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미아 2장 2화
학회, 연구회, 임상시험, 심포지엄, 그리고...
PM(마케터)이었던 P는 N 과장과 함께 학술 마케팅의 첫걸음으로 담당제품의 질환 영역인 학회에서 위원직을 겸하고 있는 의대교수들 명단을 파악하였다. 이들을 한 명씩 설득하여 실제 환자에게 약을 써보고 효과를 판단하고자 임상연구회를 조직하였다. 병원에서 환자를 보는 임상교수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은 연구회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연구회 모임은 좀처럼 보기 힘든 조직이었다. 좌장과 간사가 있고 학술위원장이 있었다. 제품 효능 파악과 부작용 등 안전성 확보를 위한 소규모 학술모임이었다.
일선 병원에서 환자를 마주하며 치료를 위해 의약품을 처방하는 의사들에게 그것이 올바르게 사용되게 하려면, 적절한 약효 평가와 부작용까지 검토하는 임상연구를 실시하여, 환자에게 그 약물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봐야 했다. 그래서 직접 본인들 손으로 연구계획서(프로토콜)를 짜고 실제로 투약해 본 결과를 도출해서 입증해 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이건 제약업계에서 일하는 PM이면 누구나 만들어보고 싶은 모임이었지만 막상 현실화를 시키는 건 쉽지 않은 테마였다. 왜냐하면 회사의 예산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전사적으로 협력해줘야 하는 big project 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결과의 성패를 장담할 수 없으므로 대규모 투자에 선뜻 나서지도 못했다. 즉 아이디어가 있다 하더라도 PM이 혼자 나서서 될 일이 아니었다.
우선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의약품이 내포한 가치(약효, 환자 공헌도 등등)가, 유명 대학교수들에게 어필할만한 기초 데이터와 백 그라운드가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 본사 연구소와 제품책임자인 PMM(Product Marketing Manager)을 통해 전달받은 자료를 밤새워 번역해 가며 P 스스로 담당 제품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특정 종교의 열성 신자가 될 정도로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궁극적으로는 그 제품의 교주가 되어야 할 만큼 해당 질환과 처방약의 세계에서 자기가 담당한 의약품이 최고의 치료제라고 믿는 강한 신념이 있어야 타인에게 전파할 수가 있는 법이었다.
P는 그가 담당했던 의약품 연구에 임상시험뿐만 아니라 기초연구도 병행하고자 했다. 실제로 이 물질이 동물실험 같은 기초연구를 통해서도 효과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연구를 실행하기 위해 우리나라 의과대학의 약리학과 생화학 분야에서 연구 능력이 우수하고 학술적 업적이 높은 교수들을 찾아내어 기초연구회를 따로 조직하였다.
이것은 기초와 임상의 양면에서 본질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 입증된 결과를 도출해 내고, 그것을 전문 학회지에 게재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추진하기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기초연구는 5개 대학을 선정하여 5년간 연구를 지속하였고, 이후에는 1 시설로 좁혀서 10년간 더 연구를 계속하였다. 임상연구는 전국에서 8개 의과대학병원을 선정하여 추진하였다.
기초분야에서 약의 주성분이 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내고, 임상분야에서도 이 의약품을 환자에게 사용했을 때 해당질환의 치료 및 개선효과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내면, 기초와 임상에서 양수겸장의 결과를 도출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는 처방하는 전문의들을 설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리라 판단하였다.
우리나라 제약회사가 기초연구에도 공을 들여 연구를 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물론 의약품을 처음에 개발하는 과정에서 시험관 실험과 동물 실험을 통한 기초연구를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당국의 허가를 받기 위한 기본 데이터를 갖춰야 할 목적일 경우에 한정된다.
P가 담당했던 의약품은 사전에 1년간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허가를 위한 임상시험을 실시하여 제조판매허가를 취득하였다. 이것을 토대로 의료 현장에서 질환에 고통받는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의사들이 처방을 해주어야만 했다.
물론 이 처방을 위해서는 당연히 그 의약품에 대한 신뢰를 얻어야만 가능한 것이므로 반드시 처방할 근거가 필요했다.
이 근거(evidence)라고 하는 것은 과학적 배경을 가진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개발국인 일본의 제품책임자(PMM)와, 처음부터 연구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원들과 늘 긴밀히 논의해 가면서 방향성을 찾아갔다. 한국에서 반드시 이 제품을 성공시키기 위해, 또 브랜드로서의 가치를 입증받기 위해서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만 했다. 즉 기초연구와 임상연구를 동시에 시행하여 이 약이 진정한 효과가 있는 의약품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최초로 시행된 임상과 기초의 연계를 시도한 제품연구회를 발족함으로써 학계와 업계에서 많은 화제가 되었다. 당시로서는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이슈였지만 아무도 그 성공을 장담하지는 못했다.
기초연구에 참여한 약리학과 생화학 교수들은 매우 흥미를 갖고서, 도대체 이 약물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여러 첨단 기법의 실험을 통해 철저히 규명해 보기로 하였다.
1년에 세 번의 기초연구회를 개최하면서(연구계획 발표회, 중간검토회, 결과보고회), 매번 본사의 연구소장과 함께 실험 결과를 놓고 deep discussion을 벌였다. 10명 이하의 소규모 연구회였지만 아시아 최고 수준을 견지할 만큼 토론 내용의 수준이 높았다. 그들이 연구한 내용은 매년 5편씩 세계 최고 수준의 약리학과 생화학 저널지에 실렸고, 누계로는 수십 편에 달하였다. 보람찬 나날이었다.
임상연구에 있어서는 해당 질환 영역의 학술적 분야를 주도하고 있었던 S대병원을 중심으로, 약의 메커니즘에 관심이 높은 교수들을 선별하여, 연구회에서 수차례 검토회를 갖고 연구의 방향성을 협의했다. 그들은 약속한 프로토콜에 맞춰 연구에 임하였고, P는 날마다 모니터링하러 병원출장에 매달렸다. 2년에 걸친 연구 결과를 모아 통계분석을 마친 후 모든 결과를 정리한 논문을 학회지에 투고하게 되었다.
학회에서는 연구 내용이 새로운 시도이고, 신뢰할만한 내용이라고 판단하여 논문 심사 후 발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학회에서 발표된 이 논문은 수많은 전문의들에게 정확한 약의 효과를 입증하는 근거자료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이렇게 간단히 짧게 기술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 과업을 현장에서 수행하는 것은 상당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P는 이 시기를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된 시절이긴 했지만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한 10년이었다고 회고한다.
한편 본사의 오너는 일본의 관계자들을 많이 꾸짖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 PMM과 연구소 관계자들에게 한국의 성과를 들어가면서 질타하고 독려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스피드와 적극적이고 수준 높은 연구 열정이 빚어낸 결과물들이 모회사를 자극하기에 이르렀으니 관계자들은 당황하였고, 수시로 노하우를 물어왔다.
일본은 연구 주제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매우 신중하다. 연구의 진행 역시 돌다리도 두들겨본다는 자세로 몇 번이나 검증을 반복해보곤 한다. 연구 결과가 나와도 영문 논문으로 해외에 투고하기보다 국내학회지를 목표로 논문화를 추진하다 보니, 좀처럼 국제적으로 유명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에 비해 한국의 기초연구에 참여한 5개의 의과대학은 미국 유학파 중심이었다. 당연히 수준 높고 첨단적인 연구를 스피디하게 진행하였다. 물론 P의 헌신적인 노력이 뒷받침된 것은 당연하였다.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를 여러 명 배출할 만큼 기초연구의 실력은 가히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너무나 신중하고 꼼꼼한 나머지 쉽사리 단기간에 성과물을 내지 못하였다. 본사 담당자들은 일본의 현실에 답답해하였고, 누구보다 오너가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993년 4월은 P가 회사에 입사한 지 만 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어느 날 한국 지사장의 지시로 오사카에서 개최된 개발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전 세계를 진두지휘하는 오너를 중심으로 7명의 수뇌부들이 모여 한국에서 이 제품을 어떻게 개발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대책회의가 있었다.
P는 그의 멘토였던 부회장과 같이 오사카로 날아가서 발표를 하였다. 마침 회의 당일은 그의 아들이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P는 당시 오너로부터 "이 제품을 반드시 한국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미리 사전 조사하여 작성한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였다. 발표에 덧붙여 본인은 이 제품을 아들로 생각하며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기초와 임상 분야를 tie-up 한 연구를 실시하여 약효의 입증 방법을 규명하겠다는 계획은, 참석자들의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오너는 최종적으로 그렇게 시행해 나갈 것을 승인해 주었으며, 예산과 인력의 뒷받침을 약속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P는 같은 날 태어난 아들을 키우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온 정성을 제품에 쏟아부었다.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신념하에 큰 그림의 발족에 착수했다.
P가 이 제품을 한국에서 발매하게 된 것은 1993년 9월이었는데 그때 그가 생각했던 기초와 임상을 함께 묶은 연구회도 동시에 발족하였다. 제품의 출시를 선포하는 발매기념 심포지엄은 서울과 부산에서 개최하였다.
행사에 참석한 수백 명의 전문의들은 한국에서 기초와 임상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계획안과, 이미 일본에서 발매가 되어 사용되고 있었던 신제품의 임상경험 발표자료를 보면서, 많은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임상에서도 최초의 결과물이 논문으로 태어나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이 제품에 대한 효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P가 근무하던 회사의 우수 MR(의약정보전달자)들은 전국의 모든 종합병원을 방문하며 약이 처방되도록 병원에 들어가는 작업에 매진하였다.
나아가서 지방에도 각 지역별 연구회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병원자체로 임상시험을 실시하겠다는 연구계획안 제안도 많아졌다. 그러한 연구는 철저한 확인을 거치고 나서야 실행승인을 하였다.
발매 초기에는 연구계획안을 병원에 갖고 가서 사정사정하며 연구회 동참을 호소하였는데, 어느새 의사들의 제안을 받아 기업에서 승인을 해주게 되었다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었다.
연구결과를 모아서 수시로 서울과 지방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발표하도록 기획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마케터의 파워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프로그램을 짜는 기획안을 연구대표자나 발표자와 협의할 때는 연구자 측의 입장도 세워주고 회사도 홍보를 하는 윈윈(win win) 전략이 기본이었다.
영업부서는 행사가 끝나면 피드백을 수집해 줬고, P는 다음 행사에 반영해 가며 현장의 목소리에 응답하였다. 게다가 수시로 각 병원에서 설명회 요청이 빗발쳐서, 월간 일정을 조정하느라 애를 먹곤 했다.
제품의 처방을 위해서는 반드시 병원의 약사심의위원회를 통과시켜야 했다. P는 서울을 포함한 전국의 거점 대학병원에 반드시 이 제품이 들어가야만 그 지역의 주변 병원에도 보다 수월하게 심의위를 통과하여 의료현장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중점적으로 관리할 40개 대학병원을 목표로 삼고, 심의위에 추천해 줄 만한 연구회 멤버와 상의하며 완벽한 자료를 만드느라 불철주야로 뛰어다녔다. 심의위원회의 개최 시기를 파악해 가면서 일정에 맞춰 제출하여 각 병원의 제품 도입작업에 총력을 기울였다.
P는 PM으로서 이러한 빅 프로젝트의 사령탑 역할을 신바람 나게 수행하였다. 특히 영업부서와는 한 몸처럼 붙어 지냈다. 소위 마케팅과 영업의 완벽한 협업이었는데, 본사에서도 이러한 협력태세의 성공을 지원하러 고베(神戶) 우호지점까지 선정하여 응원과 지원을 이끌어내 주었다. 우호지점끼리 정기적으로 교환방문을 해가면서 양국의 상황을 서로 견줘가며 배우고 시너지를 창출하였다. 반드시 저녁에는 전통주와 양주를 꺼내어 화합의 장을 마련하는 등, 민간외교대사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P는 수시로 배달되는 일본의 학술지를 읽으며 일본에서 학회 및 연구회 동향 정보를 입수하였다. 앞서가는 일본의 흐름을 짚어보고, 양국 간 공통 관심사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당시 일본 측 학회임원들 이름과 연락처를 줄줄 꿰고 있었으며 어떤 분야에서 발표를 했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또 한국 학회에서 요청하는 국가 간 협력업무에 있어서 창구역할을 도맡아 학회 운영을 돕기도 하였다. 준 학회 회원의 위상을 인정받았다.
이런 정보와 연계성을 바탕으로 한국 학회의 임원들에게 줄곧 임상과 기초연구의 공통 관심사를 주제로 일본과 학술교류회를 갖자고 설득하였다. 그 노력의 결과가 결실을 맺어 양국의 질환과 병태생리, 임상약리학적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상호 학술교류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일(韓日) 심포지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양국 간 학술교류를 성사시키는 큰 무대의 장(場)을 제공하여 활발하게 서로의 학술적 관심사를 토론하는 한편, 제품의 메커니즘 규명에도 관심을 유도하면서 P가 구상한 대로 마케팅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양국의 학술교류회는 임상연구진들이 중심에 서있었지만 한국 측 기초분야 연구자들의 수준 높은 연구 발표회도 같이 곁들여졌기에 상당한 레벨의 심포지엄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훗날 P가 중국에 부임했을 때는 중국까지 포함한 한중일 학술연구교류회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하나의 제품이 씨가 되어 세 나라의 전문학술집담회 모임을 잉태한 모태가 된 것이다.
P가 제품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서 소중하게 여긴 것 중에 하나는 '제품설명회'였다. 주로 의사와 약사, 그리고 간호사까지 대상으로 한 설명회는 저녁식사를 겸해서 이루어졌는데, 장소는 병원 근처 식당이 대부분이었다. 갈빗집과 일식, 중식이 일반적이었다. 벽에 임시 스크린을 설치하고(하얀 대형 문종이나 헝겊을 테이프로 붙임) 코닥 환등기에 상황에 맞춰 편집한 슬라이드를 넣어서 발표하였다. 일본 연수에서의 경험과, 일찍이 20대 후반에 오너 앞에서도 발표했던 경험을 살려 자유자재로 편집하였고 알기 쉽게 발표하였다.
불 꺼진 식당, 찰칵거리는 환등기 소리, 슬라이드 페이지를 하나씩 넘겨가며 20분 정도 설명을 하고 나면 질문이 쏟아졌다. 의학용어가 틀렸다고 지적도 받았다. 물론 간결하고도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었다는 칭찬도 받았다. 잘못된 슬라이드 내용은 그 즉시 수정해서 재편집했다.
이런 설명회는 현장에서의 생생한 정보를 청취할 수 있는 상호 소통의 창구였다. 폭탄주까지 걸치게 되면 학연과 지연이 화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첫 만남에 바로 친해지기도 하였으며, 호형호제하기로 의기가 투합되면, 흔쾌히 처방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활달하고 붙임성 있는 PM은 어디서나 인기 만점이어서 족보에도 없는 형님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일본 연구소의 견학과 대학 간 연구 교류를 주선해 달라는 요청도 많았다. 의과대학마다 지역 또는 재단별로 학술발표회가 있었다. 여기에 일본을 가미하면 국제적 지위로 격상되니, P의 인맥으로 초청강연 연자를 요청하는 시설이 많았다. P는 상황에 적합한 연구자를 찾아주느라 늘 전화와 팩스를 끼고 살았다.
당시 일본에만 있는 시약이나 연구에 사용되는 재료를 구해달라는 요청도 많았다. 일본에만 특정된 인적 물적 자원을 요청받아 수시로 도쿄와 오사카, 시코쿠의 연구소를 드나들었다. 그 바람에 많은 인맥을 쌓게 되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아서, 본사뿐만 아니라 일본 각 지점에서 한국에 대한 요청도 쇄도하였다. 자기 관할 영역의 병원 의사나 의대 교수가 한국에 가고 싶어 하니 어느 세미나에서든 발표를 시켜달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아카데믹한 교류회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모든 안건들을 척척 해결해 가며 눈덩이 구르듯 신뢰를 쌓아 나갔다. 이것은 일본어가 자유로운 장점을 살린 것과 P의 친화력에 동화된 일본 인맥이 나서서 도와준 덕택이기도 했다.
설명회 자리는 여러모로 풍성한 학술적 욕망의 분출구였음과 동시에 하드웨어적인 요청과 그 해결책까지 찾아내야 하는 탈출구였다. 때로는 일탈도 불사해야만 했다. 최신곡을 부르며 노래방을 나서면 어느덧 12시가 넘어갔고, 고객들이 다 귀가하고 나면 남은 직원끼리 수고했다며 입가심 맥주를 들이켰다. 독박육아에 지쳐서 허구한 날 새벽에 귀가하는 남편을 보지도 못한 채 잠든 아내 곁을 살금살금 걸어 들어가 간신히 샤워하고 잠들기 일쑤였다.
대리기사도 없던 시절, 총알택시와 목숨을 건 음주운전도 다반사였다. 당시 P의 집은 신도시였는데 전철역이 없었다. 노선버스는 일찍 끊어지니 음주운전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5천 원짜리 총알택시 기사와 흥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P는 음주단속을 피해 가로등도 없는 저수지 옆길을 5단 기어로 변속하면서 차를 몰고 귀가하였다. 아침에 보니 운전석 뒷문 쪽에 참외씨와 수박씨가 말라붙어 있었다. 토해가면서 그 어두운 저수지 길을 변속해 가며 운전했던 것이다.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당시 음주운전은 단속을 피해 성공하면 희열을 느끼는 짜릿함이 있긴 했다. 하지만 한 겨울에 속옷이 죄다 젖을 정도로 엄청난 긴장감과 두려움이 느껴지는 위법행위였다.
어느 늦은 가을밤, 평소부터 벼르고 있다가 귀가하는 음주차량을 베란다에서 목격한 그의 아내는 시아버지에게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 상황을 알렸다. 놀란 시아버지는 준엄하게 아들을 꾸짖었다.
"아들아, 너는 이제 네 한 몸이 아니지 않으냐? 제발 좀 정신을 차리거라!".
아버지의 일갈에 P는 당장 음주운전을 끊었다.
거의 날마다 음주 귀가를 했는데, 미안한 맘에 안아본 딸이 낯선 아저씨 품이라고 느꼈는지 "으앙~" 하고 울어재끼며 아빠를 밀쳐내기까지 하였다.
당시 베이비 부머들은, 달을 보며 퇴근하고 샛별을 보면서 출근하는 강철 체력의 소유자들이었다. 마치 특전사 부대원들 같았다.
해병대 출신 선배인 K가 이끌었던 영업부서는 장교출신의 영업소장이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바짝 군기가 들어 있었다. 낮에는 정말 열심히 일했지만 밤이면 흥겹게 스트레스를 풀어가며 젊음을 발산하던 나날이었다.
보람찬 하루를 강남역에서 시작하여 강남역에서 마무리한 30대 직장인들은 업무상 한잔 하고, 스트레스 풀러 마셔댔다.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에서 신입사원 환영회와 송별회를 반복해 가며 해장국으로 속을 달래는 하루를 시작하기 일쑤였다.
P는 사원들과 함께 정을 나누며 일했는데, 특히나 영업이 도와주지 않는 마케팅은 존재할 수 없다는 진리를 곱씹으며 영업부와는 늘 붙어서 일했다. 당시 회사에서 만난 영업부 동료들과는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친교관계를 맺고 있다. 흔히 회사에서 만난 인연은 퇴사하면 끝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기서 만큼은 통용되지 않는다. 정말 끈끈한 동지애로 뭉쳤다.
봄과 가을의 학회기간에는 마케팅 부원을 이끌고 영업부 직원들과 동반하여 제품홍보관으로 마련된 부스(전시관)를 마케팅의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전시관에 방문한 전문의들을 맞이해 가며 수많은 정보교환과 협력 방안을 상의하였다.
어느 날 경쟁사 부스를 가봤더니 P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팸플릿을 그대로 모방한 자료가 버젓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팸플릿에는 저작권이 없어서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P가 그것을 지적하였더니 경쟁사의 담당 PM은 학술부 직원이 만든 자료라서 모른다며 시치미를 떼었다. P와 영업부 동료들이 거세게 항의하였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상도의(商道義)도 없었던 경우였지만, 그만큼 P의 전략과 전술을 벤치마킹하는 업체가 늘어난 방증이었다.
각설하고, P가 주도한 본사 연구소 견학은 또 다른 형태의 의미 있는 교류의 기회를 제공했다. 의사들에게 연구 테마를 설명하고 회사 시설과 문화를 소개하는 연수를 마치고 나면, 저녁에는 일본 직원들도 포함시켜 일본술과 한국식 폭탄주로 술실력을 겨루며 양국의 문화교류에 앞장섰다.
P는 해외출장 시에 반드시 후배 PM이나 영업부 직원들을 동행시켰다. 그가 일하는 법을 후배들에게 전수해 가며 해외에서도 끈끈한 동료애를 과시해 가며 조화로운 협업을 이루어냈다. 그 당시는 어떤 일이든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한번 맺은 인연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믿음이 강했기에 비록 신생조직이었지만 든든한 무적함대를 방불케 하였다. P와 동료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회사를 자신들의 손으로 키워나간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당시 본사 연구소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유명 제약사들의 연구원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이들이 연구하고 배운 것들이 밑바탕이 되어 우리나라에도 신약개발의 기운이 태동한 원동력이 되었다. 오너가 강력히 드라이브를 건 세계화 정책과, 활발하게 전개된 한일 간 교류에 힘입어 심리적으로는 한국의 대형 제약사를 능가하는 글로벌 기업에 근무하고 있다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혔다. 이래저래 국내외의 의료발전에 공헌하며 살았던 P의 30대였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매출은 비약적으로 늘어만 갔다. 발매 7년 만에 100억 원의 순매출을 올리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진출한 질환의 영역에 있어서 사상 최초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일한 적응증을 갖고 처방되는 동종동효의약품이 수십 종에 달했지만 최단시간에 100억 원이라는 처방액을 기록하기는 쉽지 않았다. 덕분에 P는 한국의 대형제약사나 유럽의 글로벌 제약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자신을 키워주고 기회를 제공해 준 모회사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정중히 거절하였다.
당시 과장이었던 P를 부장급으로 승진시켜 주고 연봉을 30% 이상 올려주면서 마케팅 팀을 맡기겠다는 파격적인 제의도 있었지만 전혀 꿈쩍하지 않았다. 과연 이 달콤하고 먹음직스러운 유혹을 거절한 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일이었지만, 적어도 P의 존재감이 소문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의사들의 입을 통해 경쟁사에 흘러나가기도 하였고, 메디컬 저널지의 기자가 접촉을 해 오면서 전직을 유혹하기도 하였다. 헤드헌터가 전화를 걸어오거나 이메일이 오기도 했다. 어차피 국내 회사는 마음에 없었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미국이나 유럽계 회사로 옮겼으면 P의 글로벌 무대 활동 영역이 아시아에서 벗어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바삐 날아다녔던 P에게 그런 것을 고민할 여유는 아예 없었다.
심지어 P는 마케팅 전문 지식에 배고파서 MBA 과정에 입문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일본인 사장은 회사를 택하던지 공부를 택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냉정히 말하여, 공부의 꿈을 접은 적도 있었다.
P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골프를 배워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주말까지 온종일 시간을 허비하며 골프접대를 해야 한다는 그 행위가 썩 맘에 들지 않았다. 평일 낮에는 일로 바쁘고, 밤에는 전국을 무대로 설명회 하러 돌아다니던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래도 주말만큼은 가정을 소중히 지키고자 했던 P의 눈에, 주말 하루를 온전히 허비해야 하는 골프는 상당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였다.
훗날 P가 담당했던 의약품은 특허가 만료되자 수많은 대형 제약사들이 복제품을 허가받아 판매하게 되었다. 오리지널 의약품은 특허가 만료되면 얼마든지 복제약을 허가받을 수 있다. 지금은 백 개가 훨씬 넘는 복제약이 등록되어 있고 엄청난 수량이 처방되고 있다.
P가 맡았던 제품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는 모든 전문의약품 중에서 단일 성분으로 처방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약방의 감초처럼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제품이 된 것이다. P 자신도 컨디션이 안 좋아 병원에 가면 이 제품을 처방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실소를 머금곤 하였다.
제품이 발매되고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P가 전망하기에 이 의약품은 앞으로도 수십 년은 더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해당 질환에서는 마치 아스피린과 같은 대명사가 될 것이다.
여기서 P가 조직했던 임상연구회와 기초 연구회가 한 번 더 도약을 하여 학회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일부 밝혀둔다.
기초연구회를 리드해 갔던 S대의 C교수는 산소와 DNA 손상 영역에서 태두(泰斗)로 일컬어지는 학자였는데, 그는 P의 소개로 접하게 된 의약품의 성분에 흥미를 느껴서 연구에 참여하게 된다. C교수는 이것을 발판으로 삼아 연구회의 몸집을 불려 기초의학과 임상, 그리고 자연과학분야까지 총망라된 학회를 만들면 어떨까라는 발상을 하기에 이른다. 여러 번 P와 교감을 갖고 대화하던 C교수는, 제품의 성분이 갖고 있는 특이한 약리작용으로 인식한 활성산소의 역할과 함께, 이로 인해 유발되는 여러 질환과 그 치료에 정통한 학자들을 한데 모아 학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의약학계를 넘어서 기초 과학분야까지 망라하여 활발하게 학술적 교류가 이루어진 시금석이 되었다. 의약학과 자연과학에서 하나의 테마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벽을 뛰어넘어 전문영역을 서로 교류하는 모임이 이루어졌다. 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역사적 성과물이었다.
단순히 의약학의 기초연구자와 임상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과학분야(생리, 생물, 생화학, 유전공학) 학자들도 다 같이 어우러져 과학적 작용과 현상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질병과 유전자, 노화에 있어서 규명을 할 수 있는지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만남의 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흔하게 접하는 항산화작용과 노화, 그리고 질병과의 연관성을 탐색하는 연구가 이때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작은 하나의 씨앗이 나중에는 거대한 나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의약품을 한국에 도입하여 제품을 성공시키기 위해 만든 작은 연구회의 발족이, 전문가들의 집단 토론장인 학회로까지 승화하게 된 사례이다.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P는 그 산파역의 중심에 서있었던 것이다.
[작은 성공부터 시작하라. 성공에 익숙해지면 무슨 목표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것은 인간끼리의 관계정립에 있어서 바이블로 일컬어지는 데일 카네기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P가 다녔던 조직에서는 유난히도 small success story(작은 성공 사례)의 발굴과 storytelling(제품에 에피소드를 가미한 이야기)을 강조하였다. 작은 성공 스토리가 큰 성공을 창출하는 모델케이스가 되므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하나라도 성공을 경험해 보면 나중에 더 큰 성공신화를 쓸 수 있다는 실증적이고 고증학적인 교훈이었다.
100mg 같은 초미량의 성분으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의약품이다. 이화학적 소산물인 약의 효과를 입증하는 딱딱한 이야기보다, 제품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고객들도 쉽게 수긍하고 훨씬 다가서기 편할 것이다. 이것은 발상의 전환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업문화는 원래부터 이야기꾼이었던 P와 너무나 궁합이 잘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