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가만있지 못하고 돌아다닙니다
방에서 마냥 쉬고픈데 배가 또 고파온다. 이집트 음식에 대한 호기심보단 불안감이 더 크기 때문에 모험보단 안전한 쪽을 택하기로 한다.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KFC에서 치킨을 포장해 와야겠다.
이 KFC로 말할 것 같으면 피라미드 전망 보기 아주 딱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한여름날 땀 뻘뻘 흘리며 굳이 피라미드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고, 에어컨 나오는 KFC 2층 창가 자리에서 피라미드를 바라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KFC에는 나 말고도 많은 위험 기피자들이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주문한 치킨을 받아 든다. KFC와 내 숙소는 걸어서 15초 남짓했는데 그 짧은 시간에도 거리가 어찌나 요란스럽고 정신없는지 기운이 쏙 빠져 돌아온다. 피라미드 매표소 앞 수십 명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무질서함, 차와 낙타와 말들이 한데 뒤엉켜있는 난잡한 거리, 쉴 새 없이 들리는 경적소리까지. 이 곳은 내 눈과 귀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여긴 어디고 난 누구란 말인가.
그냥 깨끗하고 아름다운 그런 곳에 가서 휴양하는 게 낫지, 내가 뭔 깨달음을 얻겠다고 이 먼 곳까지 와 훤한 고생의 품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던 것인 지 후회가 또다시 밀려왔다. 난 어쩌다 이 곳에 오게 된 것일까. 무엇이 날 이 곳으로 끌어들인 것일까. 여행의 끝자락에서 과연 무언가를 찾긴 할까. 여러 근원적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집트에서 가장 안전할 나의 방으로 돌아와 치킨을 맛본다. 다행히도 맛있었다.
치킨이 이렇게 내게 뜻밖의 위안이 되줄 줄은 몰랐다. 포만감과 함께 소란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 이제 피라미드를 본격적으로 보기로 한다.
매표소 앞은 여전히 장사진이다. 줄 따위는 당연히 없고, 현지인들은 새치기를 밥 먹듯이 하고,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오늘 안에 티켓을 구입할 수 있을런 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니 창구 앞까지 거의 도달했다.
근데 이걸 어쩌지, 티켓 가격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비싸다. 내가 블로그에서 본 금액은 최근 인상되기 전의 요금이었나 보다. ATM기를 찾기 위해 만일 이 줄을 벗어난다면 오늘 안에 피라미드를 못 볼 것 같단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에 대한 괜한 걱정이 아니라 이건 거의 팩트다. 무리의 끄트머리에서 창구 앞까지 오기 위해 버텨야 할 시간들을 생각하니 이탈만큼은 도저히 안 되겠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굴리던 차 바로 앞에 혼자 서 있는 동양인이 보였다. 오, 나의 타겟!!!
-안녕하세요, 어디서 왔어요?
-중국인이에요. 영국에서 유학 중이고 방학이라 친구들이랑 놀러 왔어요.
-아 진짜요? 어쩐 지 영어 너무 잘하시네요. 친구들은 어디 있어요?
-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이러한 일상적 이야기를 하며 그를 탐색하다가 조심히 말을 건넨다.
-저 사실.. 진짜 죄송한데 제가 이집션 파운드 환전을 얼마 안 해왔어요. 근데 지금 입장료가 제가 예상한 것보다 비싸가지고.. 혹시 남는 돈 있으면 빌려주실 수 있어요? 제가 유로화는 남는 게 있어서 그만큼 바로 드릴게요!
- 아, 괜찮아요. 여기요. 유로 안 줘도 되어요.
- 아니에요, 가져가세요. 여기요.
-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여행 재미있게 하세요.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쿨하게 떠났다. 아, 진짜 감사하다. 그분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영국에서 유학할 정도고, 스타일도 엄청 세련되어 보이던데 그런 그에게 몇 천원은 굳이 돌려받지 않아도 될 금액이겠지만, 그래도 아무튼 처음 보는 내게 이런 친절을 베풀어 준 그에게 너무도 고마웠다.
티켓을 손에 꼭 쥐고서 피라미드 입구로 진입한다. 들어가기가 무섭게 잡상인들이 내게 물건을 들이밀며 따라붙는다.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음에도 몇 미터를 계속 따라오는 사람도 많거니와, 잡상인 A를 제치고 열 걸음 가면 또 어디선가 잡상인 B가 나타나고, B를 또 힘겹게 제치면, 내 옆엔 또 금방 잡상인 C가 와있곤 했다. 끝도 없이 날 찾아오고 말을 거는 이 사람들... 아, 난생처음 받아보는 무차별적 환대에 벌써부터 지친다...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뭐라 뭐라 말을 하며 한참을 따라오던 젊은 사람 둘까지... 그들이란 산을 넘고 나니 이번엔 또 현지 가족 집단이 다가온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아이들 세 명이었는데 사진을 찍어주겠단다. 화목한 가정처럼 보이는데 괜찮겠지? 설마 도둑질이 가문의 유산처럼 전해 내려오는 집안은 아니겠지?, 란 생각으로 조심스레 핸드폰을 건넨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린다. 반대 방향으로 냅다 뛰진 않을까 초조했는데 다행히 그렇진 않았다.
이번엔 함께 사진을 찍잔다. 이집트로 여행 오기 전에 본 글이 하나 퍼뜩 떠오른다. 현지인이 사진을 찍자고 하면 절대 거부하라는. 사진이 찍히면 어딘가에 도용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세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거스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 흔쾌히 찍겠다고 한다. 아이들 세 명이 신난 듯 쪼르르 내 옆에 선다.
근데 엥? 저기... 아주머니...??? 왜 본인 핸드폰이 아니고 제 핸드폰 그대로 찍어주고 계신 거죠...???? 그것도 매우 열심히.......? 뭐지?... 아니 왜??? 이해가 안 간다. 근데 이 와중에 이 아이들은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신나고 재밌는 거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똑같은 표정으로 아이들 셋이 전부 웃고만 있다. 얼굴에 경련이 안 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이런 표정은 치과 팸플릿에서만 본 것 같은데... 점점 혼란스럽다. 나만 여기서 뭐 놓치는 게 있는 건가?
이 날 찍은 사진에는 무서울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 셋과 알 수 없는 표정의 내가 담겼다.
그들을 지나 또 올라간다. 오른쪽 귓가에서 날카로운 채찍질 소리가 들린다. 소름이 돋는다. 옆을 보니 말이 네 명을 태운 마차를 끌며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다. 해가 내리쬐는 여름날 자기 몸 하나 건사하고 이 가파르고 먼 길을 하루에 수십 번 왕복하는 것도 힘들 텐데, 사람들을 태우고 수도 없이 이 길을 오르는 게 이 말의 하루 일과이자 평생일 테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그마저도 힘에 부치는 모습이 역력해 보이는데 모질게 채찍질을 하며 빨리 올라갈 것을 강요하는 인정사정없는 마차 주인이나 아무런 공감능력 없이 그를 타고 희희낙락한 관광객들까지... 모두가 싫었다.
피라미드를 오르는 길은 명백한 동물학대의 현장이었다. 피라미드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말들과 낙타들이 이동수단이자 관광자원이라는 명분으로 누군가의 돈벌이로 악용되고 있었다. 낙타들의 상태 역시 불량하긴 매한가지였지만 무엇보다 마차를 끄는 말들의 상황은 너무도 딱해 눈뜨고는 못 볼 정도였다.
몸통에 패인 수많은 상처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말들... 절뚝이는 다리로 무리한 노동을 이어 나가는 말들... 숨 넘어갈 듯 침을 질질 흘리며 꾸역꾸역 올라가는 말들... 말굽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미끄러지 듯 내려오는 말... 한바탕 노동을 치르고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수분이나 음식 섭취도 못한 채 다시 언덕을 오르며 쉴 새 없이 일하는 말들...
주변 환경에 워낙 거슬리는 게 많다 보니 정작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는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돈 내고 입구 안까지 들어와 놓고선 그 근처를 얼마 못 벗어나 결국 나가 버린다. 소름 돋게 날 선 그날의 채찍질 소리만이 내게 남아있다.
그렇게 허무하게 피라미드 관람을 마친다. 이집트에 온 목적이 99% 피라미드였는데, 외부의 방해 요소들(무더운 날씨, 심한 경사, 엄청난 삐끼들, 동물 학대)때문인 지, 하도 미디어에서 많이 봐서인 지, 어째 감흥이 비행기에서 내려다봤을 때보다도 덜하다. 그냥 아 저기 있네... 있을 게 있구나... 이런 느낌이랄까. 역시 피라미드는 KFC 2층이 명소인가 보다.
호스텔로 돌아와 루프탑에 올라가본다. 피라미드 바로 앞에 위치한 호스텔이라 그런 지 꽤 가깝게 느껴진다. 피라미드 3개가 정면으로 그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아까 채 못 보고 발길을 돌린 피라미드를 가만 응시한다. 시원하고 쾌적하고 큼직하게 잘 보인다. 애초에 굳이 저기까지 갈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해가 서서히 지고, 피라미드도 문 닫을 시간이 된다. 다들 밖으로 빠져 나간다. 저 동물들은 또 어디로 갈까.
시간과 돈 들여 먼 타지까지 와서 왜 내 마음이 이렇게 복잡하고 불안해져야 하는 지 모르겠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