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48년 지기인 친구 Y가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처음 Y를 만났다. 당시 내가 느낀 첫인상은 몸집이 단단한 친구였고, 유도를 잘해서 덩치 큰 친구를 곧잘 이기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는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우리 학교 우등생 친구를 괴롭히는 다른 학교 학생들을 옥상으로 불러내어 힘으로 응징해 주었을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 즉 힘이 있어도 그것을 싸움질하는데 썼던 친구가 아니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다른 친구로부터 일곱 명의 친구 모임을 만드는데 합류할 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선뜻 그 모임에 들어갔다. 이름하여 Young Gargantua(소설에 나오는 거인 왕)라는 모임이었다.
훗날 칠송회(七松會)로 발전하였는데 몇몇 동기들이 끼워달라고 기웃거렸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두 개의 친구 그룹이 모여서 하나로 합쳐진 모임이었고, 현재 의사가 된 친구와 같이 합류하여 Y와는 더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아버지는 Y를 비롯한 친구들을 우리 집에 불러 모아 주도(酒道)를 가르쳐주셨다.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 취지의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주도를 배우던 Y가, 아직도 그 장면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고등학교 졸업 당시 전주 시내에 ‘불새다방’이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 M을 만나러 같이 모였는데, 불새다방은 어느새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모이면 같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그 시절 Y는 나에게 술과 담배, 당구, 잡기를 가르쳐 주었다. 이를테면 나의 인생 사부였던 셈이다. 거기에 모인 또 다른 선배들과 같이 어울리다 선배에게 반항했다는 구실로 단체기합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정도 다지고 선후배 간의 돈독한 정도 나누던 시절이었다.
Y는 나와 사제지간으로 한 편을 먹고 다른 조와 당구시합을 벌인 적이 많았다. 당시는 돈이 별로 없었기에 혈구(血球)라 불렀던 시합에서 죽기 살기로 겨뤄 무조건 이겨야만 했다. 우리는 팀워크가 잘 맞는 황금콤비를 이루어 승률이 높았다. 만약 지는 날이면 궁색하게 내 시계를 맡기곤 했는데, 시계 찾으러 가서 또다시 맞붙어 기어이 이겨야 직성이 풀릴 만큼 둘 다 승부욕이 강했다.
Y는 잡기에도 능해서 친구들끼리 1박 2일로 고스톱이나 포커게임을 하면 판을 휩쓸었다. 그런 Y의 포스가 늘 부러웠다.
Y는 나보다 더 발이 넓고 일찍 세상을 접한 친구였다. 장남으로 자라서 형이나 누나가 없던 나보다, 여러 형제자매의 막내였던 Y는 일찍 사회에서 경험한 노하우를 나에게 전수해 주었다.
그는 내 청춘에 눈을 뜨게 해 준 정신적 지주 역할도 맡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첫 미팅도 Y가 주선해 주었다. Y는, '나는 밑을 깔아주는 친구'라며 껄껄 웃던 친구였다.
20살 되던 해 우리 친구들은 갑자기 겨울바다를 보러 여수를 거쳐 상주해수욕장으로 여행을 떠났다. 기타와 카세트를 둘러메고 기차와 버스, 배를 타고 머나먼 남해안까지 찾아 나섰다. 두근거리던 심장소리를 들어가며 낭만을 찾던 그 시절 풋풋한 사진을 보면 지금도 미소가 머금어진다.
우리는 여러 친구들과 전주 시내에서 놀다가 흩어지게 되면 걸어서 집에 가곤 했다. Y는 방향이 비슷한 나와 중노송동에 있는 진안사거리까지 같이 걸었다. 전주풍남초등학교와 전주고등학교가 대각선으로 교차되는 사거리가 진안사거리였다. 전주고등학교 방면 울타리 쪽으로 쭉 가면 진안군으로 간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데, Y는 진안군 방면으로 가고 나는 기린봉 쪽으로 헤어지게 되는 지점이었다.
불새다방 근처에서 출발하여 홍지서림을 지나면 조약국을 거쳐 동부시장으로 진입했다. 시장통의 막걸릿집을 힐끗 훔쳐보며 풍남국민학교 앞을 지나치면 진안사거리가 나왔다. 걸어오는 동안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으면 Y는 막걸리 생각이 난다며 한잔 더 마시고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나는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500원이나 천 원짜리 지폐를 깊숙이 감추고 비상상황에 대비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엔가 우연히 이것을 알게 된 Y가 나에게 숨겨놓은 돈이 있지 않느냐며 막걸리 한잔 마시자며 꼬드기기 시작했다. 헤어지기 아쉬웠던 우리는 진안사거리 근처 막걸릿집으로 들어가 가장 싼 기본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다. 걸쭉한 아저씨와 수다스러운 아주머니의 농담을 귀동냥해 가며 세상 물정을 터득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인봉리 좁은 골목길에 있었다. 어느 날 Y는 오토바이를 타고 부릉부릉 굉음을 내며 우리 집 앞 골목길에 나타났다. 당시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내 동생들은 오토바이를 늠름하게 몰고 나타난 Y를 보며 선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지금도 동생들은 Y의 멋진 모습을 이야기하곤 한다. 한마디로 멋진 사나이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막걸리 값을 낸 나에게 Y는 신세를 졌다고 생각했는지 자기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친구 집에서 자고 아침을 얻어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형제자매가 많은 Y의 집에 눈치를 보며 밤에 살금살금 기어 들어가서 자고 나면, 다음 날 아침 Y의 어머님은 살갑게 아침상을 차려 주셨다. 또 상냥하게 우리를 맞이해 주던 예쁜 누나도 있었다. 그 누나는 당시 전북도청에 근무하고 있던 공무원이었다.
방학이면 나는 Y와 함께 여성잡지를 판매하러 지인을 찾아 돌아다녔다. 잡지 한 권 팔면 500원이 손에 쥐어지던 시절이었다. 도청으로 누나를 찾아가서 책을 사달라고 졸라대면 누나는 점심도 같이 사주며 한겨울에 고생한다고 격려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를 잘 대해줬던 누나가 젊은 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게 된 것이 정말 가슴 아프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학시절 내 자취방에 놀러 온 Y는, 뜨거운 밥에 날계란 하나 톡 까서 넣고 간장에 비벼 먹는 내 모습을 보더니,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먹는 식사라며 동정해 주었다. 아마도 가난한 고학생 친구의 사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을 것이다.
또 내가 취직하자마자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삼일장 내내 슬픔을 함께 하며 마지막까지 빈소를 지켜주었다.
Y는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공사에 입사했다. 사귀는 여자가 있어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고, 나는 그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보았다. 그날 밤 뒤풀이 자리에서 지갑이 넣어진 채로 내 양복저고리를 도둑맞은 것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결혼 이후 안산에 터전을 마련한 Y는 친구 가족들을 초대하여 부부동반 모임을 자주 주선하였다. 덕분에 안산시에 많이 놀러 가게 되었다. 당시 안산은 반월이란 이름으로 불려진 산업공단 도시였다. 막 운전을 시작하던 시절, 차를 몰아 애들을 데리고 안산에 놀러 가면 Y 가족은 따뜻하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늘 맛있는 식사에 좋은 술과 안주를 내주었다.
일곱 명 친구 중에서 M은 치과의사가 되었는데, 어디에 개업해야 할지 망설일 때 안산에 자리 잡게끔 도와준 것도 Y였다. 그러면서 M의 집안 식구들까지 챙겨 주는 자상함도 발휘했다. 나는 Y와 M을 보러 안산을 더 자주 놀러 가게 되었다. 치과에 들러서 치아치료를 받고, 저녁이면 Y와 M과 같이 어울려 한잔씩 하였다. 셋이 모이면 어려운 난제도 쉽게 풀렸고, 서로 격려를 나누곤 하였다.
Y는 다니던 공사를 나와 민간 건설업체로 이직하였고, 젊은 나이에 현장소장이란 중책을 맡게 되었다. 나이에 비해 훨씬 빨리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또 리더십을 발휘했던 모습을 보고 회사에서 눈도장을 찍었던 듯하다.
Y는 젊은 시절 시화공단 간척사업을 맡게 되었다. 주말이면 친구들을 초대하여 당시 유행하던 조개구이와 해산물을 원 없이 먹여 주었다. 우리는 드넓은 뻘이 언제나 메워질까 상상하면서 술과 대화로 밤을 지새웠다. 당시 취업 중이던 내 동생은 Y가 편의를 봐줘서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30,40대 우리는 각자 일터에서 자리를 잡느라 매우 바쁜 시기였다. 하지만 Y가 중심을 잡고 연락을 취하면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심지어 미국에서 목사가 된 W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Y가 모임의 중심이었고 그만큼 리더십을 갖고 있었다.
집으로 초대하면 Y는 손수 고기를 굽는 특급 그릴러를 자처하며 아예 친구들이 나서지 못하게 했다. 가족동반으로 에버랜드에 간다던가 리조트나 콘도를 빌리고 모여서 놀았는데, 주로 통 큰 Y가 경비를 부담했다.
Y는 안산에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마련하였고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막내인 Y가 고령의 노모를 마지막까지 모신 것이다. 심청 못지않은 효자였다. 지금은 돌아가신 그의 어머님이 많이 그립다. 현재는 또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효자 사위이기도 하다.
Y는 굵직굵직한 국책 프로젝트를 많이 맡았다. 시화공단뿐만 아니라 여수공항, 나로호우주센터, 성주산업단지 등, 큰 공사를 맡아서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수완을 보여주었다. 포항이나 제주도 등 전국 각지 대규모 공사에 바삐 돌아다니느라 거의 주말부부로 살았다. 최근에는 영종도의 인스파이어 리조트 건설에 책임자로 참여하였고, 현재는 첨단복합항공단지 조성공사에 단장으로 참여하고 있다.
Y는 경상도에서 공사를 담당하던 시절에 알게 된 형님처럼 지내는 김사장님과 지금까지 20년도 넘게 우정을 간직하고 있다. 영호남을 넘어서 연령도 초월한 사나이끼리의 우정이다. 어느 날 김사장님의 초청으로 친구들이 경상도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김사장님이 전액 비용을 부담하여 하루 저녁을 거하게 먹고 밤새도록 마시며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며 놀았다. 다음 날은 가야산국립공원의 합천 해인사를 들러보고, 소리길도 걸어보았다. 비즈니스를 떠난 우정을 20년 넘게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그만큼 삶에 활력소가 되는 모임을 자주 기획한다.
경상북도에 단신 부임했던 시절에는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기타를 배웠다는데, Y가 참여한 기타 모임은 길거리 버스킹을 열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대단한 실력의 재야고수인 기타 선생님과 멤버 기타리스트를 초청하여 전주시에서 공연도 마련하고 한옥마을도 구경시켜 주고 전주비빔밥도 맛보게 하는 등, 큰 행사를 기획한 것도 Y였다. 경상도 사람들에게 전주 남자의 진수와 정을 보여 준 것이다.
Y는 스스로를 낮춰서 나같이 성실한 학생과 자기는 많이 대비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닮지 않아 보이는 우리 둘은 의외로 공통점이 많아서 친구가 되었다. 그것은 비슷한 시기에 가난이라는 짐을 지고 살았던 가정 형편, 그리고 목표 지향주의였던 점, 또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 등이 어우러져 서로 통했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친구야 나는 그냥 네가 좋아!’ 이런 느낌이었다.
Y의 배려심을 하나 이야기하면, 자기 차를 직접 운전하여 멀리 놀러 갔다 오는 길에 여러 친구들이 다 같이 잠이 들었다. Y는 잠든 친구들이 깰까 봐 몇 시간 동안이나 소변을 참고 운전했을 정도로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큰 친구였다. 통도 크지만 자상하고 의외로 배려심이 많은 친구가 Y였다. 터프한 사나이처럼 생겼는데 의외로 성격이 섬세한 친구이다.
어느 날은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를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더니, 각자 공감하는 시를 낭송하자고 했다. 너무나 감성이 풍부해서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자식 복도 있어서 슬하에 딸 하나에 아들 둘을 얻었다. 다들 장성하여 카페사장이 되었거나 대기업에 취업하였는데 신실한 신앙심을 가진 가족이라 하느님께서 돌보시는 듯하다. 코가 커서 잘 살 거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었고, 실제로 그 코 값을 하며 살고 있다. 그의 우월한 유전자는 지금 태아로 있는 손자에게까지 유전되어, 코 큰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보면 절로 웃음이 번진다.
아들 둘의 이름을 딴 건물도 지어서 주말이면 건물 보수공사에 청소도 하고, 딸이 경영하는 카페의 심부름도 하면서 지낸다. 손재주도 좋아서 나무와 연장만 있으면 뚝딱뚝딱 의자나 받침대도 쉽게 만든다. 여러 개 선물로 받아서 화단에 사용하기도 하고 집에서도 요긴하게 사용 중이다. 한없이 가진 능력을 베풀며 사는 그가 존경스럽다.
50대 늦은 나이에 어려운 기술사 시험에 도전하여 당당히 합격할 정도로 학구열도 대단한 Y는 기술사 자격증을 바탕으로 건설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대형 공사의 단장을 맡고 있는 Y가 샅샅이 공사 현장을 누비듯, 친구들의 우정도 구석구석까지 살펴주는 모습이 경이롭다.
Y는 요즘도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지만 나와 만나면 언제나 편하게 소주 한잔 하면서 퇴직 후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함께 고민한다. 요즘은 여행이야기가 많은 편이다.
우리는 여행을 같이 다닌 적도 많은데, 부부동반으로 넷이서 유럽 4개국(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을 놀러 가기도 했다. 덕분에 아내는 자기보다 선배인 Y의 부인과도 친해져서 언니라고 부르는 사이로 발전했다.
또 내가 아들 취업을 기념하여 다른 친구 S의 부부와 함께 세 친구 부부동반 도쿄, 요코하마 여행을 스폰서 했던 추억도 있다. 그들은 언젠가 나에게 그 빚을 갚는다고 하는데, 벌써 8년이 다 돼 간다. 우리 부부는 은근히 그때를 기대하고 있다.
Y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 국민연금을 받게 되었고 내년이면 할아버지가 된다. 이제 여윳돈이 생겼으니 더 밥을 잘 살 것으로 기대한다. 밥 잘 사주는 멋진 친구 Y와는 영원한 우정을 나눌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절로 든다.
교회에서 집사와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Y는 누구보다 교회 일을 성실히 챙기며 목사님과 장로님, 집사님들과 유대관계도 돈독하다. 그러면서 항상 나를 위해 기도를 열심히 해준다.
언제라도 부르면 함께 편하게 소주 한잔 할 수 있는 친구, 어찌 보면 형제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 Y야,
앞으로도 영원히 건강하게 만나자꾸나~
항상 부족한 내가 미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