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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린 Oct 27. 2020

서스페리아; 모호함과 경계의 엔드게임

영화 '서스페리아' 해석



    서스페리아는 원작인 1977년도 판과 리메이크판인 2018년도 판으로 나뉜다. 다른 해석에서도 지적하는 바와 같이, 리메이크 판은 원작의 틀과 기본 플롯만 빌려올 뿐, 다른 이야기로 흘러가며 주제와 시사하는 바 또한 좀 더 복잡하다.

    원작은 공포 영화의 교과서라는 별명에 걸맞게 미스테리어스한 마녀들과 선한 주인공이라는 확고한 선악구조와 모호한 결말로 흘러간다. 반면 리메이크판은 정치적 요소와 더불어 사상적 갈등과 시대의 비극을 담아냄으로써, 공포영화 그 이상의 해석이 가능하게끔 여러 겹의 구조를 설정해두었다.

    나는 두 작품에 존재하는 공통점이자 동시에 차이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모호함'과 '경계성'이라고 본다. 모호함은 두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점이지만, 어디에 작용되느냐가 다르다. 경계성은 공통적으로 작품의 초반부터 이후까지 보이는 점이지만, 이것이 유지되느냐 마느냐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본 글에서는 서스페리아 2018년도 버전에서 나타나는 모호성과 경계성, 더 나아가 작품 속 계급구조를 무너뜨리는 죽음의 평등함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부분적으로 서스페리아 1977년도 버전과의 비교를 시도할 것이다. 이하의 글에서, 편의상 서스페리아 2018년도 버전을 서스페리아 또는 작품으로, 서스페리아 1977년도 버전을 원작으로 통칭할 것이다.



1. 서사구조

    서스페리아와 원작의 차이점은 서사구조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원작의 경우,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형적이라 할 수 있는 선악구조가 명확한 서사구조를 가진다. 타국에서 온 이방인이 그들만의 규율과 계급으로 철저하게 짜 맞추어진 집단에 침투하여 기묘한 사건을 마주하고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이야기가 끝난다. 이 과정에서 이방인은 정의롭지 못한 사건을 마주하고, 주변 인물들이 희생되는 영웅적 서사를 겪고 마녀 집단이라는 절대적 악과 대치된다.

    반면 서스페리아는 대결 구도는 존재하나 이 구도 속에 선악이 모호하다. 누가 선인지, 악인지가 존재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수지가 서스페리아였다는 결말로 이어지면서 대결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후반에 이르러서야 마르코스를 악으로 설정하며 무자비하게 살육을 일삼고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마르코스와 블랑, 또는 마르코스와 수지로 대치되는 관계를 보여주나 이는 선악구도라기보다는 파워게임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미 권력과 지지세력을 쥐고 있는 구세대 마르코스와 권력과 지지세력은 없으나 합당한 힘을 가진 신세대 수지의 대치를 통해 선악구도는 사라지고 누가 서스페리아의 후계냐는 진실공방으로 뒤바뀐다.


    선악구도의 모호함은 작품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 될 수 있다.

1) 선과 악의 이분법적 대결구도로 이루어지는 플롯에서 벗어난다.

2) 악인을 설정할 수 없는 문제가 생성되며, 이는 고정된 인식을 통한 캐릭터 해석이 불가해진다.


    첫 번째의 경우, 원작의 플롯과 같은 뻔한 내용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누가 옳고 그른가를 구분할 수 없기에 작품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원작에서 보이는 선악구도가 마녀와 이방인의 대치였기에 여기서 발생되는 문제들을 외면할 수 없다.

    이 문제들은 여성 혐오적,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의 작용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작품의 제작 시기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작품에 남아있는 요소들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담습 하며, 이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1) 목적 달성을 위해 오컬트적 행위를 하고, 마녀 행위를 한다. 2) 이 행위에 희생물이 사용되며, 그 희생물은 같은 여성이거나 약한 생물이다. 3) 악인을 저지하는 영웅은 선하고 순수하며 마녀적 사상에 오염되지 않은 처녀다.

결국 원작에서 나타나는 선악구도는 마녀와 이방인, 악인과 영웅의 대치임과 동시에 타락한 악녀와 순수한 성녀의 대치로 이어진다. 타락한 여성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같은 여자를 이용하고 희생하고자 하지만 그 목적은 처녀의 순수함으로 저지된다.

    반면 이 문제점은 서스페리아에서 장점으로 발현된다. 선악구도가 모호하며, 결과적으로 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말로 이어지기에 누가 성녀이며 누가 악녀인가라는 여성 혐오적 사고가 생성되지 않는다. 인물을 선한 여성과 악한 여성이라는 (여성) 역할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수지는 성녀가 아니라 서스페리아의 진정한 후계이며, 마르코스는 악녀가 아니라 한때 서스페리아의 후계였을지도 모르는, 이제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인물로 남는다.

    또한 수지가 서스페리아로 각성하기 직전, 자위행위를 하던 것을 들켜 체벌을 당했던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와 연결될 수 있다. 수지는 억압적 아미쉬 종교 하에서 모국에 맞는 정서, 어머니가 강요하는 종교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성녀화되는 과정을 요구받았다. 미국에서 수지는 성녀가 될 것이냐 악녀가 될 것이냐는 이분법적인 미래만을 가졌다면, 가족에게서 탈출하고 모국을 벗어남으로써 더 이상 성녀도 악녀도 될 필요가 없으며 자신 그 자체--서스페리아--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두 번째로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이 모호함으로 인해 캐릭터를 인식하는 게 어려워진다. 명확하게 설정된 악인이 존재하지 않기에 작품에 존재하는 대립구도는 어느 순간 눈 녹듯 소멸된다. 모든 인물들은 주인공이 초월적 인물로 변신하기 위해 소모되는 존재로 이용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포커스가 주인공에게 맞춰진다. 선악구도의 모호함을 통해 작품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하다, 결국 주인공이 초월적 존재였다는 너무나도 뻔한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긴장감을 무의미하게 한다.



2. 모호함

    원작 속에서 나타나는 모호함은 장소, 시간, 역사 등에 적용된다. 서스페리아의 경우, 명확한 시간대와 배경을 제시하고 사건이 이루어지는 장소(탄츠 학원)를 둘러싼 정치적 역사와 사상 갈등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관객은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를 토대로 작품이 담고자 하는 의의와 의미를 충실하게 찾아낸다. 원작은 이러한 정보를 제거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스토리라인에 집중시키게 하고, 주인공이 진실을 마주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한다.

    이는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 있어 다른 태도를 보이게 한다. 원작은 텍스트(스토리) 중심적 분석이 가능하게 하고, 추가적으로 작품의 미장센과 상징을 더해 해석한다. 반면 서스페리아는 해석 방향이 다방면적이다. 하나의 작품을 두고 정치적 관점으로도, 문화적 관점으로도, 페미니즘, 오컬트 등의 다양한 관점이 적용 가능하며 이를 혼합할 수도 있다.

    이 차이는 모호함을 어디에 적용하며,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차이에서 온다. 원작은 명확한 장소와 시간적 배경을 제공하지 않는다. 한 소녀가 미국에서 독일로 건너왔고, 그곳은 마녀들의 주술 공간이었다는 대략적인 그림만 제공한다. 수지가 어떤 과거를 가졌고, 사건이 총 며칠에 걸쳐 일어나며, 그 장소는 정확히 독일의 어느 도시이며, 시대는 언제인지가 부재한다. 이 덕에 작품을 해석하는 방향이 명확하며 텍스트만을 이용해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생성되는 것이다.

    반면 서스페리아는 장소와 시간, 역사를 명확하게 보여주지만 오히려 이는 관객에게 하여금 해석의 모호함이 생성된다. 즉, 지나친 정보와 해석 방향을 제시해 줌으로써 단 하나의 정제된 해석을 도출하기가 어려워진다. 예컨대 페미니즘적 관점을 통해 작품을 분석하고자 하는 목표가 명확하더라도, 작품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나 계급구조를 마냥 외면하고 쓸 수는 없는 셈이다.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고려할 바가 많아짐으로써 관객의 해석은 방향을 상실하고 모호해진다.




    서스페리아의 포스터 이미지 또한 작품의 모호성을 담는 것이라 본다. 포스터 속 인물이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으며, 대략적으로 누구일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나는 블랑이라고 추측한다.) 더불어 인물을 추측할지라도 머리칼 너머 인물의 표정과 상태를 짐작할 수 없다. 목이 뒤로 꺾였다든지, 사실은 마르코스가 아니라 블랑이 흑막이었다든지, 수지의 나이 든 모습이라든지. 관객은 무엇도 짐작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의 모호한 해석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3. 경계성

    모호함과 마찬가지로 경계성 역시 두 작품에 공존하나 작품 간의 차이를 빚어내는 포인트다. 원작과 서스페리아 모두, 미국에서 독일로 온 이방인 소녀이며 학원에 감도는 기시감을 눈치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미국에서 독일로 넘어왔다는 설정과 학원의 이상함을 눈치챈다는 것은 주인공이 가진 경계성(Liminality)을 드러내는 요소다.

    기시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 집단에 섞이지 못하며 변두리(경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희생되는 인물들 또한 기시감을 느끼며 집단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집단화된 인물이기에 이들이 시도하는 것은 탈출이 아닌 추방 또는 희생물화로 이어진다. 미국에서 독일로 건너왔으며, 그 기간이 짧은 수지는 추방이 아닌 탈출이 가능한 인물이 된다.

    여기까지는 원작과 서스페리아 간의 공통적인 플롯이다. 이하부터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경계성이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고자 한다.


1) 원작의 경우, 주인공의 경계성이 작품 끝까지 유지된다. 결과적으로 외부인에 의한 집단의 파괴가 이루어진다.

2) 서스페리아의 경우, 주인공의 위치가 경계인에서 중심인으로 바뀐다. 그러나 주인공이 가지는 미묘한 경계성, 집단에 완전히 섞이지 못하는, 이 존재한다. 주인공에게 경계성과 중심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게 되면서, 집단은 파괴되지 않지만 내부의 계급과 구조가 변화를 거치게 된다.


    1번의 경우를 고려하여 원작을 본다면, 주인공이 지속적으로 기시감을 호소하며 집단에 어울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마르코스-선생-학생이라는 철저한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지는 탄츠는 그 구조가 너무나도 정교하고 탄탄하지만, 주인공이 중심(마르코스)을 해체하게 되면서 구조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 결과 집단의 파괴로 이어진다. 주인공이 고수하던 타자, 경계인으로서의 태도가 집단화, 전체주의화된 공간을 거부하고 이를 흩트려놓는 것이며, 더 나아가 중심을 해체하면서 집단의 가치를 해체한다.

    2번의 경우를 고려하여 작품을 본다면, 원작에 비해 적극적으로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수지는 기시감을 호소하는 사라를 보며 집단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다. 수지의 태도는 경계를 침범하는 태도임과 동시에 타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수지가 집단에 속한 기간이 매우 짧다. 여기서 제시할 수 있는 가설은 수지의 재학 기간이 좀 더 길었다면, 작품 배경이 최소한 1~2년 후를 배경으로 하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았을까다.


    다시 돌아가서, 수지는 외부에서 유입된 경계인이자 이방인이며 타자다. 그러나 원작과 서스페리아 간에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원작에는 수지의 역사가 없고, 서스페리아에는 수지의 역사가 있다. 원작에서는 수지가 미국에서 건너왔다는 정보만 있고, 서스페리아는 억압적인 아미쉬 집단에서 나와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노력한다는 정보가 명확하게 존재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원작에서 수지는 국가와 국가 간의 이동을 했고, 서스페리아의 수지는 집단에서 집단으로의 이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두 집단 간에는 광신적 종교라는 공통점이 존재하고, 그렇기에 첨예하게 대적한다. 서구 종교의 특성이 맹목적으로 유일신을 따른다는 점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서로 다른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신 또한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다른 집단에서 다른 신을 따르던 인물이 기존의 집단에서 벗어나 새로운 집단에 편입되려면,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진다. 첫 번째는 자신의 모든 믿음을 청산하고 이교도의 신에게 흡수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믿음을 이교도에게 전파하기 위해 성전을 벌이는 것이다. 서스페리아는 후자를 택함으로써 마르코스를 물리치고 자신이 곧 집단의 중심이 되고 더 나아가 초월적 존재인 서스페리아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점의 함정은 그렇기에 수지는 경계인의 입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심은 하나만 존재한다. 여러 개의 중심은 존재할 수 없다. 중심은 성역화되며, 절대적 존재가 된다. 수지는 중심이 됨으로써 중심이 아닌 자들(학생과 선생)과 섞일 수 없다. 그러므로 수지는 경계인에서 중심으로, 다시 경계인으로의 위치를 반복한다.



4. 죽음 앞에서 구현되는 평등

    원작과 서스페리아 모두 학원 내의 계급구조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더 나아가 서스페리아의 경우는 사상과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전복되는 사회와 계급구조를 드러낸다. 그만큼 계급은 두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학원은 마르코스-선생-학생이라는 피라미드 구조로 존재한다. 마르코스를 신선하고 건강한 육체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더 나아가 그 과정을 통해 마르코스를 서스페리아로 각성시키기 위해 제물을 찾고자 하는 것이 이들 집단의 목표다. 이를 완수하기 위해 계급을 철저히 이용한다. 마르코스는 원하는 바를 선생들에게 요구하고, 선생들은 적합한 제물을 찾고 배신자를 색출하고, 학생들은 희생당한다.

    이러한 계급구조는 2막에서 관리자를 뽑는 투표를 시행하는 장면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들의 모습은 언뜻 보면 민주적이고 다수의 의견을 반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 후반에서 드러나듯 그것이 그릇되었다 느낄지라도 이를 거부하거나 반대할 수 없다. 이미 계급은 형성되었고, 이를 전복할 수 없기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전복은 발생한다. 외부인이자 경계인인 수지가 죽음으로써 계급을 무너뜨리고 평등을 이끌어낸다. 계급을 전복할뿐더러, 규율도 무너뜨린다.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른 어머니에게 죽음을 말하라"라는 마르코스의 말에 수지는 어머니를 죽이는 게 아닌, "내가 곧 어머니"라고 명명한다.

    수지가 악인들을 죽이는 장면은 네메시스의 재현이다. 잘못을 했기에 처벌하는 것보다는, 분수에 어긋난 욕망을 꿈꾸고 이를 위해 지나친 살육에 동참한 인물들에게 지나침은 그릇된 것임을 알려주고자 처벌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서스페리아 의식은 희생물이 필요하다는 걸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탓이다. 어쨌든 희생물은 필요하고, 서스페리아가 각성은 하겠지만 마르코스와 인물들은 그 과정이 지나쳤기에 네메시스로서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다.

    또한 악인 외에 희생자들이 죽은 장면 또한 평등을 구현하는 과정이다. 이 장면을 얘도 죽이고, 쟤도 죽이고, 다 죽이고... 이렇게 읽는 것보다는 수지의 퍼포먼스에 집중해서 보는 걸 추천한다. 수지는 희생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What do you ask?)라고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은 "죽고 싶다(Die)"로 돌아오고, 그 소원을 이루어준다.

    이를 통해 학원에는 큰 희생과 변화가 발생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을 억압하던 피라미드 구조가 소멸된다. 마르코스는 사라지고, 블랑은 부활하긴 했지만 언제 복귀할 수 있을지 모르며, 수지는 밖을 떠돌아다니며 서스페리아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추가적으로 언급하자면, 클렘페러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 또한 죽음의 연장선이다. 클렘페러가 바라는 것은 그날 있던 사건의 내막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아내가 죽었다는 진실이다. 그 결과 클렘페러가 가지고 있던 아내가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극중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군가를 상실함으로써 동등해진다.



5. 결론

    서스페리아를 원작과 비교하면서 모호함과 경계성, 죽음과 계급의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하였다. 영화 자체가 다방면으로 해석 가능한 만큼 좀 더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많지만 여기서 줄이고자 한다. 다른 해석에서도 언급되듯 어머니에서 다른 어머니로의 이동 과정을 통해 여성의 성장과정을 읽는다든지 하는 페미니즘 관점으로 작품을 해석해본다면 굉장히 흥미롭고 여성주의적으로 작품을 볼 수 있을 거 같다.

    또한 사라나 패트리샤를 탄츠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볼 수 있을 거 같다. 죽어서 희생당한 건 맞지만, 이들의 희생은 탄츠 집단을 위한 희생이지 결과적으로 서스페리아에게 바쳐지는 건 아니니 이들을 호모 사케르냐 아니냐의 관점으로 봐도 재밌을 거 같다. 호모 사케르는 아직 배우지 못한 이론이니 배우고 나서 다시 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서스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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