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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Feb 24. 2024

강남역 미아 3장 2화

해외지사-2

   P가 경험했던 중국 생활은 천진에서 단신부임으로 살았던 3개월, 가족들이 합류하여 북경에서 아시안게임 선수촌 아파트에서 살았던 1년, 북경 중심가 외국인 타운에서 살았던 또 1년의 기간, 그리고 치료약 전문회사를 만들어 상해로 옮긴 후 푸동지역에 살았던 수개월의 기간이었다. 특히 P가 혼자서 생활하였던 천진에서 첫 석 달 동안의 경험은 상당히 잊지 못할 인상적인 문화충격의 기간이었다.


   그가 중국에서 맞닥뜨린 가장 큰 충격적인 경험은 화장실 문화였다. P가 부임한 중국 회사 건물은 백 년도 넘은 2층 목조건물이었는데, 한 층에 하나씩 화장실이 있었다. 1층에 있던 화장실은 당시 중국에서 귀한 좌식이었지만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인상을 찌푸려야 했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기억이 많았다. 화장실 문을 열면 화장지가 휴지통에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 물에 적셔져 있었으며, 변기는 막혀 있기 일쑤였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던 2층에 있는 화장실은 재래식으로 주저앉아 용변을 보는 곳이었는데, 문틈이 벌어져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엿보이는 곳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화장지 도난 사건이 발생하여 총무부는 화장지를 교체해 주느라 야단법석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크리XX 티슈와 같은 부드러운 화장지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지체 높은 여직원들이나 개인적으로 갖고 다니며 사용할 정도로 귀했다.


   일반적인 화장지는 질이 나쁜 누런색 폐지를 재활용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얇았고, 직원들은 손으로 열 번을 말아서 두툼하게 사용한다는 말도 있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북경공항과 같은 국가의 관문에 있는 화장실에서 문을 열고 부끄러움 없이 용변을 보는 아저씨들이었다. 지방 도시의 화장실은 탁 트인 널찍한 공간의 바닥에 구멍만 뚫어 놓은 곳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일을 보아야만 하는 곳도 허다했다.


   2002년 말, 현지인들과 함께 중국 남쪽의 쿤밍, 리장, 따리, 샹그리라 등, 소수민족이 사는 명승지를 둘러보러 현지 여행사를 따라 가족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소수민족의 적나라한 생활습관을 목격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중국에 온 지 5개월 된 아내가 앞장서서 짧은 중국어를 써가며 돌아다니던 용감한 일정이었고 P의 가족 외에는 다 현지인들이었다. 여행 일정상 들른 쿤밍역 화장실은 여자끼리도 서로 마주 보는 화장실이어서 아내와 딸은 혼비백산했다. 또 식당 화장실 밑에는 돼지들이 꿀꿀거리고 있었으며, 문고리가 없는 곳이 많아서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가며 버텨내야 했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관광선을 타는 유람선 화장실은 대소변 보는 곳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대변을 보던 사람들은 소변을 보는 남자의 얼굴과 거시기가 보이는 곳에서 일을 봐야 했다. 소변을 보는 사람은 대변보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볼일을 보던 충격적인 장면이 생생히도 기억에 남았던 여행이었다.


   P에게는 이런 것들이 엄청난 문화충격이었지만 중국 사람들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대응을 하였다. 이런 장면을 보고서, '아 이런 것들이 문화 차이로구나'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술접대 문화 적응도 힘든 고통의 과정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은 바깥 날씨가 40도 이상으로 더운 북경의 한여름날 점심 식사에도 백주(白酒)를 주문하고 P에게도 술을 권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기온이 40도가 넘으면 일단 근무를 정지시키는 정부 시책이 있었기에 아무리 더워도 공식적으로는 39도로 발표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방문한 곳은 중국 개혁 개방의 총설계자로 불리는 덩샤오핑(등소평)이 사망한 중국인민해방군총의원이라고 하는 병원이었다. 일명 301병원이라고도 하는 병원이었다. 이 병원 설립을 주도했던 301부대의 명칭을 따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서열상 군병원이 맨 위고 그 아래가 인민병원, 민간병원 순이다. 사회주의국가인 데다 헌법 위에 공산당이 있고 공산당의 군대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군대는 정부군이 아니라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공산당의 군대라 중국인민해방군이다. 군병원의 고위급 의사는 대부분 군 장성이었다.


   301병원은 자부심이 강하였고 VIP 지정 병원이었는데 여기 의사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군복을 입고 식당에 와서 대낮부터 고도의 백주를 시켜 마셨다. P에게도 잔을 권하면서 여섯 명이 돌아가며 술을 부었고 자기들은 P한테 받은 한 잔씩만 마셨다. 상당히 불공평한 상황이었는데 P는 회사의 중요한 일을 결정짓는 상황이었고 상대가 장교들이었으므로 웃는 얼굴로 넙죽넙죽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낮술을 거의 마셔본 적이 없었던 P처음에 냉채가 나오는 중국 식단을 거의 먹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주는 대로 받아마신 술로 인해 30분도 안 되어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끼고 의사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동안 바깥으로 나왔다. 식당 바깥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걸어서 20m 정도는 되어 보였다. 체감온도로 40도가 훨씬 넘는 대낮지열도 뜨거웠고 에어컨이 가동되던 실내와 달라 온도차가 너무 심했다.


   P는 땡볕 밑에서 화장실까지 20m를 가다가 엄청난 지열에 현기증을 일으켰다.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수돗물을 틀어 놓고 얼굴을 갖다 대며 세수를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들지 못할 것 같았다. 곧이어 속에서 역겨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먹은 음식이 없었음에도 억지 구토를 해야 했다. 위장 속을 칼날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후부터는 의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또 술을 줄 때 어떻게 사양했는지 등이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취해 버렸다. 간신히 식사 자리를 마치고 북경에서 본사가 있는 천진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몸을 실었다. 운전기사와 통역, 그리고 수액제 담당 총경리와 같이 탄 대형 캐딜락 차가 막 고속도로에 접어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엄청난 양의 폭우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때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차가 멈춰 섰고, 무슨 일인지 놀라 밖을 내다보았는데 길가에 대형 트럭이 전복되어 있었다. 사망자인 듯한 시신을 거적때기로 덮어 놓은 모습도 보였다. 공안(公安: 중국 경찰)이 뭔가 소리를 질러가며 시신을 확인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하였다. 빗길 난폭 운전의 결과와 인명 경시의 장면이었다.


   P가 탄 차량도 엄청나게 퍼부어대는 속을 뚫고 가느라 와이퍼가 최고속으로 좌우를 닦아내다 점점 느려지더니 드디어 고장이 났다. 운전기사가 와이퍼 없이 폭우 속을 뚫고 조심스럽게 달려서 간신히 천진까지는 도착하였다. 속이 불편했던 P는 중간에 차를 세우라는 말도 못 하고 배를 움켜쥐며 고통을 참아야 했는데 그날의 기억은 차라리 악몽에 가까웠다.


   그 캐딜락 차량은 어느 병원에서 의약품을 구매한 대금을 돈으로 갚지 못해 대납한 차량이었다고 들었다. 그것은 홍콩을 경유하여 천진으로 수입된 차량이었는데 삼합회 보스가 타던 차였다고 했다. P는 평소에 그 차를 타고 북경과 천진을 왕복하였는데 3천 위엔(약 50만 원) 정도의 기사 월급에 놀라서 동정심에 100위엔씩 팁을 주면 190cm 키에 110kg의 천하장사 체구의 기사가 넙죽 절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오너나 CEO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는 북경공항에 마중 나갔던 영접차량이었다. 하지만 덩치만 컸지 기름을 엄청 잡아먹는 하마였다. 종종 부품이 노후되어 교체하려면 미국이나 홍콩에서 부품을 수입해서 수리해야 하기 때문에 운행하기보다 서 있는 날이 더 많았던 골칫덩어리였다.


   충격적인 어느 여름날을 겪은 이후 P는 낮술을 조심하게 되었고 군병원을 경계하였다. 군병원은 301병원 계열로 302(감염병 전문), 304(외상외과 전문), 305(노인병 전문), 309병원(장기이식 전문) 등 전문병원들이 있었으며 병원 수준도 최고였다.


   중국의 비즈니스나 영업에서는 우리말로 '관계'라고 하는 단어를 중시했는데, 중국어 발음으로 꽌시(關係)라고 하였다. 꽌시는 개인 간에 맺은 인연을 통해 만들어지는 소중한 것이었으며 이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가 중국이었다. 즉 사람과의 관계와 인연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 직원들은 회사에 들어오기만 하면 두 개의 채널로 돈을 번다는 말을 하곤 하였다. 매월 받는 월급과 인센티브를 포함한 정규수입 이외에 따로 회사돈을 떼먹으며 돈을 번다는 의미였다. 월급과 회사돈, 두 개의 채널로 먹고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회사에서조차 부정부패가 심하였다.


   부정부패는 영업부서에서 특히 심했는데 병원을 담당하는 직원은 본인 부임지와 거래선 병원 배정이 실적을 좌지우지하였다. 이러한 부임지와 거래선을 배정하는 지역책임자 또는 영업책임자에게 보이지 않게 뇌물을 갖다 바치거나 상납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의약품 담당자의 경우, 기혼 또는 미혼의 여직원들이 절반을 넘을 정도로 많았고 업무 특성상 약사와 의사들도 상당수가 포진해 있었다. 한의학이 발달한 나라에서 양의학은 이과계 전공학과의 한 분야였기에, 의학 전공자들은 제약회사에 취업하는 것이 더 수입이 높았다.


   대륙의 드센 딸들인 여직원들 중에도 간혹 지역책임자 또는 영업책임자와 정분이 나서 좋은 임지를 배정받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좋은 병원을 배정받아 실적이 잘 나오면 높은 평가를 받아 상여금을 많이 받게 되고, 그러면 그 상여금의 일정 부분을 책임자에게 상납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있었다. 돈이 결부되어 있고 불륜의 씨앗도 있었던 영업부서의 극단적인 단면이었다.


   더 가관이었던 것은 간부들은 상여금을 받을 때 발생되는 세금을 회사에서 모두 부담해 주고, 고스란히 세전 100%를 받아가는 관행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P가 부임했을 때 영업마케팅 담당부장의 연수입이 거의 1억 원에 육박하였다고 들었으니 농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장에서 근무하는 생산직이나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경우, 월급여가 1,000~2000위엔, 즉 30만 원이 채 안 되는 직원들도 많았다. 사내에서도 엄청난 빈부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 근로법으로는 매년 직원과 계약한 날의 한 달 전에 통보만 하면 퇴사를 시킬 수가 있었다. 직원들은 파리 목숨이었다.


   영업 목표를 설정할 때의 일이 기억난다. 병원에 납품하는 수액제의 경우, 중국 계획경제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미리 목표를 정해 놓고 실적을 짜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성장에 더하여 경제성장이 있고 회사의 판매독려와 마케팅 투자, 사원 노력으로 인해 목표를 훨씬 상회하는 고도성장을 이루면 좋을 것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직원들은 100에서 105% 정도만 달성하고 거기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즉 개인의 달성률 또는 팀의 달성도에 비례해서 상여금을 받아가는 체제가 아니었다. 중국의 계획경제를 회사에서 고스란히 도입하여 일정 수준의 목표만 맞추면 그다음부터는 별로 일을 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가 많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팀과 개인에 따라서는 실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당연히 있었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것을 추궁하면 온갖 이유와 구실, 핑계를 만들어 그럴싸한 말로 대들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상황도 비일비재해서 곧잘 통솔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곤 했다.


   위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겠지만, 그것이 중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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