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린 Mar 13. 2020

조조래빗; 시대와 광기는 아이들의 단명을 증명하지만

영화 '조조래빗' 리뷰




 올 2월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희비가 공존하는 시기였지 않을까 싶다. 매력적이고 평론 욕구를 자극하는 작품이 쏟아져 나왔지만, 잔혹하게도 전염병이 돌아 그 모든 것들을 놓치게 된 때였다.

 운 좋게 조조 래빗만큼은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지만, 한 번 더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여전하다. 그만큼 완성도도 높고 작품성이 훌륭하기에 여러 번 곱씹어 보기 좋은 영화다. 구매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분석할 수 있을 듯하다.


 조조 래빗을 보는 내내 W. H. Auden의 Lullaby와 Ezra Pound의 The Garden이 떠올랐다. 문학사조도, 시기도 조금 다른 두 작가지만 영화에 담긴 분위기로 인해 두 작품이 마치 하나인 듯 같은 뜻을 자아내는 듯했다.


… Time and fevers burn away Individual beauty from Thoughtful children, and the grave Proves the child ephemeral … 


 시대와 광기가 다양함을 죽인다는 오든의 주장은 영화 속 희생자의 모습과 일치한다. 독일인임에도 끊임없이 나치에 의문을 갖고 평화를 추구하는 베츨러 부부, 나치 당원임에도 회의적이고 무기력한 클렌젠도프, 소년병으로 활동 중이지만 이상함을 느끼는 요키.

 결국 베츨러 부부는 반역죄라는 명목으로 광장에 매달리거나 행방이 묘연한 채로 끝을 맺고, 클렌젠도프는 나치 잔병 다운 최후를, 요키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어른들의 욕망에 이용당한 과거를 가진 채 끝난다.



… And round about there is a rabble Of the filthy, sturdy, unkillable infants of the very poor …


 파운드는 폐허가 된 런던을 보며 시를 남겼다. 더럽고 목숨 질긴 아이들만이 이곳에 살아남았다고. 무의미함과 불가능이 겹치는 내용이지만, 결국 그곳에도 일말의 희망은 존재한다.

 영화에 등장한 인물 중 살아남은 자는 오직 아이들뿐이다. 성인과 소년의 경계에 있던 나치 소년병들조차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조조와 요키, 엘사 세 사람만 남아 서로 생존했음을 느낀다. 엘사는 베츨러네 집 벽 틈 속에서, 조조는 폐건물 구덩이에서, 요키는 찢어진 포대 군복으로 몸을 겨우 가리고 있던 모습을 떠올린다면 시 내용이 저절로 겹친다. 그야말로 더럽고 목숨 하나는 질긴 아이들만이 살아남아, 세상을 재건하고 평화로 채워갈 것이다.


 영화 초반 조조는 망설임도 많고 자신감이 부족한 인물로 등장한다. 친구라곤 요키와 환상 속 친구인 아돌프 히틀러가 다고, 누나는 일찍 사망했으며 아버지의 부재까지 겪는 그야말로 성장에 있어 최악의 상황을 겪는 인물이다. 거기다 교육이라곤 국가에서 주도하는 나치 캠프뿐이다. 이 과정에서 조조는 성장과 교육의 기회를 상실당한다.


 그 덕에 조조는 불안정하며 사교성이 부족한 행동을 자주 보인다. 이런 행동으로 엘사를 상처 주고 그와 갈등을 겪는다. 조조의 행동은 엄마 로지의 죽음을 통해 변화를 겪는다. 더 이상 미성숙한 상태에서 머물 수 없음을 깨닫고, 엘사를 고발하는 게 아닌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뀐다.

 두 사람은 포탄이 떨어지는 밤하늘을 보며 비밀을 나누고 가까워진다. 마치 불꽃놀이를 감상하는 듯한 장면은 다음날 폐허로 변한 도시를 비추며 다시금 관객을 현실로 끌어온다. 아이들의 순수함을 통해 작은 희망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아픔은 지워지지 않고 트라우마로 남음을 시사한다.


 전쟁이 끝으로 치달으면서, 조조에게 두 가지 변화가 생긴다. 하나는 조조가 걸쳤던 나치 제복이 벗겨진 것과, 또 하나는 신발 끈을 묶을 줄 알게 된 것이다.


 조조는 환상 속 친구로 아돌프 히틀러를 만들어 낼 정도로 나치 소속이 되고자 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끝나고, 겁쟁이라는 의미의 '조조 래빗'이라는 멸칭만 얻는 결과로 이어진다.

 풀이 죽은 조조에게 아돌프는 토끼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강한 존재임을 말해주며 그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다. 조조는 그 말에 다시금 기운을 차리고 수류탄 던지기 훈련에 뛰어드는 어리석은 행동을 벌인다. 결과는 다시 실패. 절망-희망-절망의 구조가 반복된다.


 이어진 장면에서 로지는 클렌젠도프를 찾아가 조조에게 소속감을 줄 수 있는 임무를 주라며 그를 맡긴다. 조조는 다시금 나치 소속이 되고 허울뿐인 잔업이지만 나치에 이바지하는 것이라 믿으며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 조조와 요키는 같은 또래지만 상반된 위치로 서로를 마주한다. 조조는 깡통로봇 같은 우스꽝스러운 옷을, 요키는 군복을 입고 등장하지만 서로가 입은 옷이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같다. 가장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에게, 국가는 겨우 종이포대를 재활용해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옷을 입히고 역할을 부여한다.


 나치의 패색이 짙어져서야 조조는 진짜 나치 제복을 입게 된다. 먹을 걸 구하러 밖으로 나온 조조를 발견한 람이 강제로 제복을 입히고 무기를 건넨다. 수류탄을 던지던 과거의 모습과 일치하면서도 조조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조는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왔지만 뛰어들지 못하며, 람이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만 보게 된다.

 수류탄을 던진 과거에서, 조조는 연기에 휩싸인 채 얼굴과 다리에 상처를 입고 자존심 또한 크게 다친다. 반면 실제 전쟁에선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이는 길지 않다. 진실을 전하고 지켜야 할 존재가 있음을 떠올린 조조는 서둘러 안식처로 향한다.


 또한 영화에선 지속적으로 신발과 신발 끈을 노출하며 이를 조조의 성장과 연관 짓는다. 로지와 함께하는 장면에서 조조는 여러 번 신발 끈이 풀리고, 그걸 묶어주는 로지의 모습을 반복하다 마지막엔 로지의 신발 끈을 묶어주지 못하는 조조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조조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며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로지의 죽음 이후, 조조는 엘사의 신발 끈을 묶어줄 정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거기에 후유증으로 세상 밖을 나가길 두려워하던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이번엔 전쟁을 두려워하는 엘사를 바깥으로 이끌 정도로 역할이 뒤바뀐다. 엘사는 춤추고자 했던 로지의 말을 따라 자유를 만끽하며 조조와 함께 춤춘다.


 영화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은 당연 게슈타포가 등장하는 장면과 유대인 책이다. 독일인과 다를 바 없는 유대인 엘사를 보여주며 독일인이 가진 편견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로지의 처형 이후 베츨러 집을 찾아온 게슈타포 또한 엘사가 유대인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클렌젠도프는 잉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애써 침묵한다. 독일인이든 유대인이든, 결국 같은 인간이며 이들을 구별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클렌젠도프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두 번이나 아이들을 구한다. 위 장면에서 엘사를 구하고, 마지막엔 조조가 걸친 나치 제복을 벗기며 그를 쫓아보낸다. 클렌젠도프는 나치 군인이며 나치 캠프의 책임자지만 한편으론 전쟁의 광기에 희생된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전쟁이 얼마나 허망하며, 나치가 실패할 것임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엘사에게 잉가의 신분증을 건네주고, 조조의 제복을 벗김으로써 아이들이 죽음을 피해 갈 수 있게 행동한다.

 클렌젠도프의 행동은 게슈타포를 비롯한 나치 인물들과 대비된다. 앞서 언급한 람의 경우 패색이 짙어졌음을 알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아이들에게 무기를 쥐여주며 자폭을 하도록 유도하고 결국 폭탄 속에서 사라진다. 반면 클렌젠도프는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제복을 걸친 채 등장하지만 살아남고 조조와 자신의 생명을 맞바꾼다.


 영화 후반에 이르며 남은 것은 폐허가 된 독일과 수많은 전쟁 포로들, 그리고 목숨 질긴 아이들뿐이다. 로지와 클렌젠도프를 비롯한 정상적 어른들은 전쟁에 희생되고, 광기 어린 전범들은 자신의 죄악에 책임져야 한다.

 살아남은 조조와 엘사, 그리고 요키의 미래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언뜻 보면 해피엔딩이지만 한편으론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득한 새드엔딩이다. 관객의 마음속에 마냥 희망만 남아있지는 않다.

 하지만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전쟁세대 작품에도 남아있듯, 절망과 희망의 반복적 구조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그 구조 속에서도 성장은 이루어지고 아이들은 자라날 것이며, 언젠가 재건이 이루어질 것이다.

 조조가 어설프게 엮어가던 그 신발 끈처럼 우리의 불안함은 조조와 엘사의 불안정함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신발 끈을 묶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JojoRabbit




매거진의 이전글 아워바디; 누구도 대상화 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의 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