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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Feb 25. 2024

강남역 미아 3장 3화

해외지사-3

2002년 11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이라고 불렀던 사스(SARS)가  발생하여 병원을 방문하기도 어려웠고 실적도 체크하기 어려웠던 기간이 있었다.


밖은 구급차 소리로 요란하였고 외출은 금지되었으며 TV는 하루종일 의사들의 사투를  생중계하였다.

역병이 모든 시스템을 마비시켰다.


한국으로 가려니 중국에서 온 사람들을 세균덩어리 취급한다는 말을 듣고 북경집에서 칩거하게 되었다.

애들 등교도 안 되었고, 회사에서는 직원 가정마다 폐에 좋다는 탕약을 배급해주기도 했다.

P는 이 기회를 제품교육의 기간으로 선포하고 내실을 기하였다.


2003년 하반기에 1년간 실적을 취합해서 평가를 할 때에는 SARS가 있었던 상반기 실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그 해에 세웠던 1년간을 통으로 취합하여 평가하자고 약속하였다.


직원들은 2003년 상반기에 달성하지 못한 실적을 하반기에 밀어 넣기 등 필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간신히 101% 정도로 마감시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영업부원들은 SARS가 있었음에도 목표를 100% 달성하였기에 정당하게 인센티브를 받아야 한다는 강한 주장을 하였는데, 100% 달성분에 대한 인센티브는 춘절(春節) 즉 중국의 설날 이전에 지급해야 한다는 관습이 있었기에 보통 1월 말에는 지급되어야 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이전 해의 밀어 넣기에 의한 반품이 다음 해 3월 이전에 나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기에 최종 평가는 3월 지난 후의 실적을 집계하여 플러스 마이너스를 보정하고 인센티브를 지불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무조건 전년도에 판매한 실적을 기준으로 삼았기에, 그 실적이라고 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병원에서 처방되는 실적인지 아니면 담당 직원이 병원 또는 도매상과 짜고 밀어 넣기를 해서 만들어낸 실적인지를 면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는데, 춘절 전에 상여금을 지불해야 되니 그것을 파악할 여유가 있느냐며, 영업부에는 100% 넘긴 실적 달성 축하연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P는 이에 대한 모순과 잘못을 지적하였지만 중국 총경리는, 이것은 오랜 중국의 관행이기 때문에 바꿀 수가 없다는 대답만 반복하였다.


이러한 상황들을 겪으며, P와 일본에서 파견되어 근무하던 본사 직원들도 문제점을 간파하고 본질을 파악하기 위하여 나서기도 하였지만, 일본 직원들은 중국어를 할 수 없는 직원들이었고, 그런 경우 일어를 할 줄 아는 통역을 사용하여 진상을 규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일어를 할 줄 아는 통역인이 중국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중국인들은 자신들도 어부지리를 얻으려면 결국 중국 쪽에 유리한 통역을 해야만 하였고, 이러한 소통과정에서 야기되는 문제점으로 인하여 거짓 보고도 많았다.

진상 규명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본사에서는 1년에 2번 감사반이 투입되어 회계감사와 경영감사를 실시하였지만 3박 4일 또는 일주일간 출장 베이스로 와서 중국인 통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감사는, 그들의 관행으로 만든 장부를 보고 판단해야 하고, 중국어로 만들어진 증빙서류를 검토해야 했으니, 처음부터 한계를 설정해놓고 하는 듯한 형식의 감사여서 100% 문제점을 파악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가끔 P는 감사팀으로부터 객관적인 상황을 이야기해 달라는 질문을 받고서 자신이 느낀 바를 가감 없이 진술하곤 하였지만 과연 그것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P 자신도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언급한 내용도 있었고, 그런 것들이 본사의 어느 선까지 제대로 전달되는지 알기도 어려웠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현장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고, P가 문제점을 지적하면 반발도 있었다.


어느 여름날, 30대 후반의 영업부장이(남자 약사) 발로 총경리실 문을 꽝 차며 들어왔는데 입에 담배를 물고서 알아듣지 못할 중국말을 섞어가며 '네가 나를 찾았느냐? 나를 왜 불렀느냐? 나는 너에게 할 말이 없다네. 네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라는 생뚱맞은 소리를 내뱉으며 다시 문을 꽝 닫고 나갔다.


P는 영문을 몰랐었지만 나중에 들은 바로는 감사의 지적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일종의 기싸움이었다고 한다.


P보다 젊은 영업부장이 건방지게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 큰 소리로 호통치듯 소리를 질러댄 것은 일종의 대륙인으로서 중국인의 기질을 표현한 것으로 보였는데, 특히 천진이나 북경과 같이 정치적인 색깔이 강한 지역에서는 상도덕이라든지 윤리적인 관점에 냉정한 잣대를 갖다 대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P의 비서로 근무한 일본어 통역 담당이 있었는데, 이 비서가 유산을 하였다.

그러자 유산을 핑계로 정해져 있는 유급휴일보다 훨씬 많은 날을 쉬면서 정신적 장애까지 호소하였다.

물론 여성이었고 큰 충격이었기에 당연히 그럴 수 있으리라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다.


그 해 말 P는 치료약 부분을 따로 떼어내서 본부를 상해로 옮기고자 하였으므로 이 비서에게도 같이 상해로 옮겨갈 수 있느냐는 요청을 하였지만, 이에 대해 비서는 자기의 주소지 호적을 천진에서 상해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듯하였다.

비서는 별로 동행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데 남편과 떨어지게 되는 환경도 싫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서울에서 부산 정도로 주소지를 옮겨 가는 것이 무슨 큰일이냐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중국인들의 경우 천진에 자기의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을 상해로 옮겨 가는 것에는 엄격한 규제와 심사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나 상해인이 되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존심 강한 북경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라이벌 상해를  싫어하였고 상해인들 또한 정치적인 북경을 싫어하였다.


어쨌든 신경을 곤두세우다 여비서가 회사를 관두고 말았는데 무엇이 불만이었는지 몰라도 훗날 P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는 투서를 본사에 보낸 장본인인듯하였다.


그 당시 P가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을 하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흰색 또는 노란색 봉투에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무기명 투서가 올라와 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면 중국어로 시 구절과 같은 내용들이 적혀 있었는데 일본어를 아는 비서나 총경리를 통해서 번역해 보면 내용이 황당하거나 충격적인 것들이 너무 많았다.


회사 발전을 위한 직언을 하는 내용도 있었지만, 거래선 몰아주기, 부당한 인센티브 지급, 사내 연애, 사내 뇌물 주고받기, 거래처 뇌물 주고받기, 경비 과다 사용, 상사에 대한 밀고, 부하직원 바꿔 달라는 호소 등등...

본인들이 눈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투서로 적어서 올려놓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익명으로 보내진 투서의 내용에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었던 P는 무시해 버리곤 했는데, 어느 날 P 자신에 대한 투서가 본사에 배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본사에서는 그 투서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직접 연락을 취해 왔는데, 내용인즉슨 P가 특정 직원을 편애한다, 직원들에게 고가의 차량을 사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경비를 과다 책정하고 있다, 조직을 자기 멋대로 주무른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론을 펼쳤다, 항일운동을 하면서 일본 회사를 등쳐먹고 있다 등등 거짓과 비방으로 가득 찬 것들이었다.


이것이 본사에 밀고가 되었을 때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믿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투서 자체가 배달되었다는 사실에 관계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P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이런 투서가 날아와서 발을 붙잡느냐는 시각이었다.

혹시나 중국인들에게 반감을 사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작업을 지시했을 것이다.


P가 경험한 바로 중국인과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커다란 기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였다.

본사의 일본 사람들은 피 속에 냉정함과 냉혹함이 흐르는 사무라이 기질이 있다고 느껴졌다.


반면에 중국인들은 돈과 이해타산이 관련되면 바로 몸을 움직여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피 속에 돈이 흐른다고나 할까?


당시의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계약서는 한낱 종이에 불과하였고, 돈이 많이 생기는 곳이라면 의리를 저버리고 쉽게 몸을 움직이는 듯하였다.

그들에게는 의리나 정(情)보다도, 수입이 조금만 늘어난다면 얼마든지 회사를 옮기는 현실적인 판단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몰랐다.


예컨대 인센티브로 두둑한 상여금을 받아서 춘절에 고향에 돌아간 직원들이, 명절에 중국 전역에서 모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 어느 지역 어느 회사가 월급을 많이 주고 인센티브 시스템이 좋다는 정보를 들으면 춘절 이후에 소속 부서로 돌아오지 않고 바로 친구 따라 새로운 회사로 전직하는 것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휴대전화가 부족하였던 시절에 사무실에 직원이 나타나지 않으면 확인할 방법도 묘연하였는데 나중에 체크해 보면 그 직원은 춘절 때 만난 친구 따라 이미 다른 회사로 옮겨 갔고, 그가 몸담았던 회사에서 가지고 있던 영업 비밀 자료도 고스란히 가져갔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팩스나 편지 한 장으로 사직서를 보내면 끝이었다.

짧게 일하였기 때문에 퇴직금을 받아 갈 명분도 없었거니와 두둑한 인센티브만 챙겼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넓디넓은 중국에서는 대면 면접도 어려우니 팩스 한 장으로 이력서를 받고 전화 한 통으로 입사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런 예도 있었다고 한다.

중부내륙 지방의 먼 지점에는 분명히 직원 3명이 채용되어 있었고 급여나 상여금, 출장비 등이 정기적으로 지급되었다.


어느 날 수액제 담당 총경리가 하루 전에 급히 연락하고 오랜만에 이 지점을 방문했는데 사무실에는 식기와 침구가 보였고, 지점장 외 2명의 여직원들 언행이 어설퍼 보였다.

총경리는 식사를 같이 하면서 제품에 관한 이런저런 질문을 했는데 대답도 시원찮았다. 아무래도 수상쩍어서 지점장을 심문했더니 그동안 자기 혼자 1인 3역을 하며 배불리 돈을 가로챈 것이었다.


즉 2명의 가공인물을 만들어서 2명분의 모든 인건비를 다 받아먹고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던 것이 들통났다.

여직원 행세를 한 사람들은 일당을 주고 하루 아르바이트로 고용한 가짜 직원들이었다.

당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나라였고, 죄의식도 없이 벌인 사건이어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한국인들은 인정이 흐르는 민족, 한(恨) 서린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이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며 술 한잔을 걸치게 되면 곧바로 호형호제를 하기도 하였고, 우리는 이제 친구가 되었다는 생각을 갖기도 하였다.


하지만 P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중국인은 십 년 정도 사귀지 않으면 친구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쉽게 믿을 수 없는 민족이었고, 더더군다나 일본인은 이삼십 년을 같이 근무해도 워낙 냉정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정도의 사무라이들이었다.


한국인들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 할지라도 같이 술 한잔 먹고 의기투합되면 바로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단순하고도 순진한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보기에 한국인은 다루기 쉬운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P와 같은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또 지정학적으로도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한 맺힌 입장의 서러움을 많이 느끼고 살아왔는데, 이것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비즈니스 자리에서 쉽게 속마음을 보이고 오픈마인드가 좋으니 흉금을 터놓자고 하며 어깨동무하고 러브샷도 하면서 래를 약속한다.


생각해 보라!

겉과 속이 다른 냉정한 섬나라 사무라이, 꽌시로 돈을 벌겠다고 호언장담 덤비는 대륙의 왕서방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순하고 착하기만 한 선비들인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P가 어느 날 오후에 직원이 보이지 않고 연락이 되지 않아 업무지시를 하러 사무실 건물을 돌아다니다, 어느 방 하나가 굳게 문이 닫혀 있어서 좁은 열쇠 구멍을 통해서 안을 들여다보니 회사 간부들과 직원들이 모여 앉아 포커와 마작을 하고 있었다.


너구리 잡을 정도로 담배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돈을 거는 도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발견하고 영업 부장에게 지적했더니 당신이 무슨 간섭이냐, 일에 대해서만 간섭을 하되 다른 것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라고 하면서 맞받아쳤다.

분명 근무시간이었기에 업무 중에 그런 것을 하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니 담배 한 개비를 손에 쥐어 주며 좋은 담배나 한 대 피세요라며 문을 닫아버렸다.


P처럼 정의감이 강한 굴어온 돌 혼자서 정치와 술수에 능수능란한 박힌 돌 여럿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그들 입장에서 봤을 때는 직책만 높은 순진한 한국인으로 보였을 것이고 아마도 일본의 하수인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P와 같이 본사에서 파견된 일본인 임원잘못된 점발견하고 기존 시스템에 손을 대려고 했는데 본사에 투서를 해서 그 직원을 낙마시키고 친중파 일본인으로 바꿔치기도 한 경우도 있었으니, 생각보다 훨씬 똘똘 뭉쳐있고 텃세를 부리는 박힌 돌들이었다.

물건을 파는 곳은 중국땅이니 모든 것을 중국식으로 하라는 취지로 보였는데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상황들도 많았다.


P에게 올라오는 마케팅과 영업부서 직원들의 기안서 내용을 확인하는 경우에도 상당히 신뢰하기 어려웠던 내용들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행사를 하게 되면 여행사나 마케팅업무 대행사와 결탁을 하여 경비를 빼돌리거나 정산서에는 가짜 영수증을 갖다 붙이기도 하였기에 주의 깊게 봐야 했지만 기안서를 제출하면 그 자리에서 빠른 승인을 재촉하였으니, 뭔가 구린 구석이 있어 보였다. 


당시 북경역 앞에서는 가짜 영수증을 팔고 있었고 신분증, 상장, 졸업장 등 세상에 있는 모든 증명서를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는 나라였다.

위조나 변조, 날조라고 하는 단어가 자주 들리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컴플라이언스(compliance)를 지키는 준법경영이 통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눈 가리고 아웅 하면서 회사 돈으로 서로 뇌물을 주고받으며 경비는 배달 사고가 나고, 병원이나 도매상과도 여러 형태의 복잡하고 부정적인 편법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일일이 가려내어 벌을 부과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중국 전역에 있는 의약품 계열사의 경영자 모임도 있었는데 경영자들 중에는 중국인 경영자와 일본인 경영자도 섞여있었고, 중국 내에서의 여러 경영 방침에 대한 의견 교환을 위해서 만든 모임이었다.

그런데 계열사끼리 서로 가격경쟁을 한다든가 입찰에서 부딪치는 모순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어떻게 같은 그룹사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에서 저렇게 서로 가격경쟁을 하며 제 살 깎아먹기를 하는지 P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칙도 질서도 없는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아시아를 책임지는 사업부장과 중국 전역을 책임지는 중국실 실장 사이에도 갈등이 많았다.

둘 다 헤비스모커였는데, 그중에서 중국실 실장은 중국어를 어느 정도 이해하였기에 중국인의 정서를 안다는 측면에서 사람들을 잘 부리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P에게만큼은 상당히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추측컨대 아마도 P가 한국인이었고 오너와 가깝다는 배경을 싫어했을 것이다.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던 상무회의에서도 같은 일본인인 아시아 책임자와 중국실 실장같은 편에 서지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분열된 경우도 있었다.

일본인이라고 다 단합하는 건 아니었으며 둘은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삿대질도 하였다.


오너는 곳곳에 정보망을 두고 상황을 파악해 가며 진두지휘를 하였지만, 자주 바뀌는 당국의 정책과 회사의 대책수립에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무엇이 완벽한 대응책인지 몰랐고 우왕좌왕하였다.

제갈공명이 환생했어도 쉽지 않은 복잡다단한 시대였다.


노련한 중국실 실장은 P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 상해 사람인 일본 의대에서 유학한 의사 출신으로 일어 잘하는 사람을 영업 책임자로 기용하고, 또 같은 상해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와 있던 미국 유럽계 회사에서 경험을 쌓은 영어 잘하는 여자 의사 출신을 마케팅 부장으로 포진시켜 P를 보좌함과 동시에 견제를 하였다.

천진의 무례하고 도박에 빠진 책임자들보다 세련되고 외국어도 되는 지적(知的)인 인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다.


P는 영업 마케팅 회의를 수시로 개최하며 한국에서의 성공모델을 활용하여 중국의 조직을 개편하고 체질을 바꾸려고 하였지만, 영업 마케팅 부서의 책임자들은 P의 방향성을 추종하기보다 중국실 실장의 말을 더 따랐다. 

누구나 자기를 영입하고 임명한 사람을 모시기 마련이었다.

자기들이 중국사람이니까 현실을 더 잘 안다며 P를 배제하고 업무를 주도하기도 해서 갈등이 벌어졌지만 중국실 실장은 팔짱을 끼고 모른 체하는 사람이었다.


P가 본 중국에서의 문제점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이 가운데에서 통역하면서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중국어를 이해하는 일본인이 중국 사람들과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입맛에 맞춘 정책을 세우며 유착하는 모습도 보았다는 것이다.


중국은 국가나 당국에서 정책을 세우면 기업이나 민간에서는 즉각 대책을 수립하는 나라였다.

규정과 조례는 수시로 바뀌었으며 그것도 각 성(省)과 시(市) 정부마다 있는 보건국, 공상국(工商局)이나 상무국 등이 중앙정부의 눈치를 봐가면서 자기들 입맛대로 칼을 휘둘러댔던 격변의 시기였다.

회사의 대응책은 늘 뒷북을 치기 일쑤였고 그럴수록 뒷돈만 늘어났다.


당시 중국의 보건의료 환경은 도농 간 의료혜택의 격차, 노령화의 시작, 의료재정 확보, 중증환자 및 난치병 환자 치료의 전문성 부재, 만성질환의 급증 등 여러 부담스러운 문제들이 산적하였고, 의료보험도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다.  

보건의료의 정책변화에 따른 기업들의 대응은 늘 골칫덩어리를 안고 해결책을 고민하며 사는 고3 수험생 같았다.


이러한 상황과 현실이 싫어진 P는 점점 말수가 줄어갔으며 외로움을 느껴갔다.

술문화 대응도 어렵고 화장실문화는 더 맞지 아니하였으며, 뇌물과 겉치레로 점철된 접대문화도 싫었다.


다들 P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해대는 것 같았으며 뒤에서 수군거렸다. 우군들은 숨을 죽이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업무상 만난 사람들도 삼국지와 수호지의 등장인물만큼 많은 중국에서의 직장 생활은 얽히고설킨 복잡한 삶이었기에 나날이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직원들 중에는 억센 대륙의 기질에 개성도 다양하고 사용 언어도 다르며 민족도 다른 사람들이 끼리끼리 섞여 있었으니, 그것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워 보였다.


P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야 된다는 인간의 기본적인 건강 유지법에서, 음식입에 맞지 않고 여러 고민과 우울한 생각에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으며, 화장실 또한 마음 놓고 가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점점 의욕이 떨어져 갔다.


아마도 지금까지 겪고 있는 수면부족과 쉽게 잠들지 못하는 습관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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