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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Jan 14. 2024

강남역 미아(가칭) 1장 1화

서초동에서 서초동으로

2022년 12월 어느 날, P는 물끄러미 텅 빈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수십 명이 지지고 볶고 웃던 그 공간의 책상과 의자들은 다 사라지고, 회의실 탁자 위 끊긴 인터넷 선과 휴지조각,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통 주변의 잡동사니들이 폐허를 방불케 했다.


누군가 절규하듯 장탄식을 내뱉으며 저 깊은 목구멍 속에서 끓어오르는 가래침을 칵 뱉어냈다.


아~ 오늘로써 직장인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인가?

그랬다.

그는 근 36년 가까이 다니던 정든 직장에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송별회도 없었고 꽃다발도 없었고 상장도 선물도 박수갈채도 없었다.

36년 다닌 훈장 같은 공로패도 없었고 눈물 흘리는 후배, 부하직원들도 없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문구는 어느 식당 카운터 위에나 걸려 있었다.


회사는 청산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폐업신고를 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코로나19의 암영은 소상공인들에게 국한된 이야기일 뿐, 내 직장만큼은 하루도 늦지 않게 꼬박꼬박 월급통장에 급여를 찍어준 고마운 산타클로스였다고 생각했다.


그런 직장이 문을 닫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을 한 뒤, 1년간 거대 법률사무소를 끼고 치밀한 작업을 거쳐 이 지구상에서 회사 이름을 지워버렸다.


문득 P는 사지에 힘이 풀려 핸드폰을 놓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원복공사를 위해 작은 의자마저 치워진 사무실 바닥의 냉기는 구겨진 청바지를 통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네들은 거대 글로벌 본사의 제안으로 오지의 해외지사 주재원으로 파견 나간, 생계형 취업을 선택한 극히 일부 사원을 제외하곤 다들 두꺼운 옷을 벗어던졌다.


아직 젊은 직원들이나 면허를 갖고 있는 이들은 전직지원금과 위로금을 보너스로 받고 이직한다고 들었지만, 이제 나이 먹고 면허도 없고 오갈 데 없는 P 같은 임원은 앞길이 막막하였다.

임원은 계약직이라서 위로금도 없었다.


이제 무얼 하나?

당장 앞날이 걱정되었다.

국민연금 나올 때까지는 버텨야하는데...

늘 생글생글 웃던 아내에게도 이미 예고된 퇴직은 큰 쇼크로 다가왔고 평생 처음 겪은 대상포진의 고통은 몸 전체에 상흔을 남겼다.

멘털붕괴는 육신의 면역력 마저 약화시켰다.


죄인 같은 P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일인가?

단순히 역병의 여파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상처가 깊었다.


이 코로나 시국에 마음껏 술 먹고 떠들지도 못하는 처지를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마땅치 않았지만 그는 동료들 몇을 붙들고 근처 식당으로 향하였다.

가는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단골집 주인은 이미 직장폐쇄 얘기를 들은 터라 앞으로의 매출에 적잖은 타격을 예상했는지 평소보다 무뚝뚝하였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을 떠올리며 소주잔을 허공에 부딪혀 건배사를 외쳐댔다.


오늘의 건배사는 단순히 "위하여!"였다.

무얼 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서로의 앞날을 걱정했을 것이다.


술이 석 잔 들어가자 대학 졸업 후의 방황과 입사한 날이 떠올랐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다 입사 첫날 생맥주 마시고 치킨 뼈를 잘 못 씹어 아랫이가 깨진 기억을 떠올렸다.

서초동 동호치킨집이었다.


오늘 식당도 서초동 갈빗집이라는 걸 깨닫자 이 동네가 마치 운명의 조각처럼 다가왔다.

결국 서초동에서 시작하여 서초동으로 마감하는가?

P는 쓰디쓴 술맛에 미간을 찌푸렸다.

서초동...


그가 뼈를 묻으리라 작정하고 오가던 직장은 늘 강남역 근처였으며 행정구역상 서초구 서초동 또는 강남구 역삼동이었다.

서초동은 시작과 끝이었고 역삼동은 성장과 도약의 상징이었다.


하나의 그룹사였지만, 서초동에서 입사한 시기의 회사명에서 다섯 번이나 이름이 바뀌었다.

그룹 내 이동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엄마 품처럼 따뜻한 모회사였다.

마지막 정을 뗀 과정만 빼면 말이다.


모든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었다.


이제 한 보따리씩 P의 삶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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