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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Jan 16. 2024

강남역 미아 1장 3화

영업사원 백태(百態)

P와 동기들은 입사 처음 한 달은 그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았다.

간간히 파트너사의 학술담당 약사들이 약리학 기초 교육을 시켜주러 나타났을 뿐이었다.


어느 날 일본인 지사장이 출장을 와서 영어로 소통을 시작하였는데, 틀림없이 연수를 갈 것이고 그동안은 제품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라면서 자사개발품 신약인 고혈압 약과 기관지염 치료제, 녹내장 약제의 개발배경부터 약효약리, 부작용까지 망라된 전화번호부 두께의 영어 원서를 던져주었다.


그리고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를 공부하고서, 틀려도 좋으니 일어로 작문을 한 요약본을 제출하라고 지시하였다.

P는 동생이 제2외국어로 일어 공부를 한다고 사 두었던 민중서림의 센스 일한사전은 갖고 있었으나 한일사전은 없었기에 사전을 사서 작문을 해보기로 하고 벼락치기 공부 끝에 제출을 해봤으나 아마도 엉터리 내용이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일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한편 한국인 사장은, 파트너사의 영업부에 배속을 시켜줄 테니 종합병원부(종병부) 영업사원과 동행하면서 디테일맨(제품의 영업은 하지 않고 설명만 하는 역할)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파트너사의 종병부는 사관학교라 불릴 만큼 군기가 셌고,  모든 영업부서의 꽃이라고 지칭되는 부서였다. 

감히 신입사원들이 넘볼 조직은 아니었기에 상당히 파격적인 배려였다.


사전 오리엔테이션도 없이 007 가방을 지급받고 넥타이를 매고서 종병부가 있던 5층에 들어설 때는 전쟁터에 홀로 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첫날부터 곧바로 영업사원들과 동행을 시작하며 현장에 투입되었다.

입사하고 한 달 후였다.


80년대 후반인 그 당시에는 자가용이 귀하였으나, 종병부 주임이나 대리 또는 과장들 중에는 제법 자가용(주로 포니, 포니Ⅱ)을 몰고 다니는 사원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파트너사의 주력상품에는 수액제(링거액)도 있었고 항생제, 항균제, 위장약, 강심제, 진통해열제, 점안액 등등이 있었는데, P가 출근하던 건물 1층에는 약창고가 있었고, 영업사원들은 주문서를 발행하여 실제 약을 받은 다음 자가용에 실어서 배송하거나 택시로 운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제법 부피가 큰 제품들은 차량 운반이 필수였다.


당시 영업사원들은 하루에 5천 원 정도씩 일당을 받았으며 그 시절 물가로는 점심값에 교통비, 구두 닦는 비용에 쓰기에도 빠듯하였다.


보통의 종병부 사원들은 큰 대학병원부터 작은 종합병원까지 권역별 또는 의료재단별로 주거래선을 배정받아 직거래를 하였는데, 약품의 배송은 도매상을 거치기도  했지만 직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차량을 갖고 있는 사원과 합승하면 교통비가 절감되는 이점이 있었고 차량 안에서 상사의 험담을 하거나 팀원 서넛이 뜻이 맞으면 하루 일과를 팽개치고 서울 근교의 개고기집이나 닭볶음탕집에 모여 대낮부터 낮술에 당구에 고스톱을 치기도 하였다.


당시의 직납 거래 환경하에서는 어음이나 수표, 또는 현금으로 수금하는 일도 빈번하였고, 그 바람에 항상 호주머니가 두둑하였다.

여기서 가끔은 도덕적 해이감이 생기기도 했는지, 자기 돈인지 회사 돈인지 망각한 체 도박에 빠져 패가망신한 케이스도 제법 나왔다고 한다.


또한 주문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거짓 주문서를 발행하고 실제 물건을 빼돌려 다른 루트로 팔아넘기며 돈을 챙기고 도주해 버려 부도를 내는 케이스도 있었다고 한다.


삐삐도 핸드폰도 없는 시대, 오로지 유선 전화로만 연락이 가능한 시대였기에 영업사원이 깜깜무소식으로 잠적해 버리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 팀에서 떠안게 되었으니 상당히 리스크가 큰 비즈니스였다.

팀장들은 영업사원관리에 무던히도 애를 먹었다.


게다가 신제품인 제3세대 항균제나 주사제를 포함해서 제법 단가가 높은 제품도 있었고 회사에서는 적잖은 판촉비를 책정하였으니 영업현장에서 제품의 특장점을 강조하는 경우보다 어떻게 적절한 판촉비를 활용하느냐는 노하우를 지닌 사원들이 승승장구하는 상황이었다.

대형종합병원 담당자들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약품이 환자에게 도달하기까지는 반드시 처방을 내리는 의사의 손을 거쳐야 하는데, 영업사원들은 주거래병원의 의사들을 Key Dr.로 칭하며 당연히 그들과 친해져야만 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접근을 통하여 관계를 맺어나갔다.


매개체로 활용된 것들에는 골프나 바둑, 낚시, 등산과 같은 취미 맞추기부터 술접대와 같은 향응도 있었고, 생일선물이나 승진 선물과 같은 물량공세(당시엔 양주나 양담배도 귀한 선물 중 하나였다.)에 병원과 집의 이삿짐 나르기 도와주기, 쇼핑 심부름, 공항 픽업, 야간방문, 처방해 준 대가로 현물공세까지 퍼부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심심찮게 뒷돈을 받은 유명 교수들이 언론에 등장하거나 기업의 영업본부장이 구속되는 일도 발생했던 시절이었다.

가끔 의학적 정보가 담긴 해외논문이나 국제저널을 요구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시대상황에서 쉽게 구해지는 문헌들이 아니었다. 종로서적이나 교보문고를 뒤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물론 팸플릿을 외우다시피 제품을 꿰뚫고 있는 사원들도 있었는데, 현장에서 그 지식을 활용하는 것은 대부분 학술부 약사들의 전담 몫이었다.


당시 마케팅 부서의 제품담당자들을 PM(Product Manager)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주로 마케팅 경비를 어떻게 유효 적절히 영업 현장에 배분하느냐가 중요 이슈였으며, 제품의 콘셉트를 정하고 라이선스인 제품을 학회에서 소개하거나 개발에 참여한 해외 교수들을 초대하여 강연회를 갖거나 제품설명회를 주도하는 등의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다만 당시의 P로서는 PM의 업무를 직접 접하기는 어려웠고, 그런 조직이 있다는 정보만 들었을 뿐이었다.


회사 바깥은 6.29 선언에 넥타이부대의 행진,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시국이었고, 민주화를 외치는 소용돌이 속에 세상이 시끄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P는, 낮에는 영업현장에 점점 길들여져 가면서, 퇴근 후에는 종로의 시사어학원에 출석하여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외워야 하는 바쁜 신세였다.


가을이면 일본 연수를 떠나야 했기에 최초로 여권을 만들고 기술연수로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했다.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남산에 위치한 모처에 가서 4시간 동안 반공방첩 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여하튼 유능한 영업사원들은 어떻게 해서든 Key Dr. 의 마음을 사야 했으며 그 마음에 들기 위한 노력이 곧 능력치였고, 그 능력은 곧 인센티브로 연결되어 기본급 이외의 수입을 창출하거나 더 나은 거래선 배정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영업사원들은 매출목표(타깃)를 맞추느라 애를 먹었고, 실적이 따라주지 않으면 영업부의 꽃인 종병부에서 개인병원부나 약국담당자로 밀려나기도 하였다.


병원이나 도매상을 상대할 때에는 할증이나 할인의 방법도 동원되었는데, 100개를 사면 10개를 덤으로 더 얹어주고 100개의 값으로 처리하거나, 100원어치를 사면 90원으로 깎아주는 방법도 횡행했다. 이른바 관행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P와 같은 디테일맨은 당연히 파트너사 영업부의 환영을 받지 못했으며 그는 거추장스럽고 어정쩡한 동반자가 되어야만 했다.


P는 그 나름대로 친화력을 발휘하여 파트너사 선배들을 따라서 사우나에 가기도 하거나 영화관에도 갔었고, 근교의 닭볶음탕을 먹는데 끼워주면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하루 일당을 걸고 고스톱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병원 방문 후의 일보를 쓰는 것이 불문율이었는데, 본래는 합작한 본사의 제품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파트너사의 제품을 영업하는 경우에 동반출장하는 경우가 빈번하였기에, 늘 고민하면서 소설을 쓰듯이 일보를 메꿔야만 했다.


어쩌다 시장조사를 위해 병원 약사들을 만나서 경쟁품을 파악하는 날이면 일보가 풍성해져서 뿌듯하기도 하였다.


어떤 날은 제품 팸플릿에 봉투를 넣어서 영업사원을 대신하여 배달심부름을 한 경우도 있었는데, 약속한 액수보다 적다는 상대방의 불만에 대하여 전후좌우도 모르는데 무조건 미안하다며 대신 고개를 숙이고 나서 보고하면, 말없이 담배만 물고 구두 끝만 응시하던 파트너사의 선배를 마주해야만 했다.

어색한 침묵이 지나가자 그 선배는 담배 한 개비를 권하며 침을 탁 뱉고 영업 못 해 먹겠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35년도 더 지난 옛날이야기를 지금에 와서 끄집어내는 이유는, 거래와 장사로 점철된 그 당시의 영업실태가 상당히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겪고 귀사 한 날이면 동기들을 불러 모아 술 한잔씩 나누며 앞으로 지낼 자신들의 앞날이 결코 밝지는 않을 것임을 짐작하고 한숨을 내쉬곤 하였다.


그해 여름에 일본 연수에서 돌아온 선배와 비슷한 시기에 부임한 일본인 마케팅 과장의 주도로 파트너사의 영업방식을 탈피한 혁신적인 영업과 마케팅 기법을 처음 들으면서, 한 번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된다.


물론 주 고객인 Key Dr. 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영업 방식은 존속하였으나 정확한 시장조사를 바탕으로, 보다 학술적이고 아카데믹한 접근을 통하여 고객들에게 진실된 의약품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점점 바꾸어 나가게끔 변모해 갔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어쨌든 80년대 후반의 영업은 시장을 뺏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었고 실탄대신 물건과 금전을 장전한 전쟁이었다.

낮에는 일터로 밤에는 술집으로 몸을 던져야만 했다.

P는 입사하자마자 경험했던 영업 현장의 귀중한 경험을 통해 일생일대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는 과연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부조화스러운 영업현장을 바꿔나갈 것인가, 아니면 마케팅 기법을 활용하여 영업 스타일을 바꿔나갈 것인가, 늘 고민하였다.


현장 경험을 쌓아가며 미래를 걱정해야 했던 P는 다가올 연수과정에서 과연 무엇을 배우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난감해하며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해외연수 1년의 달콤한 과실을 노린 것은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점점 자신감이 흐려져갔다.


하지만 100명의 영업사원은 100가지의 영업 스타일을 창출한다고 하듯이, P는 P 나름대로 남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할 목표가 분명해졌고 그것은 확신을 갖고 덤벼야 할 어떤 모티브가 필요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P가 겪은 신입사원 시절 경험은 짧지만 강력한 임팩트를 발휘하였으며, 그가 본인 성격과 맞지도 않는 일들을 겪었던 이 시기에 퇴사하지 않고 버틴 이유는 순전히 호기심과 탐구심, 그리고 입사하자마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당뇨병 합병증에 기인한 뇌경색으로 이른 나이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는데, 제대로 된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이 사건은 P에게 있어서 의약품에 대한 경외감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질병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약품이 장사의 수단이 아닌 인명을 좌지우지하는 정보의 집합체임을 올바르게 알리고야 말겠다는 동기부여의 깨우침이 되었다.


P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연수를 고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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