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오름에서 별다른 밤까지
- 검소한 사랑과 고사리의 땅
11월 초,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렌터카를 받아 차를 몰았다.
맑은 하늘 아래 첫 여정은 아부오름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이지만, 둘레길을 따라 수국이 원을 그리며 피어 있는 곳.
그래서일까, 이곳은 언제나 신부의 베일처럼 보인다.
예상대로 정상 근처에서 웨딩촬영 중인 한 커플을 만났다. 사진사도, 조명도 없이 두 사람이 삼각대를 세워놓고 직접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검소하지만 정성스러운 사랑.
그 모습이 오름의 바람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 천천히 걷는 오름의 리듬
아부오름은 오르기 시작한 지 50미터쯤에서 바로 전망대가 나온다. 거기서 분화구를 내려다보고 한 바퀴 도는 길, 2km 남짓한 산책로다. 나이 든 부부도 충분히 걸을 수 있을 만큼 완만했다.
길 중간에는 소나무와 삼나무, 그리고 고사리와 찔레꽃이 뒤섞여 있었다.
제주를 대표하는 식물들이었다.
삼나무 단지 옆에 넓게 펼쳐진 고사리밭을 보며 아내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게 바로 고사리 천국이네!”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그 땅에,
고사리는 자연의 언어로 가을을 쓰고 있었다.
아부오름 근처 말목장을 들렀다. 녀석들은 밀짚을 먹느라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망울로 허허벌판을 지키고 있었다.
- 친구와의 저녁, 제주의 맥주 한 잔
오름을 내려온 뒤, 우리는 친구 부부와 약속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녁은 ‘송당퐁닭’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닭백숙과 묵은지 닭볶음탕, 그리고 벨기에산 맥주. 산미가 은은한 맥주는 제주 바람의 염도와 잘 어울렸다.
식탁 위엔 오래된 친구의 웃음이 피어났다.
우리는 일주일간의 일정을 대략 상의했고,
바람 없는 밤엔 낚시를 함께 하자는 약속을 나누었다.
그렇게 맥주잔을 부딪치며 하루가 저물었다.
- 별다락민박, 조용한 밤의 시간
숙소로 돌아오니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이곳의 이름은 ‘별다락민박’.
두 달 만에 다시 찾은 곳이었다.
방 안은 여전히 단정했고, 창밖으로는 풍차가 보였다.
짐을 풀고, 넷플릭스에서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를 감상했다. 화면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다 고요히 잠으로 스며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여행이란 결국, 익숙한 나를 낯선 곳에 옮겨놓는 일 아닐까.
- 여행의 첫 페이지
다음 날부터 아내와의 오름 탐방 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노꼬메오름, 군산오름, 다랑쉬오름, 영주산오름 등등.
하지만 첫날의 아부오름은 특별했다.
그곳에서는 검소한 사랑, 자연의 생명력, 그리고 조용한 평화를 동시에 만났다.
바람이 스치고, 햇살이 내려앉는 그 길에서 나는 천천히 제주와 동화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