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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Feb 27. 2024

강남역 미아 3장 4화

해외지사-4

과연 이 거대한 중국을 누가 어떻게 세우고 통치했는가?


그 옛날 마오쩌둥이 23년간의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통일을 하였고 덩샤오핑이 중국의 시장경제를 일으켜 자본주의를 도입한 것이었으니 그 둘이 중국 인민들의 영웅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특히나 덩샤오핑은 현재의 중국 경제를 이끈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을 P도 익히 알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P가 낮술 접대와 의식불명으로 생고생을 했던 301병원에서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150cm의 단구였지만 흑묘백묘론을 펼치며 중국 경제를 몇 단계 끌어올린 탁월한 지도자였다.


예전부터 키 작은 사람이 장수한다는 속설도 있었지만, 그가 최고권력자 자리에 오른 것은 77세의 나이였는데 93세까지 중국을 통치하면서 그만의 양생법을 활용하며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


P는 체구도 작은 사람이 13억 넘는 인구에 55개 소수민족이 있는 나라를 어떻게 통치해 나갔는지 공부를 해서 무언가 깨달음을 찾고 싶었다.


물론 삼국지 수호지 손자병법 등, 수 없는 중국 관련 책을 다시 읽으며 깨우칠 점도 많았다.

중국에서 처세철학의 습득은 간부나 당원이 되는 기본기였다.


중국 사자성어에 난득호도라는 단어가 있다.

難得糊塗

난득은 얻기 어렵다는 뜻이고 호도는 풀을 칠한다는 의미이니 한 꺼풀 뒤집어써서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말로, 바보처럼 굴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난득호도'는 중국인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가훈으로, '바보가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데, 자기를 낮추고 남에게 모자란 듯 보이는 것이 결국 현명한 처세가 된다는 중국인의 오래된 격언이다.

총명한 사람이 똑똑함을 감추고 바보처럼 사는 건 참 어렵다는 인데, P는 이 단어를 많이 곱씹으며 살았다.


P가 본 중국이라는 나라는 체제만 공산주의였을 뿐 경제적인 관점에 있어서는 극단적 자본주의를 지향하고 있던 나라였다. 자본주의 침투로 인해 사람들은 풍요로워지기 시작하였으며 예전보다 더 돈에 집착하는 듯 보였다.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중국의 모습 속에 아직도 비즈니스보다 장사가 판치던 시대, P가 꿈꿨던 학술적이며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전개할 마케팅 개혁은 1~2 년 만에 성공시킬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다.


P는 중국교포 출신에 서울대에서 유학한 사람으로 비서를 교체하였고 중국에 대한 공부에 박차를 가해 갔는데, 그를 통해 들은 내용과 현실은 P가 꿈꿨던 이상향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비서는 늘 중국의 시와 역사를 읊어대며 원래 영도자는 외로운 법, 용병술의 중요성, 꽌시의 활용, 술자리 대처법, 각 민족의 특징, 공산당 내부의 갈등, 상해 사람과 사귀기 등 평소 듣고 싶었던 조언을 해주었다.

우리말로 소통이 되니 훨씬 편하였으나 중국어 실력은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비서와 일본인 관계자들, 그리고 서울에서 출장을 나온 국제사업부의 동료들, P의 멘토였던 부회장을 통해 본사 내부의 공기를 읽어가며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처음 부임 시에 오너가 5년간 보낼 테니 열심히 일하라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는 갈수록  어려워 보였다.

'5년이 아니라 10년이 걸려도 개혁은 쉽지 않습니다'는 대답으로 수정해야 할 판이었다.


일례로, 북경 있었을 때 상무회의마다 만났던 중국의약집단공사의 동사장은, P를 만나기만 하면 중국에서 성공한 외자기업의 예를 들어가면서 본사 오너에게 과감한 투자를 요청해 보라고 종용하였다.

하지만 그런 의견은 중국실 실장과 아시아 사업부장 선에서 번번이 차단되었다.

적은 투자로 간을 보기 위해 가미가제 특공대만 허락할 뿐 융단폭격은 엄두도 못 내었다.


어쨌든 P는 이 드넓은 중국에서 혼자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었기에 많은 친구를 만들어 그의 DNA를 퍼뜨리고자 노력하였는데 그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바로 꽃을 피우지 못하였다.


수많은 문제점을 파헤친 보고서가 여러 번 본사에 전달되었지만, P가 항상 아쉬워했던 것은 이 넓은 지역을 100%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즉 다시 말해서 현장감각이 매우 중요한데 그것의 상당 부분이 결여된 보고서를 올릴 때마다 괴로워했다.

 

현장이 없는 실적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현장이 없는 영업사원과 마케터도 없을 것이며, 현장이 없는 경영 또한 없을 것이다.

P는 늘 현장우선주의를 외치고 다녔지만 그 넓은 곳에서 그 많은 현장을 다 파악하고 문제를 수습하며 해결하고 개혁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기필마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중국사람들이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인이 죽을 때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첫째는 땅이 너무 넓어서 여행을 다 못 가보고 죽는다는 것, 둘째는 요리의 종류가 너무 다양해서 다 못 먹어보고 죽는다는 것, 셋째는 한자가 너무 많아서 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었다.

P 역시 이런 말에 공감하며 최소한 본인이 일하는 직장의 직원들만이라도 제대로 파악해 보고자 노력했으나 한 명의 사람을 똑바로 알고 친해지기도 쉽지 않았다.


내 사람을 사내에 많이 만들어 조직에 우군이 많고, 나를 지지해 주는 고객과 관계자들이 많아야 성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노즈쿠리(장인정신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독특한 제조문화)의 나라인 일본의 오리지널 제품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수했으니, 좋은 사람을 사귀고 친구가 많으면 꽌시를 동원하여 도전해 볼 만한 중국 프로젝트였다.


훗날 P가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중국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는데, 당시 P에게 교육을 받았던 주력 제품의 마케터가 한국 행사에 참석하러 와서 오랜만에 P를 만나 손을 잡으며 진심 어린 고백을 하였다.

그가 한 말은 이러했다.


P가 자기에게 해 준 말이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이제 자기는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노라, 그 당시 당신은 너무나 고생을 많이 했지만 우리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문맹인들을 눈뜨게 해 준 너무나 고마운 은인이다, 나는 이제 제대로 된 마케팅을 하고 있다, 단지 지금 인사하러 악수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시에 어린아이와 같았던 자신이 지금은 사춘기를 넘어 청년기에 접어들었을 만큼 성숙한 마케터가 되어 있으니 다 당신 덕이다라며 눈물을 글썽일 때는 P 역시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세월이 흐르면 누군가는 인정해 줄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P가 귀국한 후 또 다른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의약품 회사를 맡아 키우려고 투입되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후임자들의 보고서에는 P가 다져놓은 초석이 뒷받침되어 일하기 좋아졌고, P를 따르던 직원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P가 뿌려 놓은 씨앗으로 인해 학회와의 관계도 원만히 개선되었다, 이제 치료약 사업이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등의 언사가 있었다.

P가 겪었을 수많은 고생과 고통을 자신은 1/10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표현까지 있었다고 한다.  


P의 귀국 후에 투입된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2년 만에 손을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망치듯 본국에 귀국하였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나라가 중국이었다.


아버지 일본인에 어머니가 중국인이었던 사람으로 중국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잘하는 총경리를 배정하는 묘수도 써봤는데 이 사람 또한 스캔들에 관련되어 회사를 떠나게 된 이후로, 두 번 다시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경영자로 등용하지 않았다.

중국은 실험실이 아니라 전쟁터였는데 오너는 계속해서 실험을 시도하였고 초조해했다.


결국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중국인이 경영해야 성공할 수 있겠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상해로 치료약사업본부를 옮김에 따라 경험 많고 세련된 엘리트 중국인들이 등용되어 기업을 재정비해갔으며, 그들이 팔 벗고 나서며 많은 문제점이 해결되기 시작하였다.


2010년경부터는 독버섯처럼 퍼져 있던 고질적인 문제들, 즉 인적 구조적 영업적 병폐를 치료해 가며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한국 지사를 넘어서는 실적을 올릴 정도로 성공적인 모델이 되었다.


P가 한국에서 성공시켰던 의약품을 중국에 있던 시기에 우여곡절 끝에 허가를 취득하여 도입을 추진하였는데, 그것이 밀알이 되어 이제는 그 제품 매출액이 한국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거대 품목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을 육성하여 P의 DNA를 심기도 하였지만, 물건에 혼을 실어 P의 유산이 활착 되어 성공한 사례도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즐겨 애용하는 말 중에 이치고이치에(いちごいちえ一期一會)라는 단어가 있다.

'일생의 단 한 번의 만남'이란 뜻으로 소중한 인연을 후회 없이 대해야 한다는 의미와,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로도 널리 사용된다.

P는 사람이나 물건을 대할 때마다 이 단어를 떠올리며 소중히 대하였고 그것은 그의 성품이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성공의 열쇠가 되어 보람을 느끼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야전사령관으로서 전쟁터에서 싸울 때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몰랐고, 아군과 적군도 식별이 되지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것이 다 신념 하나로 밀어붙인 백병전이었다.


황하는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지만 사람은 10년이면 많이 변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중국 재임기간이었다.


늘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P는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였다.

'오 신이시여, 부디 저를 저버리지 마소서...'


P는 2004년 하반기에 서울에 세워진 아시아 헤드쿼터 사무소로 부임하느라 3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쓸쓸히 귀국하였다.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대인배답게 꿀꺽 침을 삼키고 체념해야만 했다.


P를 중국에 보낼 당시 최소 5년간은 일하라고 했던 오너는 본인이 조기 귀국을 지시해 놓고도 매우 실망감을 표출했다고 한다.


오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유롭지 못한 P는 점점 최고권력자의 가시권에서 멀어져 갔으며, 오너는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P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공적을 칭찬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죽어라 고생만 하고 돌아온 P는 억울한 심정을 술과 노래로 풀며 쓰라린 속을 달랬다고 한다.

52도의 백주(白酒)를 마실 때보다 더한 속 쓰림이었다.


2002년 초, P의 중국 부임 시에 축하연회장에서 노래를 같이 불러주며 격려했던 오너는 결국 P를 내팽개쳤다.

그것이 일본인의 냉혹함이었다.

오너는 성공한 사람만을 좋아했다.

당시 P는 중국을 성공시킨 인물로 기록되지 못하였으며 두 번 다시 오너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하였다.


P는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모택동 제복 같은 중국식 의복을 벗어던지고 강남역 미아로 환생하여 역 주변을 헤매기 시작했는데 제4의 인생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그랬다.

2002년 봄날에 꿈을 품고 출발한 천진, 그리고 북경과 상해에서 겪은 고통스러운 시간은 서서히 추억이 되어갔으며 하얀 눈으로 덮여가기 시작하였다.


불요파 불요기 불요회

不要怕 不要棄 不要悔

두려워 마라! 포기하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이 삼불(三不) 메시지만이 뇌리에 맴돌았던 시절이었다.


결국은 돈과 사람이었다.

그것을 어찌할 것인가?

삶의 80%는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진리는 깨달았지만, 결국 나머지 20%는 내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들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인생은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P는 중국이나 일본의 부정적인 면을 보기보다, 오히려 그 자신의 선한 영향력에 좋은 영향을 받아 그 나라 사람들이 평안하고 즐거움으로 살게 하는 게 최고의 가치라는 생각을 쭉 해왔다.


회고해 보면, 중국 부임 시에 비장한 각오와 신념을 갖고 임하였지만 어려움은 늘 끊이지 않았다.

현장에서는 매일 뭔가 일이 생기고 사고가 발생했으며, 사기도 당하고 무시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개혁을 추구해 나갔다.

현재의 높은 매출 달성이 있기까지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 시절의 오너나 CEO, 아시아 사업부장, 중국실 실장, 수액제 총경리, 일본과 중국의 임직원들은 이제 거의 다 타계했거나 은퇴하였다.

시대는 단순 제약산업에서 바이오의약 산업으로 변화하였으며 본사도 글로벌 기업으로 입지를 굳혔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는 말이 맞았다.


그나마 가끔씩 P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반겨주는 사람들이 아직은 남아 있다.

동시대에 중국에 파견돼 같은 고민을 끌어안고 고생만 죽어라 했던 동병상련의 공감대를 느꼈던 선배들, 그리고 한국 지사를 만들고 조직을 설계했던 주역들이다.


P가 근무했던 한국 지사의 우호지점 출신으로 중국에서 별도 법인을 설립하여 피땀 흘린 이들도 있었는데 P와 함께 중국 의약품시장의 재건에 앞장섰던 선배들이었다.

그들과는 지금도 의형제를 맺고 교류하고 있을 만큼 친하다.


특히 별도로 만든 의약품 법인의 총경리는 내륙 오지로 이동하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같이 일하던 일본인 동료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중국인 통역은 허리를 다쳤고, 자신은 팔과 어깨에 철심을 박는 대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새 회사에 GMP공장을 짓느라 몸도 돌보지 못할 정도로 고생을 하였다.


그는 사고 후유증으로 팔이 굽혀지지 않게 되었는데, 이것을 중국에서 얻은 훈장이라고 해야 하느냐며, 씁쓸한 미소를 짓곤 하였다.

몸까지 망가지며 일했는데도 정작 본사의 평가는 높지가 않았다.

일주일 출장 와서 겉으로만 현지 시찰을 한 본사 감사반의 평가는, 더디디 더딘 업무 스피드와 낙후된 모습만 보고 박한 보고서를 올렸으니, 오지에서 고생한 사람들의 사기만 꺾은 셈이었다.


그런 평가는 P에게도 마찬가지여서 2년간 연봉이 동결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중국실 실장은 냉혹하고도 잔인하였다.


중국에서 일했던 많은 일본의 임직원들은, 신기루 같은 높은 성과만 추구하는 본사의 과욕과 동떨어진 낙후된 현실 세계에 파묻혀 일했고, 인프라도 없는 중국 오지에서 첨단을 달리는 시대의 도쿄 오사카와는 전혀 다른 열악한 환경에 처해 고생을 많이 했지만 썩 좋은 평가를 받지도 못하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귀국해서도 한직을 전전하며 고생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한 냉정함에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훔치다가, 가끔씩 P와 만나 맥주 한잔에 서로를 위로하는 덕담을 건네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아직도 뜨거운 우정을 간직하고는 있지만 그들도 벌써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P가 꼭 한국의 대통령이 되어 한일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서로가 미래를 향해 젊게 살아가자는 농담을 하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현재 맛보고 있는 결과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눈물과 땀이 배어있는 숨겨진 노고가 묻어있는 것이고, 희생 없는 열매는 얻을 수가 없다는 큰 교훈을 얻은 중국 생활이었다.


사람 한 명이 조직을 바꿀 수는 없어도, 그 사람의 방향성을 따라가는 직원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조직 자체가 바뀐다.

아직 마케팅에 미숙함이 많았던 조직에 P라는 지도자가 들어오면서 '우리 회사도 이런  리더가 있다!'라는 자신감을 만들어주었던 것이 조직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

좋은 지도자는 팀 문화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

모든 것은 지나간다


개울가에 앉아 무심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우리가 겪는 것은 모두가 한때일 뿐.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세월도 그렇고 인심도 그렇고

세상만사가 다 흘러가며 변한다.


인간사도 전 생애의 과정을 보면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지나가는 한때의 감정이다.

이 세상에서 고정불변한 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일이란

 자신이 지금 당장 겪고 있을 때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지내 놓고 보면 그때 그곳에 그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이 세상일에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우리 스스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과

그 고통을 이겨 내기 위한 의지적인 노력은 다른 한편 이다음에 새로운 열매가 될 것이다.

이 어려움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는가에 따라 미래의 우리 모습은 결정된다.


-법정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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