글의 제목을 ‘헛소리의 여행’이라고 지어야겠다. 나는 헛소리의 귀가를 기다린다. 그것이 긴 여행을 마치고 나를 찾아오기를, 눈이 시릴 만큼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언제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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