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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린 Sep 21. 2019

플로리다 프로젝트; 평행세계를 파는 세일즈맨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리뷰




 세일즈맨의 죽음. 이 제목을 들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매카시즘의 억압을 뚫고 탄생한 이 작품은 여러 의미로 '가장 미국다운'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 본디 미국적인 작품이라 함은 웨스턴 문화가 손꼽히는데, 기존 유럽이 가지는 정복 야욕의 로맨틱함을 담습 한다. 반면 세일즈맨의 죽음은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꼬집으며 미국의 현실은 어떠하며 무엇을 고쳐야 할지를 지적한다. 웨스턴은 낭만주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세일즈맨의 죽음을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요소를 가미해 만든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아메리칸드림으로 인한 비극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갖지만 차이점이라면 비극을 이끌어내는 자세가 다르다. 세일즈맨의 죽임은 아메리칸드림을 쫓지만 결국 몰락하는 윌리와 그 가족을 보여준다면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실존하는 환상을 향해 도피하는 것을 통해 비극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극명하게 나타낸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것이 미국적 환상과 현실의 충동이다. 작품 속 공간인 디즈니랜드와 모텔촌은 미국이 가진 양면을 잔인하게 드러낸다.

 무니와 헤일리가 거주하는 모텔 '매직 캐슬'은 그 이름과 라벤더 빛 외벽에서 드러나듯, 디즈니랜드의 부속품처럼 보인다. 거액을 들여 칙칙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지만, 건물 안에 들어서면 낡고 어둑한 현실이 펼쳐진다. 내부의 비극을 감추기 위해 자본을 들여 눈가림을 하는 셈이다.

 문제는 내부뿐만 아니다. 폭행, 성매매, 홈리스,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아이들, 호시탐탐 아동을 노리는 범죄자들, 내부의 어둑함처럼 그곳에 거주하는 이들 또한 어두침침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무니를 비롯한 아이들은 매직 캐슬을 자신들의 디즈니랜드처럼 모험과 놀이가 가득한 세상으로 만든다. 어른들에게 혼이 나고 욕설을 얻어 들어도 잠깐의 즐거움을 쫓으며 구김살 없이 성장한다.


 이런 무니와 하루하루를 함께하기 위해 헤일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비혼모인 헤일리는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진 채 제대로 된 교육도,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상태다. 그런 형편에도 헤일리는 무니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웃인 애슐리에게 일자리를 부탁하기도 하고, 도매점에서 물건을 떼어다 잡상인 노릇도 기꺼이 한다. 막바지에 이르자 성매매를 하기까지 한다.

 헤일리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도덕의 부재나 쾌락주의적인 성향 탓이 아니다. 무니의 엄마라는 책임감 하나로 오로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 끝에 이르른 낭떠러지다. 윌리 로만이 시장에서 버림받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보험금을 노린 자살을 시도하였듯, 헤일리 또한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무니를 지키기 위해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헤일리의 비극은 어둠과 함께 찾아온다. 카메라가 무니를 향할 때면 세상은 햇살과 형형색색의 빛깔로 가득하지만, 헤일리는 그렇지 못하다. 간혹 무니와 함께 외출하거나 디즈니랜드 인근을 걸을 때면 헤일리에게도 햇살이 허락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 현실을 마주해야 할 순간이 오면 헤일리 주변엔 어떤 불빛조차 없다. 마치 그런 일이 허락되지 않은 듯 어둑한 조명과 텔레비전 불빛이 고작이다.

 그렇다고 해서 헤일리가 개선 의지를 보이거나 발전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충동적이고 폭력적이며, 경악을 불러오는 최악의 방법만 고른다. 관객은 헤일리에게 이입하려다가도 최악으로 치닫는 그를 보며 공감 불가능한 상황에 닥치게 된다.

 하지만 이는 간단히 생각하면 풀릴 문제다. 헤일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고, 그 선택들은 결국 우리가 경악하는 최악의 방법이다. 어린 엄마, 비혼모, 무직, 홈리스, 여자.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인 헤일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애초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을 돕는 손길이 없는 건 아니다. 모텔 관리인인 바비가 마치 유치원 교사, 양육 보호자라도 되는 양 아이들을 보살피며 충동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헤일리마저도 살뜰하게 살핀다. 언뜻 보면 바비가 헤일리의 삼촌이나 아버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한다. 사회가 해야할 복지를 같은 소시민인 바비가 하는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도 이와 비슷한 캐릭터가 존재한다. 로만 가족의 이웃인 찰리인데, 법관으로 성공한 아들 버나드를 둔 탓에 윌리의 열등감을 사는 인물이다. 윌리가 영업이익을 보지 못하자 그를 위해 돈을 빌려주며 윌리가 가장으로써 명분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찰리와 바비의 다른 점은, 찰리는 진정으로 윌리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찰리는 윌리를 동정하고 자신이 그보다 낫다고 여기기에 기꺼이 돈을 내어주는 것이다.

 바비 또한 헤일리가 갑작스레 방을 비우고 근처 다른 모텔에 투숙해야 하는 상황에 닥치자 기꺼이 그를 도와 돈을 내어주고 할인 제도인 양 넘어가려 한다. 이 점만 본다면 찰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바비의 진가는 지속적으로 무니와 헤일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훈계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윌리와 헤일리 모두 권유와 조언을 무시한 채 파멸로 향한다. 헤일리가 성매매를 한다는 사실은 금세 모텔 거주민 사이에 퍼지고 이웃이던 애슐리와 주먹다툼까지 오간다. 결국 애슐리는 헤일리를 신고하게 되고 무니는 아동복지국에 의해 보호받게 된다. 무니와 함께 하기 위해 한 행동이 무니와의 단절로 이어진다.

 무니는 친구인 잰시의 손을 잡고 디즈니랜드로 도망친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즈니랜드는 무니에게 있어 너무나도 가깝지만 먼 장소였다. 헤일리가 티켓을 훔쳐 되팔던 장면에서 언급되듯, 무니와 헤일리에겐 턱 없이 비싸고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그런 곳이 단절이 다가오자 너무나도 쉽게 들어설 수 있는 장소로 전환된다. 매직 캐슬의 라벤더 빛 페인트처럼, 무니의 비극은 디즈니랜드라는 환상적 장소 속에 감춰진다. 무니의 상황과 미래는 매직 캐슬의 내부처럼 결국 우리가 예상하는 현실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영화는 아이들의 우정이나 슬픔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닌, 우리가 향할 현실을 가리킨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다 가루를 묻힌 사탕이 떠올랐다. 아프게 입천장을 때려가며 시큼함과 단맛을 연달아 바꿔대는 사탕의 맛이 영화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윌리의 죽음으로 보험금이 생기고 로만 가족은 돈의 압박에서 벗어났지만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아내인 린다는 빚을 다 갚았는데 당신은 어디 있냐는 말로 처참함을 토한다.

 무니가 아동복지국의 보호를 받고 더 나은 가정으로 입양 가게 된다 한들, 그게 두 사람의 행복으로 이어질 순 없다. 해답은 그게 아니라는걸, 아서 밀러가 그러했듯 션 베이커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외쳤지만 과연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플로리다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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