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가 일본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 꼼꼼하게 일을 하였고 정확성을 기하였다. 만약 한국 사람이 일본의 조직에 들어가서 일을 해보면 한 달도 안 되어 질식감을 느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촘촘하며 짜임새 있고 독하게 일을 한다.
일반적인 일본 기업의 업무 강도를 한국의 삼성전자 수준으로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국 사람들은 약간 헐렁한 바지를 입어야 편하듯 여유 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반면, 일본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만큼은 너무나 빡빡하고 철저하게 일을 하는 민족성을 갖고 있다.
공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따져보자. 우리가 공부라고 쓰는 한자는 工夫인데 일본에서 이 한자의 뜻은 '여러 가지로 고민하며 깊이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반면 일본에서 공부라고 하면 일어로 벵쿄, 한자로는 勉强이라고 쓰는데, 면강은 우리 뜻으로 '억지로 일을 하거나 시킨다'는 뜻이다. 왜 일본에서는 공부하는 것이 스스로 하기보다는 강요된, 마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의미가 되었을까? 그만큼 공부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싫어하는 힘든 과정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일본인들은 지독하게 공부하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이 있어서, 같이 일하다 보면 질려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국민성일수도 있다.
P 또한 일본 사람들이 집착하는 공부의 정도에 비해서 그들보다 더 많이 공부했다고 자부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말하는 공부라고 하는 것은 백과사전 하나 정도를 다 이해하고 거기에서 충분히 지식을 얻었을 때 '나는 공부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들어 따라가기 힘들었다. 아무리 한 분야의 전문 영역만 다룬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박사를 능가할 수준만큼 공부하지 않으면 '공부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식의 양이나 知力도 차이가 느껴졌다. 한국에서 전문 영역을 담당하는 마케터의 제품지식을 일본에서는 일반 영업사원들도 습득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공부를 시켰고, 거기서 버텨내야 살아남았다.
P가 가끔 접해본 일본 소설, 특히 히가시노 게이고(전기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 출신 소설가)의 추리소설을 보게 되면 그가 얼마나 넓고 깊게 기초 조사를 하고, 자신이 공부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촘촘히 글을 쓰는지 알 수 있다. 글의 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전문적이어서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P는 남들보다 쉽게 일어를 깨우치긴 했지만 그나마 공부에 투자한 '절대 시간의 양'이 있었기에 연수원에서 버텨냈을 것이다. 언어도 공부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고,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 모르는 것이 나오는 세계였다. 그래도 어순이 비슷하고 한자가 바탕인 일어인지라 영어보다는 쉽게 이해가 되었지만 말이다.
P는 비즈니스맨이 어학실력을 갖춰야 조직에서 버틸 수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목표를 '능숙한 비즈니스 일본어 구사'로 규정짓고 맘 편하게 떠들고 대화했다.
P가 일어를 공부하고 영업이 무엇인지 배우면서 한국과 많이 다른 그들만의 조직문화를 몸으로 배워 온 것은 장차 그에게 있어서 큰 자산이 되었다. 이 자산을 활용하여 한국에서 어떻게 영업마케팅, 또는 제약기업의 문화를 개선할 수 있을까? 과연 이 신생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앞날에 대한 숱한 고민과 숙제를 한꺼번에 떠안고 귀국을 하였다. P는 연수를 마친 홀가분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앞날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안고 출근하였다.
한국은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나라 전체에 활기가 넘쳤고 에너지가 느껴졌다. 일본은 벌써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나라조차도 노쇠해 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한국은 훨씬 젊은 나라였다. 마이카(my car) 붐이 막 일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이었다.
P가 귀국하자마자 개최된 환영 회식 자리에서 일본인 지사장은, 모처럼 선진적인 기업 문화를 익혀 왔으니 이것을 직접 영업에 투영하기보다는 차원이 다른 마케팅이라는 분야에서 회사에 공헌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P는 마케팅이라는 것을 배워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부임한 과장 N이 있었는데, 그 역시 영업부 출신으로 마케팅을 한국에 전수하러 왔었다. P는 N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한국에서 응용할 수 있는 마케팅이 무엇인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간단히 말하면,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일하는 영업방식 말고 뭔가 과학적인 활동은 없을까?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한 의약품의 정확한 정보를 의료인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면서 제품의 가치를 높이자. 궁극적으로 환자에게 공헌할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마케팅 기법을 현실에 맞게 활용하자는 이야기로 결론이 집약되었다.
P는 일본에 가기 전 반년 정도 파트너사 종병 영업부 생활이 전부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영업 경험을 더 쌓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 경영진에서는 귀국하자마자 바로 마케팅 PM이라는 직책을 부여하였다. PM은 Product Manager의 약자로써, 한 제품의 도입부터 발전, 성공, 유지 등 라이프 사이클 전반에 걸쳐서 책임지고 일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직책이었다. 즉 제품의 사장과 같은 역할이었다.
그것은 곧 담당 제품에 대해 권한을 부여받은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제품을 키워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예산이 뒤따라야 되고, 그 예산을 확보하려면 그에 걸맞은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경영자의 승인을 받아야만 살행에 옮길 수 있었다.
P는 당시 일본 후지쯔사의 오아시스 워드프로세서를 활용하여 마케팅 기획 작업에 돌입하였다. 이 워드프로세서는 나중에 노트북을 지급받았을 즈음 용도폐기 되었다. 컴퓨터 활용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기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케팅 작업에 있어서 훌륭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상부에 대한 발표 자료는 한글이나 일본어, 때로는 영어로 작성이 되어야 했다. 언어적인 기초 없이 마케팅 기획을 하기는 어려웠다.
P는 시간 나는 대로 서점에 가서 마케팅에 관련된 책을 사서 읽어보고 과연 어떻게 한국에서 마케팅을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였다. 당시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소비자 제품 마케팅론 책자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의 제약 산업에 적합한 마케팅 책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당시 알려진 마케터들 중에는 소비자용품으로 유명한 P&G 출신이 많았다.
한국에서 제약마케팅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미국과 유럽계의 합작회사, 즉 글로벌 제약사에서 마케팅을 경험했던 마케터(PM) 출신이 중심이 되어 워크숍이나 세미나 모임에서 자신의 경험을 피력하는 것이 겨우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전부였다.
현황 파악과 정보에 목이 말랐던 P는 회사에 요청하여 전문 마케팅 기관에서 유료로 회원을 모집하여 마케팅 기법을 전수해 주는 일주일 과정의 마케팅 아카데미에 입문하였다. 마침 그 과정에는 의사 또는 약사 출신으로 유럽이나 미국계 대형 제약사에서 성공적인 마케팅을 전개한 사람들의 강좌가 있었기에 주의 깊게 들어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해외 본사에서 배워온 마케팅 기법을 바탕으로 한 노하우에 한국에서의 경험을 덧입힌 내용을 강의하였다. 바이엘, 글락소, 얀센, 화이자 등, 세계를 이끄는 출신들이 인기강사로 나섰다.
그들이 성공사례로 발표하였던 제품들은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처방되고 있는 블록버스터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관련 정보는 매우 풍부하였다. 의사들의 임상시험 보고서와 발표된 논문도 많았기에, 그것을 마케팅 현장에서 활용하기는 수월해 보였다.
반면에 막 한국에 진출한 P의 회사는 일본에서 개발에 성공한 신약이 몇 개 있었다. 그것들은 일본에서조차 마케팅 성공 사례의 경험축적량이 별로 없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에서 최초로 마케팅을 시도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야만 하는 모델들이었다. 거의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해야만 했다.
일본에서 1~2년 전에 발매한 신제품들이었다. 일본시장에 그 제품을 어떻게 도입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본사 PM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여러 번 일본 출장을 통해서 회의를 거듭하고, 어떤 식으로 그 약이 론칭되었으며 어떻게 의사들에게 제품을 홍보하고 있고, 환자들에게 유효 적절히 쓰이게끔 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은 일본과 상황이 많이 달랐다.
첫 번째로 대부분의 의사들은 일본 의약품에 대한 거부감을 표명하였다. 하고많은 약 중에서 하필 일본 약에 내가 관심을 가져야만 되느냐는 질문을 줄곧 받아왔다.
두 번째로 이 약에 대한 검증이 한국 내에서 제대로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물론 일본에서의 연구 데이터는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데이터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기에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세 번째는 P와 고객들이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왜 알만한 대학을 졸업하고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본 회사에 들어갔느냐, 더구나 일본 의약품을 홍보하려고 하느냐는 뜻밖의 질타도 받아야만 했다.
과학적인 원리에 대한 질문도 있었지만 국가 간의 감정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질문도 많았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 나가느냐 하는 것에 대한 자체정립이 필요했다. 마케터가 되기 이전에 한일(韓日) 간의 사이에 끼인 입장에 처한 본인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날 P는 강남역 사거리를 지나다 일본에서도 많이 마셔봤던 본사의 음료가 이미 한국에서도 출시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도 한국에서 대중적인 건강음료로 자리를 잡은 인기제품이 되어 있다.
창업 3세였던 오너는 아침에 일어나서 하늘이 맑거나 더우면, '오늘은 음료수가 많이 팔리겠군, 그러면 돈을 많이 벌 거야, 돈을 벌면 그것을 신약개발에 투자해야지!'라는 말을 즐겨했다고 한다.
음료 비즈니스는 물장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번 시판해서 날씨만 잘 활용하면 많이 팔리는 것이었다. TV나 라디오, 신문 등 매체를 활용하여 소비자에게 직접적인 광고를 통한 인지작업 마케팅이 주된 활동이었다.
그에 비해 전문 질환에 쓰이는 의약품은 소비자제품이나 일반의약품과 달리 많은 규제를 받았다. TV 광고나 미디어 매체를 활용한 홍보를 할 수가 없었다. 정확하고 과학적인 에비던스(evidence)에 근거해, 전문의사들에게 홍보를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쨌든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음료와 전문의를 대상으로 하는 의약품은 마케팅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음료의 한국 합작회사는 제품명, 즉 브랜드로만 광고를 할 뿐 제조사나 판매사 이름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굳이 일본 도입 제품이라는 것을 알릴 필요가 없고, 판매사보다는 브랜드 명을 인식시키는 방법이었다.
P는 여기에 착안하여 브랜드로 승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제품이 경쟁품과 다른 차별화 포인트가 무엇인지 그 개념을 간단히 한 줄로 요약한 캐치프레이즈를 만들고, 영업사원들이 암기하기 좋게 3분 설명법을 작성하여 현장에 전파하였다. 제품의 개발사 이름을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학계에서 명망 높은 의과대학 교수들을 선별하여 전국 단위의 임상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연구 내용을 정하는 프로토콜(protocol) 심의를 하고, 결정된 연구계획서를 바탕으로 각 대학병원 임상심의위원회(IRB)에 올려서 1~2년 정도의 기간에 다시설 비교임상시험을 실시하였다. 이것으로 학술적 마케팅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전국의 임상시설에서 프로토콜 대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매주 모니터링 하러 출장을 다니고, 일본에 가서는 회의와 검토를 거듭하며 방향성을 바로잡아 나아갔다. 한국적 상황에 맞는 EBM(Evidence Based Medicine)의 개념을 확립해야만 했다.
임상연구 결과를 토대로 논문을 작성하면 그것을 학회에서 발표하고, 그 발표 내용을 토대로 대규모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KOL(Key Opinion Leader) 교수들이 일반 전문의들에게 임상경험을 소개하도록 기획하였다.
여기에는 숙련된 영업사원들과의 협력이 필수였다. P는 늘 유능한 영업부원과 동반외근을 나가면서 현장의 의견을 청취했다. 일선 전문의들이 느끼는 제품에 대한 반응은 무엇인지 귀담아듣고 대응책을 상사들과 협의해 나갔다.
오전에는 내근하면서 회의와 자료준비에 바빴다. 점심시간에 처음으로 화장실에 갈 정도로 빠듯한 나날이었다. 오후에 영업부원과 함께 두세 군데 병원방문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저녁에는 제품설명회를 다니며 접대를 해야 했다. 때로는 영업부원들과 어울려 회식을 하면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어나갔고 3차까지 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영업부 조직은 엄격하였지만 사람 좋은 선배 K가 주도를 하였다. 조직적이고 긴밀하게 움직인 그들과는 평생지기가 되어 지금도 어울려 한잔씩 하는 사이가 되었다.
1차 고깃집, 2차 생맥주, 3차 포장마차... 아마도 그 무렵 베이비부머 세대의 산업역군들은 거의 비슷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여러 목적으로 본사에서 출장 나온 임직원들이 많았다. 그들과의 동행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P가 앞장서야 했다. 통역과 안내를 해주어야 했다. 주말에는 제품 관련 학회 전시회와 일본 출장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결혼도 했으며 바라던 큰아들도 태어났다.
마케팅에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더 기술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