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한 바와 같이 의약품은 기초연구와 임상연구를 병행하여 약효를 입증하였다. 그러면서 연구 결과에 입각한 학술적 마케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약효를 바탕으로 한 마케팅과 영업의 힘을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승부를 걸은 것이 주효하였다.
의약품 마케팅의 성공으로 제품들을 어느 정도 성공궤도에 진입시킨 후 P가 한숨을 돌리고 있던 무렵, 본사에서는 21세기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오너의 주도하에 종래의 비즈니스 콘텐츠를 다양화시키는 전략이었다. 건강한 사람의 건강을 유지하는 비즈니스로써의 영양음료사업에, 질병에 걸린 환자를 낫게 하는 의약품사업의 두 축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거기에 신 시장 진출을 위한 기능성 화장품사업과 의료기기사업이 추가된 형태로 변화를 꾀하고 있었다.
P는 종종 대형병원을 방문하면서 병원의 커다란 기능과 역할에는 진단과 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진단과 치료에 사용되는 상당 부분을 의약품과 더불어 의료기기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시 본사는 오리지널 치료의약품의 글로벌 전개만을 고집하고 있었기에 P 역시 묵묵히 그 길만 걷고 있었다.
의약품은 치료가 주목적이지만 의료기기는 진단과 치료의 두 영역에 다 사용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건강검진 시의 위내시경은 진단이 목적이지만, 소화기내과의사들은 같은 내시경 기기로 치료를 한다.
오너는 의료기기의 진단과 치료 역할에 주목하였고, 기존 사업분야에 이 영역을 추가하여 주력사업으로 키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치료약으로 성공한 케이스인 한국에서 먼저 의료기기사업이 성공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고자 한국에 의료사업부를 신설하였다.
P는 마케팅과 영업부서에서 6명을 차출하여 강하고 스마트한 새 조직을 구성하였다. 도입제품으로는 난치성질환에 사용하는 과립구흡착제거요법용 면역치료기, h. pylori 유무 진단기기 및 시약, 소변검사용 진단제품 등이 맡겨졌다. P는 조직을 갖추자마자 우선적으로 질환 공부부터 시작하였다.
1990년대 말 당시에는 Y2K가 큰 화두였다. 서기 2000년을 1900년으로 인식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오류가 빅 이슈였으며, 노스트라다무스의 세기말 대예언(지구 종말론)으로 세상이 뒤숭숭할 때였다. 이러한 소란스러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너는 일찍이 21세기 첨단의료의 혁신과 변화를 예상하고 대비하였다. 시스템과 조직 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는데, 이 파고에 맞춰 P는 또 한 번 변신을 해야 했다.
항상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던 P는 10여 년간 집중적으로 일했던 의약품 영역을 떠나서 의료기기 사업으로 몸을 옮기고 새로운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21세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P도 변신을 꾀한 것이다.
P는 입시지옥이었던 고교시절, 친구의 권유로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상기하면서, 진정한 자아의 삶에 대한 추구의 과정을 되새김하곤 했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 문장을 좋아했던 P에게 의료기기 사업은 새로운 도전이었고 또 하나의 세계가 펼쳐지는 무대였다.
P는 자신이 신중히 선택한 부서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미래를 꿈꾸며 살았다. 인터넷이나 IT라는 용어가 요즘 AI나 챗GPT만큼 큰 화두였다.
의료기기는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진단과 치료법에는 나름대로 유행이란 게 있었으니 그 흐름을 잘 파악해야만 했다. 다행히 부서원들은 젊고 열정이 넘쳤으며, 새로운 제품을 도입하는 것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바다 건너 오너는 나이가 60세를 넘기면서 한국사람 이상으로 조급해져 갔다. 무언지 모르지만 빨리 승부를 걸어보고 싶어 했다. 제품으로는 글로벌 블록버스터가 몇 개 필요했으며, 지역으로는 중국과 미국에서 인정받고 싶어 했다. 일본에서도 부동의 업계 1위를 달리고 있던 기업을 따라잡고 싶어 했다. 오너는 그의 야망을 실현하고자 세계적인 맥킨지컨설팅과 머리를 맞대고 몇 번이나 회의를 거듭하였다. 그 결과, 기존 조직을 과감히 개편하고 사업부 체제를 가동하였다. 이에 따라 지주회사를 설립하였고 IPO(주식 신규상장)를 정조준하였다.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여 건강한 소비자와 질병에 걸린 환자에게 건강이라는 희망을 선물하던 콘셉트는 변하지 않았다. 기존 사업들이 잘 되고 있었기에 따로 자금도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룹사를 글로벌 지위로 격상시키려면 뭔가 회심의 한방이 필요했다. 그것은 건곤일척의 승부수였다.
이 흐름 속에 성공적인 마케팅을 수행하던 한국의 자회사들은 아시아사업부의 핵심 전초기지로 활약하게 되었다. 본사의 노하우를 실행으로 옮겨 성공한 한국의 모델을 제3, 제4의 국가에서도 성취하고자 하였다. 아시아의 무게중심은 점차 중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의료기기 제품과 기능성화장품이 변방에서 중심 근처로 이동하여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P는 일본에 자주 출장을 다니면서 손수 의료기기의 조작법도 배워보았다. 관계자들이 출장 오면 공항부터 마중 나가 픽업하는 순간부터 기술적인 의문을 해소하려고 질문을 퍼부어가며 제품공부에 매달렸다.
의료기기는 의약품과 달리 기계공학적인 요소도 많았다. 원리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본사의 개발자를 귀찮게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어도 어려운 분야였다. 의약품 분야는 약대 출신이 주도하였다면 의료기기 분야는 공대 출신이 주류였다.
탐구가였던 P는 왜? 어째서? 가 해결이 안 되면 의문이 해소될 때까지 해법을 찾아 헤매었다. 알아야 면장도 해 먹는 법이었으니 원리를 깨우치는 것이 기본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의료기기를 들여와서 판매하려면 우선 한국에서 수입판매허가를 취득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P가 상대하는 고객들도 의약품을 연구하고 처방하는 의사에서, 의료기기를 취급하는 기사나 의공학자, 임상병리학자 등으로 넓혀졌다.
병원에서 사용되려면 약사심의위원회가 아니라 의료기기평가위원회를 통과해야만 했다. 제출서류도 전혀 달랐다.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허다했지만 재미있는 비즈니스였다.
의료기기라 할지라도 전문 질환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장치였다. P는 본인이 담당했던 의약품으로 이미 친숙해졌고 연구에 흥미를 가진 교수들을 중심으로 난치병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피부과, 류머티즘내과, 하부소화기내과 등은 새로운 개척분야였다.
면역질환을 치료하는 기기는 다양한 영역에 사용되었기에 처음 접하는 유명 교수들도 많았다. 면역질환 치료 의료기기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들과 유대관계를 가져가면서 제품의 특장점을 연구하는 모임을 활성화해야 했다.
이와는 달리 진단의료기기는 3개 대학병원을 임상연구시설로 선정하여 따로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프로토콜을 작성하여 조속히 허가임상시험을 시작하였다.
사람의 몸에 효과가 있는지, 정확히 진단을 하는 기기인지 알아보기 위한 연구를 실행하려면 샘플용 시약을 만들어야 했다. 공장에서 협조받을 내용도 많아서 차를 몰고 경기도의 제약공단을 방문했다. 본사 측과 한국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문제점이 드러나면 그 해결책을 찾아내느라 수없이 미팅을 거듭하였다.
오너의 말 한마디에 P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갔지만 거대한 조직의 현실은 생각만큼 기민하게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특히나 한국의 여러 연구시설에서 제기한 문제점을 본사에서 해결하기까지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한국과 일본, 병원과 기업의 가운데에 끼어서 힘든 날이 많아진 무렵이었다. 새로운 일을 수행한다는 자부심이 고단함을 잠재웠고, 성실하고 샤프한 부서원들 덕분에 웃으며 일할 수 있었다.
의약품과 의료기기는 분명 다른 영역이다. 그렇지만 의료에 공헌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있었기에 임하는 자세가 바뀌지는 않았다.
거대 제약그룹도 사업체이므로 이익을 목표로 삼지만, 항상 환자를 위한다는 대의명분과 기업이념은 잃지 않았다. P가 근무했던 그룹사는 다행히도 철학과 비전이 있었다. 오너는 탁월한 경영자였고, 한국의 부회장은 멘토를 자처했다. 아마도 그 두 사람이 없었다면 P는 진작에 이직을 했을 것이다.
오너는 아시아사업부의 사장단을 모아놓고 장차 의료기기도 그룹 비즈니스의 한 축을 담당할 거라고 독려하였다. 발표장에 P를 앞세워 본인의 대변인으로 활용하였다. 오너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고, P는 피아니스트가 되어 흑백 건반을 눌러가며 조화로운 화음을 내주었다.
그렇게 21세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