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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Oct 16. 2024

벅수 17화 절대 선, 벅수를 품다.

17. 절대 선, 벅수를 품다.     

   김준석이 잿빛 고목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이었다.

다채로운 빛의 충돌로 황홀한 차원의 공간 외부 면과는 달리, 캐이런의 검은 에너지가 난무하는 내부에선 벅수의 소멸이 진행되어 절대 선을 보호하는 금빛 고리 사슬도 점차 먹빛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제발!...제발...!”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을 떨구는 그녀의 간절함은 가슴만 태울 뿐, 손을 짚은 빙벽을 경계로 그들과 같이 무너졌다. 파리한 입술의 절대 선 몇 발짝 앞에서 허리까지 골 깊은 나무줄기가 되는 김준석은 한 줌의 기운을 잡고 빛바랜 심장을 놓지 못했다.

“으-으-으.”

점차 희미해진 시야는 닿는 곳마다 녹색의 연무에 가둔 듯 흐릿해졌다.

“미. 미안하오. 3분, 3분만 남았어도 하루를.”

그가 절망이 되는 그때였다. 먹빛 짙은 고리 사이로 뜬 아기의 영롱한 눈동자가 오주희를 불렀다.

‘나의 분신! 내가 온 순간, 당신은 완성됐어요. 믿음을 가져요.’

전신에 그윽한 부드러운 음성은 의식의 심연에 신비하게 작용해 스러져가던 것을 일으켰다. 그것은 절대 선에 버금가는 기운으로 끝 모를 환희였으며, 홀로 고요한 우주 유영이었고, 느릿한 내면의 시간적 변화를 준 찰나를 깨웠다. 그녀는 절대 선의 눈동자에 투영된 자신을 보자, 즉시 블라우스 앞섶을 풀어 스티그마타에 한 손을 올렸다. 그리고 검지를 뻗어 김준석을 향해 외쳤다.

“빛이 있으라!”

“쿠-구-구-구!”

그 순간, 가디언의 표식에서 일은 섬광이 차원의 빙벽을 뚫고 김준석의 죽어가는 심장으로 쏘아지자, 잿빛 고목으로 화석화되던 그가 투명해져 혈관에 밝은 빛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우-웅!”

동시에 이미 껍질이 된 배꼽 밑 기해(氣海)로 성스러운 기운이 집중되자, 그의 경락은 신체 곳곳을 불끈거리는 빛무리로 들끓었다. 

“으...으.”

고대 이래 김준석에게 가장 강력한 기운은 당신목이었다. 염원의 결정체인 자신이나 캐이런도 결코 당신목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무한한 기운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상상이 닿은 한계는 -절대 선- 이었다. 

캐이런도 당황했다. 단단했던 묵청의 운무와 정연했던 기운이 순식간에 뒤섞여 혼탁해지면서 아기를 향한 에너지의 정점이 무뎌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악의 염원답게 아직 소실하지 않은 중심이 느슨해진 고리 사슬 틈으로 아기의 얼굴에 닿아있음을 잊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소진하겠단 각오로 터럭의 에너지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번쩍였다.

“크-아-아!”

“쾅!”

폭사한 먹빛 안광은 아기를 감싼 고리 사슬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동시에 검은 기운을 펼쳐 아기의 얼굴을 빈틈없이 덮어 버린 캐이런. 수천 년을 거슬러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던 –절대 선-의 영혼이 드디어 파괴당할 순간이었다. 

“이뤘도다! 마침내 악의 염원을 이루었도다! 으-카-카!-카!”

그토록 고대하던 염원인, 벅수의 희망과 절대 선의 본질인 사랑이 생성되지 않는 어둠과 저주, 분노와 악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캐이런은 만끽했다. 인간이 곧 자신이 되었음을 흡족해했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벌써 아기의 영혼으로 스며들었어야 할 검은 기운들이, 되레 백색의 발광체로 화해 아기의 후광으로 발하는 믿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방실방실 웃는 아기는 티끌의 상처 없는 순백의 모습이었다. 때를 같이해 차원의 빙벽이 균열로 쩍쩍 갈라졌다. 이어서 접점을 잃은 에너지들이 궤적을 이탈해 불꽃으로 충돌하는 기현상과 고로 속 쇳물처럼 급속히 녹아내린 빙벽은 나룻배의 피 우물로 무섭게 빨려들었다. 실로 허무하고도 장엄한 자폭이었다. 아연실색한 캐이런은 믿기지 않는 광경의 틈에서 황망한 소멸의 과정을 맞았다.

“으. 으. 어찌 이런일이... 이뤘는데, 염원이 이루어졌는데. 돌아올 것이다! 이 땅의 인간 아귀들은 또다시 나를 부를 테니까. 그땐, 기필코.”

“쩍! 쩌저적!”

“반드시 세. 상의..빛.을...거..두”

“투두둑! 투둑!”

끝내 절대 선의 영혼을 악의 기운으로 채우지 못한 캐이런은 염원의 형체인 검은 운무가 굳었다 갈라지길 거듭하다가, 결국엔 돌무더기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절대 선의 영혼을 지배하기 위해 수백 년에 걸쳐 인간의 심성에 저주와 원망, 분노를 끊임없이 주입해 왔던 그가 언제 깨어날지 모를 지하의 어둠 속으로 회귀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이었을까? 절대 선의 영혼이 어떻게 생존했을까? 김준석의 경락에 포화한 기운이 불끈거릴 때 형성된 후광이 그것이었다. 선의 기운은 모든 생명에 신속하지만, 온화한 침잠이었기에 캐이런은 그 찰나를 방심한 것이었다. 실로 잔잔하지만, 엄숙한 파장이었다.   

   

   “벅수! 우리가 지켜냈어요! 해 냈다고요!” 

캐이런에 극적인 반전을 일으킨 오주희가 푸석해지는 김준석에게 아기를 보여주는 목소리가 떨렸다. 음성에는 안도와 벅찬 감동이 실려있었다.

“가디언이여, 그대가 해 냈소! 감사하고 또 감사하오.”

절대 선의 기운이 걷힌 그는 어느덧 가슴까지 잿빛 고목으로 변해있었다.

“벅수….”

“슬퍼하지 마시오. 다행히 내 마지막을 그대와 절대 선이 지켜주고 있지 않소? 

한편으론 오랜 굴레를 벗는 것이 홀가분하기도 하오. 벅수는 절대 선에 수백도 모자라단 걸 아시지 않소? 당신 또한 절대 선과 영원히 인간 곁에 남을 것을 알기에 감사할 뿐이오. 나는 당신목의 일부가 되어서도 당신들과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스-스-스-스”

“그만 가야겠소. 무수한 염원으로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못했던 당신목이 안식처가 될 줄은 몰랐소. 고맙소! 고맙소!”

그 순간, 천장 유리에 비껴든 설핏한 여명이 그의 미소에 닿자, 홀로 인 바람결이 그를 투명한 은빛 소금 알갱이 입자 먼지로 흩어지게 했다. 그리고 잠시 공간을 부유한 입자들은 오주희의 머릿결을 돌아 잠든 아기를 쓰다듬듯 맴돌다 긴 꼬리의 여운을 찬란히 남기고 허공의 일부가 되었다. 

“잘 가요…. 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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