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어학원에서 6개월 연수는 짧지만 의미가 큰 일본어 습득과정이었다. P는 이 기간 동안 유감없이 그의 어학적 능력을 발휘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과 자유자재로 대화할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리 현지에서 천재적이고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해도, 언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경험 속에서 축적된 어휘와 순발력을 요구하였다.
P는 6개월 단기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언어와 문화적 경험이 일천한 상태로, 일본의 대학생(대학원생)들이 입사하자마자 참여하는 신입사원 연수에 참가해야 했다. 그것은 처음부터 예정된 순서였다.
P와 같이 중급에서도 가장 낮은 초급반 출신의 어학원생이, 일본의 20대 청년들과 생활하며 비즈니스 언어를 습득해야만 했던 상황은 실제로 부딪혀보니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매일매일 의약학 전문용어에, 직장인 사회에서 쓰는 속어들까지 알아들어야 했다. 못 알아들으면 본인만 손해요, 놀림감이 되었다. 왕따의 대상이 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면부지의 일본 젊은이들 입장에서는, 이웃나라에서 온 나이가 몇 살 더 많은(일본은 병역의무가 없음) 이방인 3명 그룹은 뒷담화하기에 딱 좋았다.
일본은 신학기가 4월에 시작되는데 기업 신입사원연수도 4월부터 시작되었다. P가 배속된 연수 장소는 모기업의 발상지에 있는 지방의 연수원이었다. 일본열도 전역에서 젊은 신입사원들이 모여들었다. 자기네들끼리도 홋카이도와 오키나와같이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 출신을 만나서 신기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기해했던 것은 한국인 연수생들이었으리라. 일거수일투족을 마치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였다.
P가 정든 어학원과 기숙사를 떠나 집결지로 이동한 경로는, 먼저 도쿄에서 열차를 이용하여 오사카까지 갔다. 오사카에서는 배편으로 연수원 소재지에 가까운 도시의 항구까지 갔다. 항구부터는 버스를 이용했다. 하루종일 걸려 오후 늦게 연수원에 도착하였는데 이미 룸이 배정되어 있었고 2인 1실이었다. P의 룸메(룸메이트)는 동경대 약대를 졸업한 박사학위 소유자였다. 나머지 동기 둘은 각각 국립대 약대 석사출신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P의 룸메는 당시 역사가 70년 된 그룹사 입장에서도 상당히 드문 케이스였다. 첫째로 동경대 약대출신이 입사한 것도 그렇고, 게다가 박사출신이 신입으로 들어온 경우는 전례가 없었다. 본사에서는 3명 동기들 중에서 일부러 P를 룸메로 배정해 줌으로써 양국 명문대학 출신끼리 잘 어울려보라는 배려를 해준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런데 이 룸메는 대단히 신경질적이었다. 일본어가 아직 완성되기 전의 상황에서 생경한 의약학 분야를 공부해야만 했던 P였다. 매일 보는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밤공부를 할 때마다, 연필 사각거리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빨리 취침하라고 독촉하였다.
어느 날 둘은 첨예하게 맞부딪혔다. 급기야 역사이야기까지 터져 나왔다. 절대로 질 수 없었던 P와, 대일본제국의 자존심을 건 룸메는 밤을 새워 언쟁을 벌였다. 흥분하여 뜻을 전달하는데 애를 먹은 P는 침을 튀기고 필담도 해가면서 백제 이야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역사를 풀어놓고 눈을 부릅뜨면서 룸메와 맞섰다.
결국 숙직담당 과장이 뜯어말려서 끝났지만 둘은 화해하지도 않았고 어색한 동거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양국의 역사교육 과정이 철저히 다른 것에 기인한 탓으로 꼭 룸메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열혈남아였던 P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시의 연수는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운동장 집합 후 구호제창에 이은 맨손체조, 2km 달리기를 하고 아침을 먹은 다음 연수원으로 모여서 가는 순서였다.
9시부터의 연수는 오후 5시에 끝났지만 기숙사에 돌아오면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조별 분임토의를 해서 과제를 제출하였다. 밤 10시가 되면 무조건 소등하였다.
10시부터 개별적으로 공부할 사람들은 스탠드 등을 켜놓고 공부를 했다. 이때 룸메가 시끄럽다고 하거나 수면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면서 시비를 걸면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2인 1실의 공존에는 배려와 양보가 필수였는데 P와 같은 외국인들에게는 여러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공부는 해야 하고, 그러려면 불을 켜야 하고, 필기하면서 암기도 해야 했는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성가신 존재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당시 그룹사 연수의 외국인은 P와 동기들 3명 외에도 또 다른 한국 제약사 오너의 아들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합작법인 오너의 장남도 있었다. 이 오너의 아들들은 일본에서 대학원까지 마친 이들로서 당연히 일어에도 능통하였다. 그들은 후계자 수업을 받으러 온 그 회사의 왕족들이었다.
공채출신인 P는 처음에는 낯가림이 심해서 그 둘을 멀리 하였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일어 표현을 물어보며 친해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화젯거리를 주고받으며 격의 없이 곧잘 어울리게 되었다. 헤어질 때는 선물도 주고받았고 식사도 같이 하는 사이까지 발전하였다.
오너의 자제들은 일반 사원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사고방식과 삶의 패턴도 구분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엄연한 주종관계가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하였다.
한국 제약기업에서 파견되어 연구소에 근무했던 선배 연구원도 있었다. 주말이면 같이 어울려 자전거를 타고 볼링을 치러 가곤 하였다.
그룹사 연수에서는 창립 후의 역사와 기업의 DNA를 포함해서 어떤 산업에서 사회와 인류에 공헌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연구소나 공장 탐방의 기회도 주어졌고, 당시 일본에서 개최된 EXPO의 관람기회도 부여받았다.
그룹사 제품에는 의약품 이외에 음료나 식품도 있었다. 연수원 인근에는 신약개발연구소나 능력개발연구소, 제제연구소, 합성연구소, 그 외에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가 있어서, 자전거나 자가용이 필수였다. 하지만 신입사원들은 도보로 연수원에 이동해야만 했다.
P는 종종 연수원생 관리를 위해 파견된 본사 직원들과 식당에서 면담을 했다. 돈가스와 카레라이스를 맛있게 먹어가며 모 기업의 발상지에서 경험하고 있는 특유의 기업문화에 대한 관심사를 화두로 삼아 즐겨 토론하곤 하였다.
당시 P의 별명은 '도우시테?(どうして?)'였는데, 이것은 '어째서? 왜?'라는 의미였다. 항시 매사에 의문과 탐구심으로 가든 찬 P는, '어째서? 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만큼 모든 사물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의문이 해소될 때까지 파고들었다.
능력개발연구소 주변에는 본사의 모토인 '발상의 전환'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여러 개 있었다. 볼수록 특이했다. 이를테면 물 위에 떠있는 돌, 천장에 뿌리를 내린 토마토, 굽어있는 삼나무, 거꾸로 걸린 지도 등이 있었다.
P는 일련의 연수과정을 통해 서서히 기업문화를 이해하게 되었다. 창의력을 존중하며 남과 다른 자신을 만들어나가야만 생존한다는 모티브도 찾게 되었다.
연수원은 지방 소도시에 있었는데 가끔 시내로 진출하여 한국식당에도 가보았다. 일본인 동기들을 따라 이자카야나 위스키바에도 갔으며, 가라오케도 즐겼다.
동기들 중에서 연수원 소재지 지역의 대학 출신으로 지역 유지의 자제들은 주말에 자가용을 몰고 인근 도시까지 놀러 다니기도 하였다. 한국인을 처음 보는 그들은 호기심 반 정 표현 반으로 살갑게 무리에 끼워주었다. 주말이면 일탈도 해가며 그 또래 젊은이들의 문화를 풍부하게 접하였다.
동기들은 P에게 온갖 종류의 만화와 잡지, 음악테이프를 선물해 주곤 했다. 이런 것들은 P가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까지 빠져있었던 나카모리 아키나 외에도 이쯔와 마유미, 와타나베 미사토, 이노우에 요스이, 안전지대 등 J-POP의 새로운 장르에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연수기간은 만물이 생동하는 봄철이어서 젊음을 발산하기에 최고의 시즌이었다. 하지만 주중에는 코피를 흘려가며 고단한 몸을 이끌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아침부터 퀴즈시험을 봐야 했다. 그룹토의 시간에는 Brainstorming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시하여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매일 쓰는 일보의 내용도 점차 늘어만 갔다.
아침에 본 시험성적은 오후에 강당 뒤에 게시가 되었다. P와 동기들은 가끔 동경대 박사를 누르고 1등을 차지하기도 해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한 달간의 그룹사 연수가 끝나자 두 달째부터는 각 계열사별로 나뉘어 본격적인 연수가 시작되었다. P는 의약품 분야의 영업부에 배치되었다. 사람 좋은 룸메이트를 만나면서, 룸메 갈등은 해소되었다. 이때부터 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연구에만 몰두하는 사람보다 친해지기 쉽다는 경험을 하였다. 지금도 P는 적당히 음주를 할 줄 아는 영업계통의 사람들을 선호한다.
P는 전혀 새로운 영역인 약리, 병태, 생리학 등 기초지식을 배워가면서 점점 한 사람 몫을 할 줄 아는 영업사원으로 성장해 갔다.
여자 연수생도 6명이나 있었다. 그중 관서지방 출신 약대 출신 연수생은 한글을 배우고 싶다며 책을 들고서 금남구역인 남자기숙사 P의 룸에 들어왔다가 사감에게 발각되어 징계를 받았다. 훗날 이 여직원은 연수가 끝나 한국으로 귀국한 P를 그리워하며 매주 편지와 엽서를 보내왔다. 급기야 이듬해에는 친구와 함께 서울여행을 와서 청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당시 일본인 여직원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었던 P는 단호하게 물리쳤다. 하지만 그 여직원에게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겼을 것이다. 하마터면 족보에 일본 여성을 올릴 뻔하였다.
이 여직원 때문에 같은 조의 남자 연수생들이 P를 연구소 뒤 잔디밭으로 불러낸 사건도 있었다. 조센징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나 하느냐며 터무니없는 협박과 함께 집단 린치를 가할 위기에 처하였다. 다행히 실험동물 위령제를 지내러 나온 연구원들에게 발견되어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나기도 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여러 복잡한 상황들 속에서도 P는 연수 성적이 줄곧 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도쿄본사에서 파견 나온 인사부나 학술부 직원들은, 한국인인데 말도 잘하고 성적이 좋은 P에게 호감을 표하며 왕따 당하지 않도록 비호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아무 탈없이 연수를 마칠 수 있게끔 도와주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은 이미 P가 도쿄의 어학원 스피치 콘테스트 대회에서 어떤 활약을 했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상부의 지시를 받아 외국인인 P와 동기들을 특별히 보호했을 것이다.
점점 무더워지고 소낙비가 그립던 6월이 되었다. 막 발매하기 시작한 신약의 특장점을 정리해서 스스로 시나리오를 만들어 발표하는 슬라이드 프레젠테이션 대회도 있었다. 의사와 영업사원 역할을 서로 바꿔가면서 제품을 소개하는 롤플레잉, 비즈니스맨 매너교육, 영업사원의 자세, 지점 방문 연수 등으로 점점 직장인의 꼴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오사카지점 연수 기간에는 매일 선배 영업사원들을 따라다니며 병원과 도매상, 약국을 방문하였다. 그들이 어떻게 의약품을 의사에게 소개하고 어떤 물류(物流) 과정을 통해서 의약품이 환자에게 전달되는지, 현장에서 보면서 실습하는 과정을 이수하였다. 일본 제1의 상업도시인 오사카에서, 장사가 아닌 비즈니스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실전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었다.
의약품이란 단순히 사고파는 일반적인 물건이 아니다. 의약품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을 MR(Medical Representative)이라 부르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정확하고 올바른 정보를 의료인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을 배워나갔다. 의사를 포함한 의료인들에게 제대로 된 의약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진짜 영업이라는 콘셉트를 깨닫게 된 것은 큰 전환점이었다. 일본에 오기 전에 경험했던 한국 파트너사의 영업 방식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P가 가장 힘들어했던 추억은 의약학 용어의 습득 과정이었다. 일반 일본어와는 차원이 다른 전문용어들은 먼저 그 뜻을 우리말이나 영어로 이해하고 암기해야만 했다. 한자 용어나 외래어도 많아서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여간해서 쉽게 외워지지 않았다.
예컨대 암치료제를 통칭하는 '항암제'는 일어로 '抗癌剤'나 '制ガン剤'라 쓰면서 이해해야만 했다. 좀 더 복잡한 '만성폐색성폐질환'은 '慢性閉塞性肺疾患', 영어약자로는 'COPD', 풀어서는 'Chronic Obstructive Pulmonary Disease'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용어들은 주의 깊게 읽어보면서 몇 번이나 써보고 입에서 열 번은 중얼거려야 외워졌다.
본래 문과 지망생이었던 P는 적성에 맞지 않는 이과로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때는 전공에 적응 못 하여 허구한 날 술만 퍼마셔댔다. 그러다 운 좋게 이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정신 차리고 밤샘공부를 해가며 앞날에 기반이 되는 전문용어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시험문제 답안을 작성할 수가 있었다. 또 정확한 일어로 발음을 해야만 상대방이 이해해 주는 환경이었다.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텨가며 생존해야 했다.
반복학습을 거듭해 가면서 차츰 주변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특유의 은근과 끈기가 발휘된 시기였다. 반드시 한다면 하고야 만다는 승부사 기질을 보여준 P였다.
기업조직에서 살아남고 난제를 해결하며 성장하려면, 열공(열심히 공부), 닥공(닥치고 공부), 죽공(죽으나 사나 공부) 뿐이었다.
그 무렵 P는 키가 170cm을 넘겼어도 체중은 54kg였으니 오로지 깡다구만 남은 상태였다.
어느덧 무더운 한여름이 찾아왔다. 서울이 88 올림픽으로 용광로처럼 달아오른 어느 여름날, P는 기나긴 연수를 마치게 되었다. 생활비를 아껴서 저축한 자금으로 도쿄의 백화점에서 알뜰하게 선물을 사들고 김포공항행 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1년 전 보였던 창밖의 푸른 가을 하늘은, 어느새 비를 잔뜩 머금은 한여름 뭉게구름으로 바뀌었지만 P는 파릇파릇한 생기가 도는 얼굴로 귀국길에 올랐다.
공항에는 아버지가 반가이 기다리고 있었고, 반갑게 해후한 부자(父子)는 바로 해물탕집으로 향하였다. 무엇보다 얼큰한 음식이 그리웠던 일본생활이었다.
1년간 일어와 연수를 이수하고 이제 막 영업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한 P가 응시한 곳에는, 온갖 질환의 병원간판과 약국이름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