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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Jan 14. 2024

강남역 미아 1장 2화

30평의 사무실

   P는 대학시절 줄곧 자신의 전공에 불만을 가졌다. 본인은 문학도나 경영학도가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가 다닌 고등학교는 일류 대학교에 유별난 집착으로 학생들의 문이과 구분을 서울대학교 정원 수에 맞춰 정조준하였다.


   당시 2대 1의 비율로 서울대의 이과 정원이 문과의 2배인 점에 착안하여, 고2부터 12반 중에서 8반을 이과, 4반을 문과로 편성하였다. 지방 명문고의 명맥을 잇고, 명문대 입학생 숫자로 이름을 떨치고자 했던 동문들과 지역사회 기대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1학년 말에 학생들의 희망 지원은 1대 1로 나타났다. 담임선생님학생들을 설득하여 2반 정도의 문과지원생을 이과로 바꾸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애당초 문과를 지원했던 P도 그 희생양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 가 설명을 듣고, 공대에 가야 한다는 담임선생님의 종용을 받았어야 했다. 게다가 공대에 다녔던 숙부의 권유도 작용했다.


   수출입국을 선언하던 정부시책에 호응하여 경상도에 철강, 자동차, 석유화학, 가전, 조선소 등 공장을 세운 대기업들은 연일 TV화면의 광고를 독식하곤 하였다.


   공대에 관심도 없고 물리 화학에 흥미도 없P였다. 그런데 선생님의 설득과 집안의 권유, 주위의 흐름에 휩쓸려 1학년 말에 문과에서 이과로 전과를 하게 되었다. 입학시험 수석에 1학년 석차 전교 1등이었던 한동네 친구도 고민 끝에 문과에서 이과로 변경하는 것을 본 영향도 있었다. 그와 함께 과를 바꾸는 바람에 문과의 새책들은 책꽂이 한편에 방치된 채, 헌책방에서 사들인 물리, 화학, 지학, 생물메워졌다.


   이때의 선택은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었다. 공대는 아니었지만 이과로 방향을 틀고서 합격한 대학생활은 공부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3월 말 생일 무렵 학교를 자퇴하는 승부수를 던지며 문과로 전향하여 반수도 해보았다. 명문대 문과의 좁은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본고사 폐지와 내신등급 반영이라는 수상한 제도를 도입한 전두환 정권의 서막이었던 1980년이었다.


   그가 흥미를 가졌던 신문방송학과는 언론인의 꿈을 꾸게 하였다. 당시는 언론고시라는 단어로 시대상을 반영할 정도로 언론사 문턱이 높던 시절이었다. 이과 전공으로 도전하기에는 턱없이 경쟁이 치열한 고시 수준의 언론사 시험에서 무기력한 호남출신은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맞보았다. 면접에 올라가서도 출신지와 배경에서 밀리기도 하였다. 바야흐로 TK가 주도권을 잡던 시절이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은 곳곳에서 호남 박대와 영남 우대의 모습을 시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간지에서 발견한 신입사원 모집공고는 그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한국의 유력 제약기업과 합작한 외국 기업이 간부후보생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그런데 전공을 이공계 출신으로 제한했기에 운 좋게 P에게는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서류를 내밀었더니 필기시험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서초동에 있는 파트너 기업 강당에서 치른 시험장에는 약학, 보건학, 생물, 화학, 공학 등 이공계 전공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시험과목은 영어와 상식이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했다는 전보를 받고 다시 찾은 서초동 사옥에는 외국인 2명과 한국인 3명의 면접관이 그를 맞이했다.


   호구조사에 이어 질문이 쏟아졌다. P가 기억하는 질문은 지원동기였다. 여기서 그는 당당한 자신감을 피력하며 면접관의 눈길을 사로잡았.

"나는 대기업이 싫다. 백사장의 모래알이 되기 싫다. 거대 기업에서 일개 부품으로 살고 싶지 않다. 닭머리가 될지 언정 소꼬리는 되지 않겠다."

포부를 강하게 펼치며 어필한 것이 먹혀들었는지 운 좋게 최종합격을 하게 되었다.


   사실 그는 이 해외기업의 본사가 일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주변의 시선도 의식되었다.

누구나 역사적으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과학기술면에서는 훨씬 앞서나가며 이미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배출하던 일본이었다. P는 그 점을 주목하였다.


   경제규모에서 한때 세계 1위로 올라서며 물건은 일제라는 등식을 만들어내던 일본. 그것은 P의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무엇이든 배워보자'는 정신으로 무장했던 그에게 해외기업, 특히나 일본은 커다란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래, 멋지게 일본을 극복하는 거야!       도전이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지!"

앞날은 막연했지만 신념이 그의 투지불태웠다.


   1987년 4월 입사 첫날은 한국인 사장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 파트너사의 개발 담당 전무였고 합작사의 대표를 겸직하고 있었다. 명문대 약대 출신이었고

켄트 담배를 즐겨 피우던 애연가였다. 건강을 지키고 질병을 다스리는 의약품 기업의 대표가 줄담배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였다. 아무리 기호품이지만 말이다. 

먼 훗날 P 역시도 담배를 입에 물고 살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하던 시기였다.


   한국인이면서 본사 사원으로 근무하며 그들을 맞이한 과장이 첫날 점심을 사주었다. 그 역시도 명문대 약대 출신이었는데 대표이사와 같은 고향이었다.


   합격자 4명 중에서 1명은 입사 당일날 퇴사를 고하고 떠나버렸다. 공채 2기는 동기 3명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퇴사한 1명은 명문대 석사출신이었다. 다른 곳에 동시합격했는데 그쪽을 선택한다고 하였다. 누구라도 동시에 합격한다면, 앞날이 불투명한 신생 합작기업보다 안정적인 곳을 택할 것이다.


   사무실은 파트너사 본사 사옥의 주차장에 급조된 7층건물의 3층이었다. 입사 첫날 앉게 된 사무실에는 연락사무소 간판이 철제문에 붙어있었다. 30평 정도 공간에 책상 대여섯 개, 응접세트, 자그마한 회의실이 전부였다. 사무실 바닥에 카펫이 깔려있었던 것이 그나마 외국계 기업 느낌을 자아냈다고나 할까?


   유일무이한 공채 1기 선배 한 명이 일본 연수중이었다는 사실에 저으기 안도하였다. 다행이었다. 합격자들에게 1년간 해외연수 기회를 제공한다는 회사의 약속이 그에게는 허언이 아니라 꼭 실현되기만을 기대하게 하는 유일한 희망줄이었다.


   입사 첫날 저녁, 동기들 3명은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치킨집으로 향하였다.


   과연 이들의 앞날에는 어떤 길이 전개되고, 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숙집에 돌아가서 따뜻한 저녁밥을 먹는 것보다 동기들 간의 대화가 더 절실한 첫날이었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이 작은 30평 사무실에 방치된 3명은 도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절로 한숨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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