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0. 아이는 6살, 나는 슈퍼우먼!

 내가 방과 후 교사로 일을 시작한 지 5년이 넘어섰다. 아이들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보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방과 후 교사로 일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 가지 차별과 부당함을 참아야 하고 학교문화나 교장의 사상과 철학에 따라 촌지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방과 후 교사는 1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했다. 그런데 재계약을 할 때마다 계약금을 내야 한다는 거다. 그 관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학교마다 문화가 다르고 교장마다 생각이 다르니까. 그런데 나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 돈을 내지 않으면 재계약을 안 해준다고 하니 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금액도 자유라는데 도대체 그런 것은 누가 정한 건지 모르겠다. 일종에 촌지일 것이다.


 그 당시 어떤 학교에서는 방과 후 교사 출근부를 교무실 바닥에 배치해 놓아 선생님들은 무릎을 꿇고 출근부 체크를 해야 했다. 그것에 비하면 촌지는 약과일까?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그렇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촌지를 주고 돌아온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비도덕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휘둘렸다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었다. 약자의 억울함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다.


 다음 계약을 할 때에는 교장이 바뀌었기 때문에 촌지를 내지 않아도 계약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기마다 교실을 옮겨 다녀야 했고 어떤 선생님의 교실을 빌려 쓰느냐에 따라서 3달 동안의 수업 분위기가 결정되었다. 방과 후 담당 교사가 어떤 분이냐에 따라서도 운명이 결정되었는데 한 번은 방과 후 교사를 인간이하로 대접하는 교사를 만나서 꽤나 마음고생을 했다.


 수입도 괜찮고 보람도 있는 일이라 쉽사리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가 6년 차가 되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좋고 일은 계속해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했다.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어떤 곳에서 일을 하면 될지 알 수 있었다. 내게는 보육교사 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4세 반 아이들의 부담임이 되었다. 17명의 아이들을 보육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몸이 무척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5년 차 되는 훌륭한 선생님이 짝 교사라 많이 배우며 일했다. 안심이 되었다. 아이들도 무척 예뻤다.


 당시 석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5시가 되면 학교로 갔다. 낮에는 아이들을 보육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잘 따르는 아이들이 있었고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5월 한 달간은 교생실습 기간이라 아이들을 볼 수는 없었지만 동영상과 사진으로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중학생들도 무척 예뻤지만 4살 아이들이 가끔 눈에 밟혔다.


 교생 시절, 국어시간에 3분의 2의 학생이 책상에 엎드려 자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들어가는 1학년과 3학년 교실에서는 결코 자는 학생이 한 명도 없게 하리라 다짐하고 6시간 동안 수업 교구를 만들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오려 자석을 붙이고 조별 이름도 만들어 첫 수업을 했다. 조를 짜는데 3일이 걸렸다. 아이들 한 명 한 명 앞으로 나와 자신의 이름을 떼고 옮겨 붙이며 조 짜는 게임에 빠져 한 아이도 엎드려 자지 않았다. 조를 짠 다음에는 무조건 토론 수업을 했다. 주제가 무엇이 되었든 한 명씩 발표를 하고 조별 점수를 붙이고 수업이 끝날 때마다 뽑기를 해서 선물을 주었다. 


‘희(hee) 스토리'시간을 만들의 나의 자격증을 화면에 하나씩 띄어놓고 강의를 했을 때에는 아이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후 나는 여러 교실을 돌아다니며 같은 강의를 해야 했다. 많은 아이들이 나에게 편지를 주며 고맙다고 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뭔지 알게 됐다면서 자격증부터 취득하겠다고 말했다. 


 교생실습을 하는 한 달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한 달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오롯이 아이들과 수업에 집중했다. 교생실습 마지막 날 나는 편지와 선물도 많이 받았다. 나도 밤새 만든 선물과 함께 POP로 쓴 편지를 받은 사수에게 주었다. 더 주고 싶은데 더 높은 점수가 없어서 100점밖에 못준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교생실습 점수가 만점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교생실습이 끝나고 다시 4세 반 아이들에게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여전히 예뻤다. 그런데 석사논문을 쓰면서 몸이 고된 일을 하려다 보니 이틀이 멀다 하고 몸살이 났다. 고열과 근육통이 동반되었는데 나는 링거를 맞으며 한 번도 결근과 결석을 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다 교수님 추천으로 타 학과 조교로 일하게 되었다. 대학원생들을 상대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일한 곳은 토목공학과 학과 사무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공격적이고 까다로운 대학원생들이 찾아와 언성을 높이는 일도 있었다. 


  학과 사무실로 찾아온 한 대학원생은 나에게 몇 살이냐고 고성을 지르며 물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선생님보다 많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 학생은 내 나이를 알고 바로 사과했다. 산전수전 겪으며 나이를 먹어가니 웬만한 사람이나 상황은 나를 흔들어 놓지 못했다. 


 1년 동안 나는 상황에 맞춰 세 가지 일을 했다. 손에 익지 않고 낯선 환경이었지만 어느 곳에 있든 내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때 아이는 6살이었고 나는 슈퍼우먼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09. 거리가 필요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