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는 의료사업부를 맡아 매일매일 바쁘게 지내다 입사 14년 4개월 만에 등기이사로 위촉되었다. 모든 직장인의 꿈을 한 가지는 이룬 것인데 계약직으로 바뀐 것이 반드시 더 좋은 것이었는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사원으로서 적립된 퇴직금을 정산하여 받으며 이제는 직원이 아님을 실감하였다.
회사에서 전용 차를 사주었고, 넓어진 책상과 가죽 의자, 옷걸이, 책장 겸 캐비닛이 배치된 칸막이 공간을 사무실 코너에 배치해 주었다. 오너가 챙긴 인사발령이었는데 직원들 보기에 부끄럽기도 했고 자랑스럽기도 했던복잡한 심정이었다.
임원의 무게를 견뎌가며, 그룹사 직속인 국제사업부에 배속되어 의료기기의 글로벌 전개에 매진하던 중이던 2002년 3월, 난생처음 중국 땅을 밟게 되었다. 본사에서는 중국을 키우고자 거대한 프로젝트에 막 발동을 걸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P는 국제사업부를 이끌던 부회장, 2명의 핵심 요원과 동행하였다.
처음 본 중국은 P가 막연히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일단 너무 크고 넓었다. 길거리는 인산인해요, 도로는 자전거의 물결로 꽉 차 있었다. 건물은 서울의 두세 배 크기는 되어 보였고 20층 이상의 고층 빌딩이 즐비하였다. 길거리 곳곳에 붉은색 오성홍기가 펄럭였으며 공터에는 노인들이 모여 태극권이나 기체조를 하고 있었다.
맑은 하늘은 보기 어렵고, 희뿌연 스모그와 황사, 미세먼지 투성이었다. 딱 호흡기질환에 걸리기 알맞은 공기의 질이었다. 붉은 태양을 보며 파란 하늘이 일상이던 서울의 경관을 중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샤워를 해도 깨끗해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P가 보았던 것은 넓은 길, 엄청나게 큰 건물, 질 나쁜 공기, 길바닥을 가득 매운 자전거와 그 자전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었다. 인산인해란 사자성어는 딱 중국을 표현한 말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차가 와서 경적을 울려도 사람들은 유유자적 자기 길을 갔으며 아예 횡단보도나 인도가 없는 도로도 많았다. 운전기사가 빵빵거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것이 만만디 근성인가? 유교의 본향인 중국에서 예의범절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호텔창문부터 바라봤지만 먼지가 섞인 공기가 우울하게 만들었고, 공기정화와 가뭄을 이겨내려고 가끔 로켓을 쏘아 올려 인공 강우로 조절하는 나라였다. 처음 본 북경과 상해의 이미지는 그저 '크다, 넓다, 많다'였다. 이렇게 큰 나라에 한국의 30배나 되는 인구가 살고 있고, 92%를 차지하는 한족을 비롯해 55개의 소수민족이 더불어 산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나의 중국이었지만 다민족의 연방국가나 다름없었다.
가운데 中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임을 자부하는 의미였고, 뿌리 깊은 중화사상이 박혀있었다. 그 많은 성(省) 중에는 대한민국보다 더 큰 성도 많았으니, 그들이 우리를 변방의 작은 나라로 인식했어도 할 말이 없었다.
낮에는 병원을 방문하였고 서로의 회사를 소개하는 브리핑과 공장견학이 이어졌다. 밤에는 50도가 넘는 백주(白酒)와 수많은 요리의 환대에 파묻혔고, 인사불성이 되어 호텔 방에 쓰러졌다.
P 일행의 방문에 이은 화답으로 중국 쪽 파견단이 서울로 연수를 왔다. 이번에는 폭탄주로 앙갚음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P는 중국지사장으로 발령이 났다. 임원이 되고 9개월 뒤의 일이었다. 모든 것은 오너의 각본대로 움직였다.
처음 부임한 중국 지사는 천진에 본사와 공장을 두고 있었다. 본사 건물은 100년도 넘은 러시아 풍 목조건물이었다. 2층 총경리실을 집무실로 사용했고 바로 옆에는 내근부서가 모여 있었다. 그 옆에는 8칸의 샤워실이 있어서, 점심을 일찍 해결한 여직원들이 세숫대야를 들고 들락날락거렸다. 아마도 수돗물이 부족한 시절이라 샤워보다는 빨래를 하거나 머리를 감았던 모양이다. 물기를 머금거나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복도를 걸어가는 여직원들을 보고 당황하여 외면하기도 하였다. 그네들은 수치심도 없어 보였다.
회사에서는 P를 위해 3성급 호텔 스위트룸을 제공하였다. 국영호텔이었기에 통제와 보안이 엄격했고 P와 일본인 부총경리 부부 이외의 외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엷은 미소를 보여주는 호텔 직원을 보며, 덜 세련되었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있다고 느꼈다.
P는 단신부임이었기에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중국어를 원활히 구사하지 못한 시절이었기에 손짓 발짓 그리고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물론 표정도 소통에 한몫을 했겠지만, 미소를 짓거나 웃으면서 P가 말했던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는, 어느 외국인이 뭔가 소리를 지르고 과장된 몸짓과 흥분된 말투로 화를 내며 호통치는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완장을 차거나 제복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선글라스 너머로 관찰하고 있을 듯한 번뜩이는 눈동자. P는 북한의 5호 담당제 이상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하루하루 고단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P는 일본 본사에서 파견된 한국인으로서 중국 지사장으로 부임했기에 중국 직원들이 P를 볼 때는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였다. 어째서 본사인 일본에서 파견한 사람인데 일본인이 아닌가 말이다. 자기들이 소국(小國)이라 여기는 일본보다 더 작은 한국의 지사에서 높은 사람이 왔단 말인가? 그들에게는 수수께끼였고 P 자신도 본인의 부임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를 썼다.
처음 부임한 날은 첫인사를 하고 간부들과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구내식당으로 안내된 P는 생전 처음 보는 현지의 반찬과 국을 맞이하며 먹고살아갈 앞날이 걱정되었다. 그들은 식성도 좋아 보여서 일반 한국인이 먹는 두 배의 밥그릇을 깨끗이 비워냈지만 P는 절반을 먹기도 힘들었다. 대신 물가는 한국의 절반을 훨씬 밑돌았다.
의식주가 기본인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의(衣)는 한국에서 가져간 옷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주(住)는 회사에서 제공한 호텔방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식(食)은 현지에서 끼니마다 해결해야 했다. 호텔방에는 식수가 따로 없었고, 물도 사서 마셔야 했다. 호텔 수도꼭지를 틀면 가끔 황토물이 나오기도 해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방에서 잠을 자다 보면 천장에서 놀고 있는 바퀴벌레 가족들을 구경하기 일쑤였다.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맛보기 어려운 환경이다 보니, 늘 지지고 볶고 데치고 끓이는 요리들이 많았다. 당연히 바퀴벌레의 천국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넓은 나라의 음식물 보존법은 우리와 많이 달랐나 보다. 소금도 암염이 사용되었고 냉장고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시원한 맥주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지역명을 딴 유명 맥주는 미지근한 보리차 느낌이었다.
길거리는 비포장도로가 많았고 도로 위에는 사람들이 뱉은 침들로 얼룩져, 검은색 도로와 하얀색으로 말라붙은 침이 어우러져 기묘한 점묘화를 그려냈다. 자전거 부대들은 횡단보도가 없는 곳을 자기들만의 길로 만들었다. 횡단보도가 있다 해도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P는 길을 건널 때마다 일반 중국인들 틈에 끼어서 건너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음을 일찍 깨달았다.
P가 보기에는 무질서 속의 조화였다. 2000년대 초반 중국의 모습은 길거리에 수많은 인파와 자전거, 자동차의 경적 소리, 회색빛 하늘, 가끔 내리는 인공비, 황사에 찌든 얼굴, 모택동 제복, 한여름에 웃통 벗고 다니는 아저씨, 늦가을부터 내복을 패션처럼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니는 일가족, 한 달에 한두 번 머리를 감을 정도의 떡진 헤어스타일, 양복 한 벌로 사계절을 지내고 구겨진 남방 하나로 때우는 직장인들..., 셔츠에 바지 하나면 직장인의 버젓한 패션이 되는 모습을 보며, 아직도 많이 낙후되어 있구나!라고 느꼈다.
그런 중국인들 속에서 깔끔을 추구했던 P는 과연 군계일학이었을까? 아니면 군계일오(烏는 까마귀) 였을까? 손가락이 여섯 개 있는 섬에서는 다섯 개인 사람이 비정상이듯, 깔끔하지도 않고 갖추지 않는 모습으로 사는 나라에서 아침부터 매일 머리를 감고 로션을 바르고 의관을 정제하며 넥타이를 차고 구두를 신고 시계를 차고 가방을 들고 노트북을 들고 출근하는 P의 모습은 직원들에게 상당한 이질감을 주었을 것이다. 아니 위화감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급 공산당 간부들은 P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다. 중국을 이끌고 가는 공산당원들은 P가 한국에서 주입식 교육과 선입견으로만 생각했던 무지막지한 짐승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이 엘리트로 추앙받고 있는 세련된 집단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공부를 많이 하여 지식을 쌓고 철저한 사상으로 무장된 엘리트 집단인 공산당원은 나름대로 좋은 옷을 입고 멋도 내고 최첨단 기기에도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일반 중국 인민에게는 흠모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직원들 중에도 월급에서 당비를 부담하는 공산당원이 있었다. 공산당원이 되면 급여에서 일정 부분 당원비를 갹출당하였다. 돈이 나가는 게 싫어서 공산당원을 안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은 돈이냐 명분이냐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모든 직원이 공산당원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입당 절차가 있었다. 시험을 보고 면접을 거쳐서 선발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정식 당원이 될 수 있다고 들었다. 일반 중국 직원이 공산당원이 되는 것은 희망과 꿈처럼 보였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학력 소유자에 품행이 방정한 사람, 모택동 사상을 줄줄 꿰고 있는 두뇌명석하고 용모 단정한 사람으로서 장차 국가를 이끌어 나갈 재목으로 쓰일 사람만이 공산당원 후보 자격이 있다고 들었다.
회사에는 공산당을 대변하는 공회(工會)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노조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나라 예비군 중대장처럼 군대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거나 관료를 지낸 사람에게 예우를 갖춰 로비의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노회(老獪)한 공산당원이 공회를 맡고 있었다. 공회에서는 회비를 주무르며 적절한 시기에 여흥과 복리를 제공하고 공산당을 선전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념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이라는 단어보다 중공이라는 국가명이 훨씬 익숙했던 당시, 그들은 P에게 남조선에서 왔느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북조선, 남조선이 일반화된 단어였다. 우리 수도인 서울도 흔히 한성(漢城)으로 불렸다. 우리의 북한, 남한(한국)이란 단어는 그들에게 생소한 것처럼 보였다.
나이 든 노인들 중에는 한국전쟁에서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했다던가 가족이 전사했었다는 말을 화제로 삼기도 했다. P에게 한성은 어떤 곳이냐는 질문을 많이 퍼부어댔는데, 한성이 서울을 의미하는 옛날 표현인 것을 알고서 한성이 아니라 서울이라고 몇 번이나 어필하였다. 하지만, "아, 서울이 한성이지 뭐!"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일본인 회사에서 파견된 한국인이 중국의 커다란 법인을 담당한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기해하였고 일거수일투족이 관심 대상이었다.
당시 P는 본사가 글로벌화하기 시작하면서 아시아의 중추적 기지 역할을 한국에서 중국으로 점차 이동해 가는 진행과정 속에서 선택된 피조물이었다. 일본인들이 가기에는 중국이 험지로 여겨졌나 보다. 자기들의 DNA를 심어놓은 한국인을 잘 양성하여, 그 DNA를 중국에 잘 이식시키면 자기들이 부리기 좋을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긍정적인 면으로 보면 글로벌한 인적 교류의 상징이자 시발점이 될 수 있는 터닝포인트였다.
P는 일본에서도 주목받는 입장에 서있었고, 800명이 넘는 직원으로 구성된 중국 직장에서도 판다곰처럼 관심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4인 가족이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한 자녀가 보통이었던 그들 눈에 1남 1녀의 아버지인 P는 당연히 질시의 대상이었다
P가 부임한 중국법인은 합영법을 따르고 있었다. 지방의 시 행정부와 공기업에서 50%를 출자한 회사였는데, 나머지 50%는 일본 본사에서 출자한 합영기업이었다. P가 몸담은 회사는 중일 수교 후 제약기업으로는 첫 번째로 진출한 해외 기업이었다. 그러므로 일본 경영진과 중국 경영진은 1년에 수차례씩 업무 조율을 위한 공식회의를 가졌다. 그들은 그것을 상무(常務)회의라 불렀다.
상무회의에서는 그때그때의 주요 현안들이 논의되었다. 50대 50의 자본비율의 단점이 부각되어 늘 자국의 주장을 관통시키려 말다툼을 일삼기 일쑤였다. P의 눈앞에서 중국인 책임자가 만년필 촉을 일본 책임자의 눈에 겨누는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일본인 책임자가 흥분하여 책상을 주먹으로 치는 모습은 흔한 회의풍경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멸시하거나 무시하고, 질시하였다.
그 틈바구니에 끼인 젊은 한국인 경영자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만 끔벅끔벅 뜨고서 귀는 통역에 의지한 채, 머릿속으로는 빨리 이 회의가 끝나서 담배라도 피우러 나가야지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회의 내용은 중국어를 일어로 통역하는 직원을 통해서 일어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당시 P가 담당한 치료약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그들이 예전부터 취급해 오던 수액제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축이었다. 다시 말해서 수액제를 전문으로 파는 회사에, 앞으로는 치료약을 보급시키러 파견된 사람이 P였다.
수액제만 팔던 회사에 치료약을 도입하려면 생산설비를 새로 갖춰야 하고, 공장직원 육성, 영업조직 구성, 전 직원 교육, 경영 틀 변화 등, 산적한 난제가 수북하였다. 매일매일 세숫대야만 한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를 보면 저절로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40대 초반의 젊음과 깡으로 버텨내었다.
때마침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과 일본은 승승장구하고 중국은 어부지리로 올라간 예선에서 탈락한 상황이었다. 가는 곳마다 인구도 적은 작은 나라 한국이 왜 그리 축구를 잘하느냐, 그렇게 축구를 잘하니 중국의 독주인 빼갈(白酒)도 잘 마실 거 아니냐며 술을 부추겨댔다. 자기들은 손톱만 한 잔에 마시는 52도 독주인 우량예(五糧液)를, P에게는 맥주 컵이 철철 넘칠 정도로 부어 주면서 원샷을 요구하였다.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P였지만 도수 높은 독주를 한 번에 들이켜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판단했기에 손사래를 치며 당신들과 똑같이 마시겠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건 안 된다, 축구를 잘하는 민족인데 이런 독주도 쉽게 잘 마실 거 아니냐, 우리 중국은 예선에서 탈락했다, 한국은 16강, 8강을 넘어 4강에도 올라가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들 서너 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강한 민족이므로 술에 있어서도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 단숨에 들이켜라'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먹거리며 술 세례를 퍼부어댔다.
이렇게 독주에 길들여져 가던 P는 가끔 호기롭게 맥주컵 석 잔 정도를 연거푸 원샷으로 마셔댔다. 선천적으로 지기 싫었던 성격에 오기가 발동한 것이었다. 52도 독주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며 위장을 태우다 역겨움이 올라오기도 하였다.
한 번은 빈 속에 급히 석 잔을 비우고 화장실에서 나오다 그 자리에서 기절한 적도 있었다. 직원들 등에 실려 질질 끌려서 호텔 방에 돌아간 적도 있었고, 깨어 보니 응급실에 누워있었던 적도 있었다.
독주로 타버린 위장은 사나흘 간 아무런 음식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한국의 해장국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해장국이 그리운 날엔 컵라면을 아껴먹으며 쓰린 속을 달래야 했다. 해외에서 성공한 직장인, 아니 경영인으로 모범을 보이려 중국에 부임하였지만, 그 모범을 보이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이 롤모델인지도 판단하기도 어려웠다. 선구자가 되어 우수한 경영능력과 마케팅 능력을 이식하러 간 P가 오히려 토착세력인 중국 직원들에게 세뇌를 당해갔다. '당신이 아무리 떠들어봐야 세상이 바뀌는 것은 없다, 그저 우리랑 맛있는 요리나 먹고 고급술에 비싼 담배나 피우면서 행복하게 잘 살아 보자'라는 식의 회유가 난무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합영법으로 만들어진 50대 50의 회사에 버젓이 중국 측 몫으로 공회가 있었다. 이 공회의 회장은 경영에 간섭은 안 해도 저녁식사 자리에는 꼭 참석하여 앞장서서 P에게 술을 권하였다. 물론 P는 그의 위세에 굴복하기 싫었지만 주변인들은 권주가를 불러대며 '마셔라! 마셔라!'를 외쳐댔다. P가 빨리 쓰러지기만을 고대하는 듯하였다. 잔인한 천진(天津)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직원들 중에 상당수는 약대나 의대출신이었는데, 중국에서 유명한 약대는 선양(瀋陽)약대와 난징(南京)약대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 출신 약사들은 대학을 졸업할 때 일정 수준의 외국어를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이 안 될 정도로 어학교육을 시켰다. 특이하게도 선양약대는 일본어, 난징약대는 영어를 교육하였다. 이 명문 약대를 졸업한 약사들은 약학 지식 이외에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수준 높은 엘리트들이었다. 단순히 외국어를 습득해서 졸업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평가기준을 넘어야만 졸업할 수 있었다. 급수가 있어서 4급은 보통, 6급이면 잘하는 편, 8급이면 외국어 능통자였다. P의 직장에는 6급이나 8급도 더러 있을 만큼 수준 높은 직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의사소통은 영어, 일어, 중국어, 때로는 조선족을 활용한 한국어로 가능했다.
P가 몸담은 회사에서 수액제를 담당하는 총경리는 선양약대 출신이었는데 거의 P 수준의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나이도 P와 비슷하여 친구처럼 지냈는데 중국인인 그와 한국인인 P는 일본어로 의사소통하였고, 그 소통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때론 통역 담당 비서를 재껴 두고 둘이서 은밀하게 회사의 경영전략과 인사문제, 중국 의약품 시장 동향, 일본의 정책, 한국과 중국의문화차이를 섞은 대화를 농담도 해가면서 열변을 토하였다.그런데 그가 일본 측과 상무회의를 할 때에는 절대로 일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중국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또 혹시라도 뜻이 와전될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함이었다. 엘리트인 중국 총경리는 30대 후반에 사장 자리에 오른 사람으로서 매우 똑똑하였으며 판단력도 우수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 역시 공산당원이었다.
회사 내에 제이인자가 있었다. 그는 P와 함께 치료약의 마케팅 도입에 앞장선 사람이었지만 이 사람이 총경리 후보로 올라갔을 때 결정적으로 되지 못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그가 훨씬 더 일본어를 잘하고 인품도 좋았지만 공산당원이 아니었기에 총경리가 못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늦은 나이에도 공산당원의 길을 선택하여 흔쾌히 당비를 내가면서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아마도 훗날 P가 다져놓은 초석을 딛고 일어서 자기가 치료약 회사의 총경리가 될 꿈을 꾸고 있었을지 몰랐다.
매일매일 직원들과 설득과 윽박, 고함을 질러가며, '치료약은 이런 것이고 학술적인 마케팅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케팅이라는 단어에 친숙해져야 한다, 마케팅은 단순한 학술이 아니고 우리가 시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그러면 직원들은, P가 말하는 시장과 마케팅의 의미에 대해서 의구심을 표현하였다. 계획경제를 학습한 그들에게는 생경한 내용이었다. 우수한 약사를 중심축으로 세워 조직한 마케팅 직원들은, 학술적인 일만 다 하면 된다라는 단순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매일매일 그들을 교육시켜서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은 P의 고된 일과 중 하나였다.
부임 초기에 도요타 자동차에서 일본인 임원의 비서로 근무한 사람을 통역 겸 비서로 채용하였다. 이 비서는 가끔 중국 직원들에게 통역할 때, 긍정어와 부정어를 혼동하였다. P가 '절대로 하지 말라'라고 하는 것을 '하라'고 통역한다던가, '하라'고 지시한 것을 '하지 말라'라고 통역하였다. 통번역을 잘못하여 커다란 혼란과 소동을 야기하기 일쑤였고, 한번 꾸중을 하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무단결근을 반복하였다.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하루빨리 중국어를 깨우치지 못하면 바보가 되는구나,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P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어학원에 다닐 만큼 여유 있는 생활이 아니었다.
한번 출장을 가면 16박 17일 일정으로 중국의 절반 정도를 돌아봐야 하는 고된 일과였다. 긴 일정임에도 동반한 중국 직원들은 단출한 가방에 작은 캐리어 하나만 가지고 다녔다. 아마도 수시로 셔츠와 속옷을 빨아 입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당시 중국은 전기와 수도 사정이 좋지 않았고 선불제였다. 인터넷은 특정한 사람들이나 이용하였지만 차단과 검열이 엄격하여 구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북경에서 출발하여 상해를 거쳐 광주(廣州)까지 가다 보면, 드넓은 중국을 날아가는 국내선에서 밑을 보게 된다. 중국 국내선은 한국과 일본 구간의 국제선보다 더 길게 타야만 도착한다는 현실 앞에서 겸손해져야 했다.
상해에 가면 상해어가 따로 있었고 광주에 가면 광둥어가 따로 있었다. 물론 북경 보통어인 표준어로 대화를 하였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자신들이 불리하거나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해야 될 때는 그 지역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럴 때면 북경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몰랐다.
어느 날, 상해의 유명 의과대학 교수 앞에서 임상 프로토콜을 논의하고 있었다. 갑자기 연구에 중요한 내용이 언급되자 그 교수와 상해지역 책임자가 서로 상해어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뭔가 결론을 내리는 분위기였다. 그것은 은어도 속어도 아닌 정당한 언어였는데 눈앞에서 벌건 대낮에 코를 베어가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P는 그런 상황에서 사기를 당하였다. 상해 책임자와 같이 동석한 마케팅부장을 문책하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잡아떼었다. 영수증을 비롯한 증거가 부족하였기에 사실을 규명하기 쉽지 않은 상황도 빈번했다.
중국에 얽힌 에피소드는 낮과 밤이 너무나 다른 주변 환경에 의해 상상이상으로 다양했다. 직장과 그 바깥, 공산당과 비공산당, 북경과 상해, 그리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큰 격차와 이질적인 요소로 점철되어 있었다. 깜짝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급 외제차가 지나가는 도로 옆으로 폐수가 흐르던 하천이 말라붙어 녹슨 푸른색으로 썩어 있었다. 그 옆에서 한가로이 손으로 밥을 떠서 먹는 어린이들과 담배를 입에 문 채 밭을 갈고 있는 농민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곳이었다. 무엇이든 존재하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 흔하였다.
이러한 중국에서 P는 혈혈단신 개혁에 앞장서고, 혁신적인 의약품을 도입하러 직원들을 교화시켜 가며, 새로운 치료약시장을 구축하여야 했다. 또 거기에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작업을 수년 내에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연목구어와 같았다.
P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열혈남아였다.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해 열과 성을 다하여 중국에 도전하여 승부를 내보자라는 일념으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하였다. 그러나 매일매일 P의 뜻을 가로막는 언행과 정책, 다리를 붙잡는 사람들로 인하여, 대나무 숲에 갇혀있는 외로운 판다곰 신세가 되어갔다.
부임한 지 석 달이 지나자 가족들이 합류하여 호텔을 떠나 중국인들이 사는 아파트에 입주하였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와 충격으로 가족들은 매일 깜짝 놀란 스토리를 식사 자리에서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놀랄만한 일이라 할지라도 중국인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거나 자유로운 문화였다. 우리 눈으로 본 중국과, 중국인들의 눈으로 본 우리는 또 다른 별개의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2002년 여름, 가족들이 입국하여 심적 안정을 찾기 시작한 P는 자유로이 출장을 다녔고, 술에 버티고 담배를 이겨내며 중국인 친구를 만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업무를 파악해 나가면서 틈틈이 자주 사용되는 용어를 익혀갔다. 지금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조금씩이나마 알아듣기 시작하였다. 세상에 노력 없이 되는 일은 없었다. 틈나는 대로 중국 노래를 흥얼거리며 북경 표준어와 친해지려고 밤낮없이 중얼거렸다.
노래는 만국 공통의 소통수단이었다. 중국어 특유의 사성(四聲)을 지키지 않아도 부를 수 있는 노래는, 군가나 국가 찬양가만 빼면 대만이나 홍콩의 유행가도 많았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노래방에 직원들과 같이 다녀보았다. 성조에 약했던 P가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노래를 통한 방법이 제일 수월하였다.
수없는 연회 자리에서 숟가락을 거꾸로 들고 노래를 불러 젖히면 중국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아가며, '너는 중국이 좋으냐 한국이 좋으냐?'는 우스갯질문을 받았다. 그럴 때면 '아, 당연히 중국이 좋지요, 그러니 이렇게 중국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 정말 좋아요!'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환심을 사기 바빴다. 어느새 P도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었다.
북경은 정치의 도시요, 상해는 경제의 중심지였지만서로 앙숙관계였다. 북경 사람들은 상해의 얍삽함을 비난하였고 상해 사람들은 정치에만 매달리는 북경을 낙후된 도시로 폄하하였다. P가 보기엔 둘 다 괜찮은 대도시여서, 한국에서 영남과 호남, 일본에서 관동과 관서지역의 지역 다툼 정도로만 치부하였다.
노래와 음주를 통해서 친해지기 시작한 중국 친구들은 또 다른 노래를 가르쳐 주고 또 중국어를 가르쳐 주었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종화사상과 문화, 오래된 역사를 전해주면서 P와 친해지려고 접근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다행히 중국인들과 친숙해지기 쉬운 성품이었나 보다.
하루하루 도도한 황하는 흘러갔다. P가 노력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천하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백년하청(百年河淸)인 이 나라에서 P가 부단한노력을 배가하여삼 년 안에 조직을 바꾸려면 급진적인 드라이브를 걸어야 했다.
P가 일으키고자 하는 변화가 중국인들의 환영을 받거나 열렬히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경영자가 떠들어대는 '변화'란 단어를 받아들일 때 겉으로는 수긍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저 녀석 혼자 무얼 하겠어?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가 편해'라는 의식의 격차를 갖게 했을지도 모른다.
회고해 보건대 의료보험 제도도 없었던 중국이었다. 품질 좋고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의약품을 제공하며, '훌륭한 치료약이니 꼭 써보세요' 권유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 치기와 같았다.
어느 날 P는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해 보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20개비 이상의 담배를 피워가며 도대체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루하루가 쌓여서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3년, 5년의 세월이 되겠지만, 변화를 혼자서 주도하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P는 결국 우군이 필요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고 단 한 명이라도 P의 뜻을 따라 줄 동지를 찾아 헤매기 시작하였다. 직원들 중에는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또 일본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또 자기가 사용하는 영어를 테스트해 보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한국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도 제법 생기기 시작했던 시절이었다. 한국의 가전제품이나 핸드폰에 관심을 표명한 직원들은 그 당시 유행하던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면서 한국에 대한 질문을 많이 퍼부었다. 친한(親韓)적인 요소와, 언어나 문화를 통한 접근법이 우선 살아나갈 타개책이라 생각하였다. 딱딱한 마케팅 용어 해설이나 경영의 레토릭보다 살갑게 그들과 웃고 즐길 수 있는 스킨십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 만들기, 한국문화 전수하기, 일본의 브랜드 파워 전수하기, 등등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씩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광저우로, 난징으로, 선양으로 하늘을 날고 대륙횡단기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황량한 들판을 쳐다보았다. 5월이 되어도 신록이 보이지 않는 들판, 숲은 보이지 않고 푸른 산도 아예 없는 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외롭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은 국토의 7할 정도가 산이기에 어려서부터 산을 보며 자라고 또 산이 있으면 심리적 안도감을 갖는다. 하지만 중국에서 짙푸른 녹음과 맑은 공기의 산에 오른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었다. 물론 그런 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집 근처에서는 멀었고, 그럴만한 시간과 여유도 없었다.
이 넓은 땅을 도대체 그 옛날 진시황이나 당태종 같은 군주들은 어떻게 통치를 하였는지, 한번 더 삼국지와 수호지를 복기해 보았다. 손자병법도 읽어 보면서 중국에서 살아나갈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랬다! 아직 중국은 거대한 황무지였다. 이 황야가 옥토로 바뀌는 날, 전 세계가 들썩거릴 것이다. 미국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중국 밖에 없을 것이다.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인 중국을 공산당 하나로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스로 자문자답해가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나날이 흘러갔다.
실적에 짓눌린 월말이면 새벽에 깨어 담배를 세대씩이나 피우며, 중국은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나라이고 무서운 나라이며 내겐 벅찬 나라이다, 하지만 속을 파헤쳐보면 재밌는 나라이고, 복잡하지만 멋진 부분도 있다는 상념에 빠지기도 하였다.
한 단면을 보고 그 나라를 평하긴 어렵지만 P가 겪어 본 기업환경을 통해서, 또 구성원을 통해서, 의약품을 통해서, 병원을 통해서, 또 중국에 살고 있는 한인사회와 그들의 삶을 통해서, 또 중국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통해서 P가 깨달은 중국이란 나라는, 숫자로 셀 수 없는 각양각색의 모습이 맞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신기했으며, 좋은 경험이 되었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중국의 하루하루가 흐르고 또 지나갔다.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황하(黃河)라고 하지만, 1년이 지나가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할 거라는 강한 믿음만큼은 가슴속에 꼭 품고 있었다. P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짧고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학술에서 마케팅으로, 장사에서 비즈니스로, 돈에서 물건으로!
물건이나 사람을 중요시 여기며 제품에 혼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치료약이 우리의 미래이니 과감히 도전하자! 외쳐댔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가 좋아하는 등려군(덩리쥔)의 노래 月亮代表我的心(월량대표아적심: 위예량따이삐야오워더신)과 甛密密(첨밀밀: 티엔미미)을 흥얼거리면서,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해서 전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우정을 노래하는 朋友(붕우: 펑요우)를 부르면 외롭지 않다고 느꼈다.
그에게는 막 가까워지기 시작한 중국인 직원들이 있었고, 한국에서 같이 근무했던 회사의 동료들이 있었으며, 본사에서 지지해 주는 막역한 친구 그룹도 있었다.
더 큰 역경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가족들의 응원으로 극복해 나갔다. 아내와 아이들은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한국에서 아버지와 장모님이 응원하러 오셨고, 그들과 영하 20도를 같이 경험하였으며 섭씨 40도를 함께 견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