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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Jan 21. 2024

강남역 미아 1장 4화

해외연수-1

   P에게는 공채 입사 선배가 1명 있었다. P는 그 선배를 대학캠퍼스에서 만나 선후배 사이의 돈독한 의리를 이어오고 있었다. 선배 K는 경상도 사나이에 해병대 출신으로 건장한 체격에 미남이었고, 명문대를 졸업한 탁월한 리더였다. 늘 무리를 이끌고 솔선수범하는 스타일이어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K를 P가 입사한 회사에서 조우했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K는 변함없이 일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K가 1년간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2개월 후, P에게도 해외 연수의 기회가 주어졌다. K가 먼저 겪은 경험담은 시험의 족보와 같은 보물 정보였다.


   연수 출발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어느 날 K는 카세트테이프를 하나 P에게 건네주었다. 일어로 된 노래와 방송 대사가 담겨있었다. P는 처음 듣는 일본 원어민 목소리와 노래(J POP)가 너무나 신기해서, 거기에 푹 빠져 지냈다. 출근하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일본 문화에 접한 첫 경험이었는데, 늘 새로운 문물에 호기심이 많았던 P에게 그것은 신천지의 개벽과도 같았다.


   고교시절 운동회나 소풍을 가다 친구들끼리 잡담을 나누다 보면 왜색 짙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고이비토요(人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ブルーライト浜) 같은 노래는 따라 부르기가 쉬워서 숨어 부르기도 했고 여럿이 떼창을 하기도 하였다. 이미 일본 문화가 음성적으로 학원가에 침투한 1970년대였다.


   1980년대 군사정권 대학 시절에는 일본 노래를 들어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런 K가 준 테이프를 통해서 들어본 노래는 정확히 의미를 몰랐지만 귀에 쏙 들어왔다. 그 시절 일본에서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가희(歌姬)로 활약했던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奈)의 노래는 P의 혼을 쏙 빼놓았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일본의 청순가련형 여가수로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와 쌍벽을 이루던 나카모리 아키나의 노래. 특유의 음을 떨리게 부르는 비브라토 창법과 리듬이 매혹적이어서 저절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날마다 앞뒷면을 두 번씩 듣다 보니 노래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조금씩 귀에 익숙해져 갔다.


   종로의 일본어학원에 다닐 때에 선생님이 쉬운 일본 노래를 가사와 함께 가르쳐주긴 했었다. 그저 흥얼거리는 정도였고 그렇다고 크게 흥이 나는 멜로디는 아니었다. 그래도 음악을 좋아하는 P가 언어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은 역시 노래였다.


   1987년 가을, 처음 해외로 떠나는 김포공항에는 고향에서 P의 아버지와 동생이 배웅을 나왔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부쩍 늘어난 주름살과 듬성듬성한 머리가 눈에 밟혔다.


   이태원에서 1년 살이 옷가지와 신발 두 켤레를 사서 트렁크 하나에 꽉꽉 쟁여 넣고 짐으로 부쳤다. P는 설렘에 연신 비행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에 떠있는 자신을 신기해했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연수 전반부는 일본어와 문화를 배우는 어학연수 과정이었고, 후반부는 그룹사 전체 신입사원 공동연수와, 본사의 제약기업 기초연수가 예정되어 있었다.


   오사카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고 로비에 나서자 눈에는 온통 일본어만 보이고 귀에는 '~~~ 마스, ~~~ 데스'만 들렸다. 다행히 친숙한 한자가 많이 보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P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한자를 배워왔고 고교나 대학 입시 대비 수업시간에도 한자를 많이 접한 세대였다. 비슷한 모습의 일본 풍경에 친근감을 느끼며 연신 로비를 두리번거렸다.


   당시 한국에 막 부임했던 일본인 과장의 인솔로 서울을 떠난 일행은, 오사카 이타미 공항에 마중 나온 직원들을 따라 호텔에 도착하였다. 본사 외국부 임원을 포함한 나이 든 중장년 직원들이 90도로 인사하며 맞이해 주었다. 어설프게 이쪽도 허리를 낮춰 인사하였다.

첫날 저녁식사에서는, 건배 선창에 따라 무조건 잔을 비워야 하는 한국식 습관에 맞춰 잔을 계속 비워나갔. 그러다 반잔 정도씩만 마시는 일본 직원들 앞에서 만취한 모습을 보이고야 말았다. 낮은 도수의 일본 사케도 연거푸 마시면 취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며 긴장된 하루였다.


   P의 일행은 다음날 아침 일찍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이동하여 6개월 일정으로 사원 기숙사에 여장을 풀었다. 노년의 기숙사 관리인 부부가 반갑게 맞이해 줬고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에 이어 숙소는 303호 다다미방으로 배정되었다.


   1층에는 식당과 함께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퇴근 후 일본인들은 매일매일 욕탕에 들어가거나 몸을 씻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식당 냉장고에는 한국인 연수생들을 위해서 기무치(김치의 일본 버전)가 준비되어 있었다.


   다음날, 도쿄 시내의 간다(神田)어학원에 등록하고 반편성 테스트를 받았다. 다행히 한국에서 석 달 공부한 덕분에 중급 중에서 가장 초급반인 C1 클래스에 배정되었다. 이 어학원은 도쿄 시내의 중심가에 있었는데, 1천 명 정도의 일본인 학생들은 단과대학 코스로 영어교육 과정을 배우고 있었다. 200 명 정도의 외국인 학생들은 일본어 코스를 이수하게끔 편성된 곳으로, 역사와 유서가 깊은 사립 어학원이었다.


   P가 배정받은 반의 담임교사는, 영국 멕시코 등지에서 온 학생들과 한국, 중국, 대만, 홍콩 등에서 온 아시아권 학생들을 통솔하느라 여러모로 힘들었을 것이다. 아직 일본어가 미숙한 시기였으니 손짓과 필담은 필수였고 눈치를 보아가며 판단했다.


   당시 미수교 공산국가인 중국(당시에는 중공) 학생들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 일어로 소통하며 친해지기도 하였다. 고급 공산당원의 자제들이 많았는데 한국과 같은 세 글자의 한자 이름에 친근감을 표해주었다. 필담이 가능한 이들과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하자 우황청심환을 파는 상술도 발휘했다.


   20명 정도의 같은 반 학생들끼리는 통성명을 하자마자 서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교사들과도 함께 어울렸고, 한국 학생끼리는 신주쿠로 볼링을 치러 가거나 한식을 같이 먹으면서 정을 쌓아 나갔다.


   수업 중에 처음 겪은 지진의 공포는 상당하였으나, 침착하고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는 교사의 지시에 따라 점점 공포에서 벗어나갔다.


   어학원에서는 서로 이름을 부를 때 '~상'이라고 호칭하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른다고 하던가, 어느덧 'P상'이라는 표현에 익숙해졌다.

교사들은 외국 학생들에게 일일이 '~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일반화시켰고 학생들도 서로 불러주면서 곧 생활화되었다. 예컨대 서양인들에게도 '피터 상, 마리아 상' 이렇게 불렀으며, 한국인 '김철수'라고 하면 공식적으로는 '김 상', 친근감을 표현하려면 '철수 상'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문화의 일부분이었고 모든 사람은 '~상' 앞에서 평등하였다.


   아무리 교사라도 비용부담은 철저히 와리캉(1/N 더치페이)으로 10엔 미만까지 나누었다. 한국 습관으로 학생들이 돈을 내어 커피를 사준다고 해도 일본인들은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였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1엔짜리 동전이 사용되고 있으니 작은 것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나라였다. 문화의 차이를 실감하는 나날이었다.


   회사에서 보내준 연수라고 해도 당시 한국의 6배 환율인 도쿄 물가는 서울보다 훨씬 비쌌다. 버블경제 시절이었고 일본이 세계 1위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보도를 심심찮게 접하는 시기였다.


   잃어버린 30년이라든가 작금의 엔저현상은 당시와는 상당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요즘은 일본 물가가 더 싸고 관광지에는 한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37년 전 일본 본사 대졸 신입사원 초봉이 165,000엔이었는데 지금은 200,000엔이니 이 기간 동안 겨우 21% 오른 셈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300,000원이었던 대졸 초임은 현재 2,000,000원을 상회하고 있다. 같은 기간에 700%는 오른 셈이니 얼마나 일본이 저성장 했는지 느낄 수 있다(기본급 기준).


   어학원에서는 해마다 가을에 스피치 콘테스트 대회를 개최하였다. 3분 스피치 시간에 자유주제로 발표하는 대회였다. C1 반에서도 참석해 보자는 담임교사의 권유에 못 이겨, P는 '내가 본 일본'이라는 주제로 작문을 해서 제출했다. 심사 결과, 의외로 혼자서만 선발되어 예선에 출전하게 되었다. 일본에 건너간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원고 내용은, 선진국인 일본이 방심하면 한국이 곧 따라잡을 것이며, 일본인의 겉과 속이 다른 점, 언행불일치를 지적하는 글이었다. 담임교사는 외국인이 일본을 지적하는 내용은 일본에서 환영받는 주제라며 선뜻 대회출전의 기회를 부여하며 독려해 줬다.


   서양인들이 다수 참가했고 상급반의 한국인도 있었는데, 뜻밖에도 예선을 순조롭게 통과했다. P는 본선에 진출하는 학생들 중에서 가장 낮은 클래스였음에도, 스피치의 내용이 좋았는지 발표력을 인정받았는지, 그랑프리(최우수상)의 영광을 안게 된다. 대회 최고의 스타가 된 것이다.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P는 눈물겨운 노력을 하였는데, 몇 가지 그의 기억을 더듬어 회고해보고자 한다. 그 기억들은 그가 일본어에 입문하여 점점 능숙해져 가는 과정들의 편린이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면 하나의 문화가 열리고, 대화로 마음이 서로 통하면 누구나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이었다. 언어 습득은 사회생활의 기본이자 연수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였다.


   당시 기숙사 1층 라운지에서 한가로이 담배를 피우며 TV를 보고 있는 사원들이 많았다. P는 자판기에서 110엔으로 빼낸 아사히 캔맥주를 들이밀며, 한국에서 온 연수생인데 일본어를 배우고 싶으니 발음을 교정해 주고 어법에 맞는 문장인지 봐달라며 접근하였다.


   본래 일본인들은 남이 사주는 맥주를 쉽게 받아들이는 성향이 아니다. 더더구나 같은 계열사의 해외직원이라 하더라도 처음 보는 한국인을 친절하게 맞이해 주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P는 그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하나씩 친구를 만들어 나갔다.


   그중에 T라는 계열사 직원은 한글에 관심이 많았고,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스타일이었다. 둘은 금세 친구가 되었으며, P는 T의 배려로 그의 룸에까지 초대받아 거울을 앞에 두고 발성과 표정 연습을 교정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개인과외를 받은 셈인데, 낮에는 담임교사, 밤에는 T 같은 기숙사 동료를 벗 삼아 더욱 일어에 친숙해져 갔다. 강사료는 캔맥주 하나로 족했으나 대가는 성대하였다.


   P는 당시 유행하던 소니 워크맨 (녹음 기능이 있는 고가의 것으로 당시 3만 엔 정도)을  아키하바라 전자상가에 찾아가서 구입하였다. 각 과목 교사들의 동의하에 모든 수업을 녹음하였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다시 한번 워크맨을 통해서 들려오는 수업내용을 복습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주로 처음 듣는 단어를 들리는 대로 한글로 따라 적고 비슷한 발음을 사전에서 찾아보고 그 뜻과 쓰임새를 파악하는 과정이었다.


   수업 첫 시간, P가 최초로 노트에 받아 적은 단어는 한글로 '세쯔메이'였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전에서 확인해 보니 '설명(明)'이라는 뜻이었다.

'아하, 선생님이 지금부터 설명을 하겠다는 말이로구나!'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듯한 깨달음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즉시 그 단어를 동료 사원에게 써보고 '아, 이 말은 뜻이 통하였구나!' 하는 확인작업을 반드시 거쳤다.


   주말에는 도쿄 시내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거나 길을 물어가며 실전 일어를 사용해 봤다. 때로는 선술집에서 혼자서 한잔 즐기고 있는 아저씨에게 접근하여 본인의 일어가 통하는지 시험해보기도 하였다. 용감한 행동이었다. 겉보기에 기술직 같은 아저씨들은 수첩에 글자를 적어가며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마시고 있던 자기 술을 따라주며 권하기도 하였다.


   어학원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 흡연장에 가보면 단과대학 재학생인 젊은이들이 여럿 있었다. 한국인을 신기해하던 그들과는 담배를 화제로 삼아 대화를 시도하였다. 흡연과 금연이라는 일본어 발음도 이때 처음 알았다. 한자의 발음에도 어떤 규칙이 있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


   기숙사 세탁기 옆에는 사원들이 보다 버린 일본 잡지나 만화가 쌓여있었고, 이 또한 훌륭한 교재역할을 하였다. 가끔은 성진국 일본의 적나라한 사진과 표현, 외설적인 묘사도 있었다. 그것은 호기심을 가진 젊은이의 욕구를 풀어주는 대신 스트레스만 쌓이게 했다.


   TV에 나오는 짧은 광고문구는 늘 중얼거리며 발음해 보고 흉내를 내었다. 소위 닥공(닥치고 공부)이었다. 외국어는 모방하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진리를 터득하면서 동료들에게 광고문구를 써먹으며 놀리기도 하였다. 교사에게 써먹으면 지적도 받아가며 그 어휘를 내 것으로 만들어 갔다.


   예를 들면 '훌륭하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귀엽다, 멋지다'는 자주 접하는 단어를 광고에서 보면 그 즉시 뜻을 찾아보고 적절하게 사용해 보는 식이었다.


   그 결과 일본에 건너간 지  달 만에 스피치 콘테스트 대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고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운동회와 가을 소풍, 연극 관람 같은 단체 이벤트는 다른 반의 학생들과 친분을 쌓는 소중한 기회였다. 특히 상급반 학생들과 일어로 소통하며 어휘력을 높여나갔다.


   스피치 콘테스트 대회는 단과대학 전체에 케이블 TV로 생중계되어서, 복도나 화장실에서 P를 알아본 사람들이 말을 걸어와 많은 친구들이 생겨났다.


   그해 연말 어학원의 송년회 겸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사회를 맡게 된 P는 상급반 학생과 함께 행사를 진행하는 MC로서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일약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이벤트를 활용한 본인의 노력과 더불어 교사들이나 친구들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언어습득이 일취월장하는 기쁨을 맛보며 재미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친구가 되어준 한국 학생의 집까지 처음 탑승하는 전철노선으로 같이 가보기도 하였다. 모험심을 발휘하며 돌아다녔다. 일본 기숙사는 주말에 배식을 해주지 않았기에 어차피 외출을 해야만 했다. 매일매일 모든 것이 신기할 뿐이었고 다양한 체험과 함께 어휘 주머니가 두둑해져 갔다.


   P는 연말연시 휴가를 보내던 어느 날 기숙사 룸에서 TV 뉴스를 보다가 귀가 뻥 뚫리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어의 속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부터는 단어를 늘려나갔고, 일어 특유의 존경어와 겸양어의 표현을 익혀가면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나갔다. 클래스 내의 시험(말하기, 듣기, 독해, 작문 등)에서는 줄곧 상위권을 유지하며 수업을 리드해 갔다. 교사들은 P와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호기심 많고 박력 있는 한국 청년은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현해탄을 건넌 지 3개월 만에 이루어낸 일이었다. 스스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를 맞이한 P는 시나가와 역을 출발하여 기차를 타고 교토와 나라를 여행하는 청춘열차 티켓을 끊어 동기들과 여행을 떠났다. 관서지방의 나마리(사투리)에도 적응했다. 후지산에도 가봤다. 당시 일본에는 퍼마켓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편의점이란 곳에서 바코드로 물건을 계산하는 신기한 경험을 해보았다.


   뜻이 맞는 유학생의 집에도 놀러 가보고,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귀국 후 강남 유명 호텔의 주방장이 되었음)에게 김치도 얻어먹었다.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담임교사의 자택까지 방문해 봤다. 한국외대와 친분이 있던 일본인 교수의 집에 가서 새해 인사법을 배우고 세뱃돈을 받아보았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여러 문화를 접해보았다. 일어의 사용 기회를 넓힘과 동시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사람들을 사귀어 나갔다.


   이렇게 하다 보니 일어 력은 날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일기 쓰기를 좋아했고, 수많은 백일장대회를 경험하였다. 학생회와 종교 모임의 리더 활동을 경험하며 터득하고 쌓아온 언변친교활동도 밑바탕이 되었다.


   6개월간의 어학원 연수 과정은 훗날 P의 인생에 있어서 일본어가 필수였던 본사와의 관계 증진과 함께, 남보다 빠르게 업무를 이해하고 앞서나갈 수 있었던 주특기가 되었다. 일어를 잘하는 사람은 P라고 하는 등식의 긍정적 이미지는 그가 직장인으로 성장했던  글로벌 무대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고 성공하는 비장의 무기가 되었다.


   매일매일의 수업 태도와 시험 점수, 출결 상황은 즉시 본사에 보고되었다. 담임교사의 코멘트는 무게감이 있었을 것이다. 연수생 동기 3명이 남긴 선의의 경쟁과 결과물, 그리고 P의 스피치 콘테스트 우승이라는 소식도 본사와 한국 지사에 전달되었고, 그들은 내심 자기들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족하였을 것이다.


   12월 말에 신년 설을 쇠러 잠시 일본에 귀국한 일본인 지사장은 3명을 도쿄본사로 호출하여 야키니쿠(쇠고기 구이)를 사주면서 직접 일어 능력을 파악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P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것은 입사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이야기인즉슨 원래 한국 측 대표이사의 반대로 P는 불합격 대상자였다는 것이다. 부산 출신인 대표이사가 호남 출신인 P를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앞으로 커나갈 신생 회사에는 배신을 잘하는 지역 출신을 뽑기 싫으며, 초창기 회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단다.


   P는 언론사 시험을 치르면서 지역색에 대한 편견이 합부를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되었던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일부러 외국계 기업을 택했는데 여기서 지역차별인가?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다만 일본인 지사장의 다음 말은 P를 안도하게 하였다. 그는 정확성을 기하려고 펜으로 종이에 글을 써가며 P에게 뜻을 전하였다.


   "Mr. P, 당신은 우리 일본 측에서 밀어붙여서 합격시킨 사람이다. 일본에도 관동과 관서의 지역색은 있으나 회사 합격에까지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이란 나라는 매우 짙은 지역색이 존재하고 있어 우리도 놀랐다. 그러니 지금처럼 연수를 잘 이수하고 귀국하면 보란 듯이 우리 회사를 위해 힘써달라. 그것만당신을 틀림없이 신뢰할만한 사원이라고 뽑은 내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길이요, 우리의 체면을 살려주는 길이다..."


   P는 일시적으로 좌절하였으나 즉시 마음을 굳게 먹고, 반드시 회사의 발전을 위해 분골쇄신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도쿄의 밤은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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