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 동기들은 입사하고 처음 한 달은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았다. 어쩌다 파트너사의 학술담당 약사들이 약리학 기초교육을 시켜주러 나타났을 뿐이었다.
어느 날 일본인 지사장이 출장을 왔고 영어로 소통을 시작하였다. 그는 틀림없이 연수를 갈 것이니 그동안 제품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라면서 숙제를 내주었다. 자사개발품 신약인 고혈압 약과 기관지염 치료제, 녹내장 약제의 개발배경부터 약효약리, 부작용까지 망라된 전화번호부 두께의 영어 원서를 던져주며 자습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공부하고, 틀려도 좋으니 일어로 작문을 한 요약본을 제출하라고 지시하였다.
P는 동생이 제2외국어로 일어 공부를 한다고 사 두었던 민중서림의 엣센스 일한사전은 갖고 있었으나 한일사전은 없었다. 얼른 사전을 사서 작문을 해보기로 하고 벼락치기 공부 끝에 제출하였다. 아마도 엉터리 내용이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일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한편 한국인 사장은, 파트너사의 영업부에 배속시켜 줄 테니 종합병원부(종병부) 영업사원과 동행하면서 디테일맨(제품의 영업은 하지 않고 설명만 하는 역할)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파트너사의 종병부는 제약기업의 사관학교라 불릴 만큼 군기가 셌고, 영업부서의 꽃이라고 지칭되는 부서였다. 감히 신입사원들이 넘볼 조직은 아니었기에 상당히 파격적인 배려였다. 아마도 본사의 제품들이 병원 처방약이었기에 종병부에 배속되었을 것이다.
사전 오리엔테이션도 없이 갈색의 007 가방을 지급받았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종병부가 있던 5층에 들어설 때는 전쟁터에 홀로 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P는 자기소개를 하면서 떨려 나오는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첫날부터 곧바로 영업사원들과 동행을 시작하며 현장에 투입되었다. 입사하고 한 달 뒤였다.
1980년대 후반에는 자가용이 귀하였으나, 종병부 주임이나 대리, 과장 중에 자가용(주로 포니, 포니Ⅱ)을 몰고 다니는 사원들이 있었다. 그들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파트너사 주력상품으로 수액제(링거액)도 있었고 항생제, 항균제도 많았다.
기관지 등 호흡기, 고혈압 등 순환기, 간 위장 등 소화기, 해열진통제, 스테로이드, 점안액 등등 다양한 제품군이 있었다. 너무 많아서 이름을 외우기도 힘들었다.
P가 출근하던 건물 1층에는 약창고가 있었다. 영업사원들은 주문서를 발행해서 의약품을 받은 다음 자가용에 실어 배송하거나 택시로 운반하였다. 제법 부피가 큰 제품들은 차량 운반이 필수였다.
영업사원들은 하루에 5천 원씩 일당을 받았다. 그 당시 물가로 점심값에 교통비, 구두 닦는 비용에 쓰기에도 빠듯하였다.
종병부 사원들은 큰 대학병원부터 작은 종합병원까지 권역별 또는 의료재단별로 주거래선을 배정받아 직거래를 하였다. 약품의 배송은 도매상을 거치기도 했지만 직납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차량을 갖고 있는 사원과 합승하면 교통비가 절감되는 이점이 있었다. 동승하면 차량 안에서 상사의 험담을 하기 일쑤였다. 팀원끼리 뜻이 맞으면 하루 일과를 팽개치고 서울 근교 영양탕집이나 닭백숙집에 모여 앉아 낮술을 마셨다. 당구도 치고 노름도 하였다.
당시의 직납 거래 환경하에서는 어음이나 수표, 또는 현금으로 수금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바람에 항상 호주머니가 두둑하였다. 가끔은 도덕적 해이감이 생기기도 했나 보다. 자기 돈인지 회사 돈인지 망각하고 도박에 빠져 패가망신한 케이스도 나왔으니 말이다.
부도를 내고 야반도주했거나, 거짓 주문서를 발행하고 실제 물건을 빼돌려 다른 루트로 팔아넘기고 돈을 챙겨 도주해 버린 케이스도 있었다. 도덕관념이랄까 윤리관이 해이해진 영업사원들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오로지 유선전화로만 연락이 가능한 시대였다. 영업사원이 깜깜무소식으로 잠적해 버리면 피해는 고스란히 그 팀에서 떠안게 되었다. 병원 영업은 상당히 리스크가 큰 비즈니스였다. 팀장이나 영업본부장은 영업사원관리에 무던히도 애를 먹었다.
신제품 중에는 제3세대 항균제 같은 단가 높은 제품도 있었고, 회사에서는 적잖은 판촉비를 책정하여 밀어붙였다. 단기간에 제품이 자리를 잡게 하려면 물량공세는 필수였다. 영업현장에서 제품의 특장점을 강조하는 경우보다, 어떻게 판촉비와 경비를 활용하느냐는 노하우를 지닌 사원들이 승승장구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만지는 대형종합병원 담당자들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실적에 대한 압박과 리스크도 큰 반면, 돌아오는 대가도 컸기에 영업사원들의 로망이었다. 물론 경비가 타깃에 매칭되지 않는 배달사고도 많았다.
의약품이 환자에게 도달하기까지는 반드시 처방의사의 손을 거쳐야 했다. 영업사원들은 주거래병원 의사들을 Key Dr.로 칭하며 그들과 친해져야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긴밀한 접근을 통하여 인간관계를 맺어나갔다.
매개체로 활용된 것들에는 골프나 바둑, 낚시, 등산과 같은 취미 맞추기부터 술접대 같은 향응도 있었다. 생일이나 승진, 개업 시 축하선물로 물량공세(당시엔 양주나 양담배도 귀한 선물 중 하나였음)를 퍼부어 댔다. 병원이나 연구실 이전 시 이삿짐 날라주기, 쇼핑 심부름, 공항 픽업, 야간방문, 현물공세까지 퍼부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실적이 늘어나면 방문도 더 해야 하는데, 맨입으로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한된 파이를 나눠먹는데 남의 떡을 뺏어먹어야 내가 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번뜩거리는 눈동자들이 비열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글 속 사냥꾼들의 게임장 같았다.
뒷돈을 받은 유명 교수들이 언론에 등장하거나 기업의 영업본부장이 구속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대표이사는 멀쩡하지만 본부장이나 임원이 대신 감옥 신세를 지기도 했다. 출소하면 다시 복직시켜서 승진도 시켜줬으니, 옥살이가 훈장처럼 여겨지던 분위기였다.
가끔 의학 정보가 담긴 해외논문이나 국제저널을 요구받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시대상황에서 쉽게 구해지는 문헌들이 아니었다. 종로서적이나 교보문고를 뒤지고 다녀야 겨우 구해지던 시절이었다. 일본어 저널(학회지)도 인기가 있었다.
팸플릿을 외우다시피 제품을 꿰뚫고 있는 사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현장에서 온전히 제품 지식을 활용하는 것은 학술부 약사들 몫이었다.
업계에서는 마케팅 부서 제품담당자들을 PM(Product Manager)이라 불렀다. 그들은 마케팅 경비를 어떻게 유효 적절히 영업 현장에 배분하느냐가 주요 관심사였다. 제품의 콘셉트를 정하고 라이선스인 제품을 학회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연구개발에 참여한 유명 해외 교수들을 초대하여 강연회를 갖거나, 제품설명회를 주도하는 등 학술이벤트를 기획하였다.
당시의 P는 PM 업무를 직접 접하기 어려운 위치였고, 그런 조직이 있다는 정보만 들었을 뿐이었다.
유능한 영업사원들은 어떻게 해서든 Key Dr.의 마음을 사야 했으며, 그 마음에 들기 위한 노력이 곧 능력치였다. 능력은 곧 인센티브로 연결되어 기본급 이외의 수입을 창출하거나 더 나은 거래선 배정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렇지 못한 영업사원들은 매출목표(타깃)를 맞추느라 애를 먹었다. 실적이 따라주지 않으면 영업부의 꽃인 종병부에서 개인병원부나 약국담당자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병원이나 도매상을 상대할 때에는 할증이나 할인의 방법도 동원되었다. 100개를 사면 10개를 덤으로 더 얹혀주고 100개의 값으로 처리하거나, 100원어치를 사면 90원으로 깎아주는 방법도 횡행했다. 이른바 영업관행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P와 같은 디테일맨은 당연히 파트너사 영업부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거추장스럽고 어정쩡한 동반자였다.
P는 친화력을 발휘하여 파트너사 선배를 따라 사우나에 가기도 하거나 영화관에도 갔다. 서울 근교 음식점에 모여 회식을 하는데 끼워주면 얼씨구나 좋다 콧노래 부르며 하루 일당 걸기 고스톱 전투에 참여하였다. 어떻게든 어울리며 백전노장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얻어내야 했다. 내성적인 성격이 영업에 적응하려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당시에는 병원 방문 후에 일보를 쓰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본래 P는 합작한 본사의 제품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파트너사 제품을 영업하러 동반출장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고민하면서 소설 쓰듯 일보를 메워야만 했다. 어쩌다 시장조사를 위해 병원 약사를 만나 경쟁품을 파악하는 날이면 일보가 풍성해져서 뿌듯하기만 하였다.
제품 팸플릿에 봉투를 끼워 넣고 영업사원 대신 배달심부름을 한 경우도 있었다. 약속 액수보다 적다는 상대방의 불만에 전후좌우 상황도 모르면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심부름 결과를 보고하면 말없이 담배만 물고 구두 끝만 응시하던 파트너사 선배의 어두운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그 선배는 담배 한 개비를 권하며 침을 탁 뱉고, "더러워서 영업 못 해 먹겠네..."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소위 경비(經費)라 불렀던 뒷돈을 상사와 실랑이하며 타냈겠지만 현장의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나 보다.
어느 회사는 경비가 짜고 어디는 후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우수 영업사원들은 경비 잘 주는 경쟁사로 옮겨 타기도 했다.
35년도 더 지난 옛날이야기를 지금에 와서 끄집어내는 이유는, 거래와 장사로 점철된 그 시절의 영업실태가 상당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산전수전을 겪고 귀사 한 날이면 동기들끼리 술 한잔씩 나누며 앞으로 지낼 자신들의 앞날이 결코 밝지는 않을 것임을 짐작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해 여름 일본 연수에서 돌아온 선배와, 비슷한 시기에 부임한 일본인 마케팅 과장의 주도로, 파트너사의 기존 영업방식을 탈피한 영업마케팅 기법을 처음 교육받게 되었다. 여기서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주 고객인 Key Dr.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영업 방식은 존속한다. 그러나 정확한 시장조사를 바탕으로 고객에게 학술적이고 아카데믹한 접근을 한다. 제대로 된 의약품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나가게끔 변화를 시도한다고 했다.
마케팅과 더불어 영업방식을 다르게 시도하겠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1980년대 후반의 영업현장은 시장을 뺏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고, 실탄대신 물건과 금전을 장전한 전쟁터였다. 낮에는 일터로 밤에는 술집으로 몸을 던져야 했다.
P는 입사하자마자 경험했던 영업현장의 귀중한 경험을 통해 일생일대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는 과연 소수정예로 거대한 관행에 부딪혀가며 이 부조화스러운 영업현장을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영업마케팅 기법을 활용하는 스타일로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였다.
현장 경험을 쌓아가며 미래를 걱정해야 했던 P는 다가올 연수과정에서 과연 무엇을 배우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난감해하며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해외연수 1년의 달콤한 과실을 노린 것은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점점 자신감이 옅어져 갔다.
100명의 영업사원은 100가지의 영업 스타일을 창출한다고 하듯, 남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할 목표는 분명해졌다. 확신을 갖고 덤벼야 할 모티브가 필요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P가 겪은 신입사원 시절 경험은 짧지만 강력한 임팩트를 발휘하였다. 그가 본인 성격과 맞지도 않는 일들을 겪었던 이 시기에 퇴사하지 않고 버틴 이유는 순전히 호기심과 탐구심, 그리고 입사하자마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머니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당뇨병 합병증에 기인한 뇌경색으로 이른 나이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환경하에서 제대로 된 의약품도 적었던 탓에 올바른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뼈아픈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힌 이 사건은, P에게 있어 의약품의 중요성과 존재감을 느끼게 해 준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질병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약품은 장사의 수단이 아니다. 인명을 좌지우지하는 과학정보의 집합체이다. 이것을 올바르게 세상에 알리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을 깨우치게 되었다. 즉, 정확한 의약품의 정보전달자가 되어야 할 명분이 생긴 것이다. P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연수를 고대하게 되었다.
회사 바깥은 6.29 선언에 넥타이부대의 행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시국이었다. 민주화를 외치는 소용돌이 속에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P는 낮에는 영업현장에 점점 길들여져 가면서, 퇴근 후에는 종로의 시사어학원에 출석하여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외우는 바쁜 신세였다.
가을이면 일본연수를 떠나야 했기에 최초로 여권을 만들고 기술연수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했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 남산에 위치한 모처에 가서 4시간 동안 반공방첩 교육을 이수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당시 해외여행은 흔치 않은 기회여서 주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그렇게 그 해 가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