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미아 4장 2화
서울의 아시아사업부-2
회장 H는 본사의 긴급 지시업무를 수행해야 할 때마다 마땅한 적임자가 없으면 P에게 일감을 몰아주었다.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모든 부서의 1년간 업무를 집대성하는 Annual Report(연례보고서) 작성과, 신년 업무계획서를 통합하는 일이어서 연말연시에는 눈코 뜰 새가 없었다.
H의 월간 업무보고서도 대신 작성해줘야 했고, 매월 2번씩 열리는 아시아 지역 최고 의결권자 미팅 자료도 만들어줘야 했다. 덕분에 자료 작성 능력은 일취월장하였다. 하지만 H는 까다롭고 변덕이 심해서 수시로 자료의 수정을 지시했으며, 원고도 따로 작성해줘야 했다. 아울러 모든 행사의 인사말 작성도 P의 몫이었다.
H는 단순하게 구술하였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살을 붙여서 제대로 된 원고를 만드는 것은 지식 근로자의 중노동이었다. 그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했는지 H는 가끔 저녁식사 자리를 만들어 고마움을 표했다. 3월이면 주주총회가 개최되었고, 총회 자료로 넣어야 할 1년간 업무보고 작성도 P가 해야 할 일이었다.
IT가 발달해 가던 시절, 본사에서는 학술적인 마케팅을 강화하고자 애플사에서 출시한 iPad 프로젝트를 발족하고 아시아에서도 전개하도록 권유하였다. H는 P를 학술책임자로 겸임 배치시키고 담당 직원 한 명을 붙여주면서, 새 시대에 맞춰서 아시아 마케팅에 활력을 불어넣도록 조직을 정비하였다.
새로운 변화를 좋아하던 P는, iPad를 활용하여 모든 마케팅과 학술 정보를 취합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냈다. 각 나라에서 영업마케팅 활동에 쉽고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창의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각 지사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덕분에 첨단 테크놀로지와 친하게 된 효과도 있었다.
각국 지사에는, 자체적으로 발행하는 판촉물에 대한 규정과 IFPMA(International Federation of Pharmaceutical Manufactures & Association) 글로벌 가이드라인을 확인하는 제품정보심의위원회가 조직되도록 유도하였다. P는 이 위원회를 총괄하여 전 아시아 지사들이 올바른 학술 마케팅의 방향성을 정립할 수 있도록 리드해 나아갔다. 각국의 지사에서는 자체 조직을 재정비하고 첨단 IT 도구를 활용하여 학술적이고 과학적인 마케팅을 구현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계기가 되어 환영의 뜻을 표하였다.
사업부의 지시에 따라 각국의 경영 현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작성하는 전략 캔버스의 실행도 추진하러 각 지사를 순회하였다. 어떤 것이 그 회사의 레드 오션이고 블루 오션인지 자체 분석하게끔 하였다. 각 지사의 사장단과 논의하여 블루 오션을 찾아 나서게 만드는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각국에 IT 담당부서가 구축되도록 안내하였다. 그때까지 외주를 맡겨 IT를 관리하다 발생되는 바이러스 침투와 해킹 등, 정보관리 환경의 리스크를 방지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안정화를 도모하였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반년에 걸쳐 국내 최고의 IT 전문가를 찾아내느라 애를 먹었다. 전문가를 등용하여 그와 함께 구축해 낸 시스템 정립은 본사를 능가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서, 미국이나 유럽의 첨단적인 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이 담당자는 곧 아시아를 대표하여 글로벌 IT 무대에서 활약하며 한국의 위상을 높였고, 한중일 미팅과 글로벌 미팅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P는 IT 업무의 표준화 작업과정에서 익힌 리스크 관리에도 주목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대두된 기업 전반에 걸친 윤리 경영, 부정부패방지와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도 투입되어 아시아의 준법감시인(Compliance Officer) 역할도 수행하였다. 특히 컴플라이언스 교육은 의약품과 음료부문의 모든 자회사가 망라된 하나의 의식개혁운동으로 승화되었다. 한 나라에 출장을 가면 동시에 의약품과 음료를 다루는 두 회사를 대상으로 별도 교육을 시켰다. 처음으로 음료사업의 깊숙한 현실까지 파악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지사장들은 P를 저승사자 보듯 하였지만, 엄연히 내부감사팀이 따로 있었기에 컴플라이언스 교육은 예방목적임을 이해시켜 가며 주의환기와 의식개혁 운동에 앞장섰다.
한국에서는 2016년 말에 이른바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접대문화가 확 바뀌었다. 연이어서 미투(me too) 운동도 전개되어 누구나 성희롱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P는 한국의 여러 지사들 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사를 순회해하며 교육과 계몽에 힘을 기울였다. 부정부패가 만연된 아시아의 영업 풍토에 경종을 울리고 주의를 환기시킨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따로 기술하기로 한다.
감사에 대응하는 일도 주된 업무 중 하나였다. 감사는 회계감사뿐만 아니라, 내부감사팀이 더 막강하였고, 이들은 경영의 전반적인 상황을 점검하러 수시로 각국에 방문하였다. 특히 P가 몸담은 회사는 본사 100% 투자법인이었으니 타의 모범을 보여야만 했다. 게다가 모든 경비를 본사에서 받아쓰는 처지였으므로 늘 점검대상이었다.
감사는 조직 활동 전반, 그리고 경비 사용 등에 대한 회계감사까지 철저히 이루어졌는데, 이런 일은 항상 H가 P를 앞세워서 대응하고 해결하도록 지시하였다. H를 포함한 모든 임직원들이 감사 대상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던 지옥의 일주일이었다. 감사 준비를 하고, 감사를 받고, 지적사항에 대응하는 후속작업에 족히 3개월은 걸렸다.
P가 몸담았던 회사는 모든 활동 경비 내역을 매월 빠짐없이 보고했으나, 별도로 매년 받아야만 하는 내부감사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에 맞춰 이루어졌다. 당시 본사의 지주회사는 막 IPO를 하였고, 그것에 발맞춰 아시아 각국의 규정과 규범을 재정비하기 위해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글로벌 회계법인에서 만든 규범을 가장 먼저 시범적으로 운용한 모델케이스의 대상이 P의 회사였고 체크항목이 과도할 정도로 많았다.
본사는 회계장부에 있어서도 ERP 시스템을 도입하여 정확히 정리할 것을 주문하였다. 경비 사용이 어떻게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사용되는지 치밀하고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P가 일하는 동안 강남역 부근에서만 네 번이나 사무실을 이전하게 되었는데 입주 사무실 결정을 위한 검토와 인테리어 작업도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서 진두지휘하는 업무도 수행해야 했다. 임직원들이 쾌적한 분위기에서 근무하도록 사무실은 세련된 감각의 1인 웹미팅 회의실에 수면실까지 갖추었다. 출장이 많고 업무에 지친 직원들에게 아늑하고 첨단 환경을 제공하도록 설계하였다.
P는 여러 업무를 맡아가면서 아시아 각국에 대한 출장이 급증하였다. 과거에는 일본과 중국 위주로 출장을 다녔다면 이제는 동남아시아에서 터키까지 날아가야 했고, 호주도 관할 지역이었다. 심지어 아프리카 대륙인 이집트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깝게는 중국과 대만, 홍콩이 있지만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등에도 지사가 있었다. 때문에 한 달에 최소 한두 번 이상은 해외출장을 나가야만 했다.
P 외에도 마케팅과 약사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 역시 출장이 잦았다. 그런 상황에서 출장에 관련된 여비교통비규정을 만드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작업이었다. 출장을 가는 것은 본인이 원한다고 해서 바로 가지 못하였고 반드시 명확한 목적이 기재된 사전 승인서를 제출해야 했으며 심의를 받아야 승인이 났다. 출장 시의 활동은 미리 제출한 계획에 맞춰서 수행하고, 각국 사장단 또는 담당자와 협의를 하고 현안을 토의하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각 나라의 수준을 한국 레벨로 끌어올리는 작업이 상당히 중요한 주제였다. 귀국하고 나면 반드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매주 월요일 주간 조회에서 출장에 대한 결과 발표회를 가졌다. 이 모든 작업은 기록으로 남겨 객관화를 꾀하였다.
여직원들 대다수는 약사면허 소지자였는데 외국어를 잘할 수 있어야 근무할 수 있었다. 출장이 잦아서 비타민뿐만 아니라 보약을 먹어 가면서 각국을 날아다녔다. 사무실 냉장고에는 각종 한방약과 영양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홍삼은 필수품이었다. 체력적으로 상당히 힘들었겠지만, 그녀들은 글로벌 업무를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몸을 던졌다.
아시아 현지에서는 자신들의 마케팅 능력과 약사업무 처리 능력, 그리고 준법경영이나 IT 레벨이 글로벌 수준으로 올라서는 것에 대해 환영의 뜻을 표하였다. 덩달아서 출장 일수는 나날이 늘어났다. 회사에서는 반드시 귀국 전 하루는 현지 탐방의 기회를 부여하여, 출장에 지친 심신을 달래고 그 나라 문화를 파악하도록 권유했다.
각종 국제학회에 참석하여 최신 견문을 넓히고 인맥을 구축하는 기회를 부여받은 직원들은 신이 나서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본사인 일본과 글로벌 거점인 미국과 유럽도 출장 국가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진정한 글로벌 업무였다. 그러니 성격적으로 내성적인 직원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하기도 했다. 지금의 MBTI 기준으로 보면 I 타이프는 못 버티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조직 자체가 E로 시작되는 집단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201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아시아도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전 세계 글로벌 미팅에 같이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P는 아시아 각국 사장단을 서울로 초청하여 현안을 논의하고 마케팅 기법과 메디컬 업무에 대한 정기 회의를 기획했다. 가을에는 그 해의 업무 결과에 대한 반성 및 내년도 목표 설정, 그리고 예산 확정을 위한 순회 미팅도 마련했다.
목표 수치와 전략을 점검하는 경우에는 담당 PMM들을 중심으로 H와 P를 포함한 한 팀을 편성하여 여러 나라로 이동하였다. 각 지사를 돌면서 현장의 눈높이로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경영 조언도 하며 정보 교류를 꾀하는 유익하고 효과적인 미팅이었다.
모든 아시아 지사마다 제품 담당 PMM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따로 모아서 개최하는 아시아 PMM 워크숍도 매년 기획되었다. 약사 업무와 의약품 부작용보고를 취합하는 전체 메디컬 미팅도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어서, 늘 대형 이벤트가 예정된 나날이었다.
PMM들은 아시아 전체를 하나로 묶어 결과를 도출하는 다국적임상을 기획하고 모니터링하였다. 그 결과는 P가 한국 지사에서 실행했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반드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학저널지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발표된 논문 숫자가 100편을 훨씬 넘어섰다.
PMM은 국제적으로 발표된 논문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강연하도록, 강연자들을 초청해서 마케팅 활동으로 전개하는 글로벌 심포지엄을 빈번하게 기획하였다. 이런 행사를 PMM이 개최할 때마다 강연자들의 경비를 추적해서 보고하는 내부 시스템도 있었다. 해외 의료관계자 초청강연회를 개최하려면 미국은 Sunshine Act, 유럽은 IFPMA Code, 일본은 투명성가이드라인을 지켜야만 했다. 각국의 법규와 업계의 규정을 준수하여 투명한 관계를 구축해야만 진행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본사 컴플라이언스 부서에 반드시 사전 상담을 받기 위한 서류 세트(강연자 초청 신청서, 계약서, 강연료 근거자료, 영수증 양식 등)를 제출해서 반드시 승인을 받아야만 하였다. P는 각 PMM들이 강연자의 강연료와 항공료, 호텔 숙박비, 교통비, 교제비 등에 대해 미국, 유럽, 일본과 한국 등에서 유명 교수를 초청할 경우 각국별 그리고 글로벌 경비사용 가이드라인을 지키게 하였다. 그 사전승인과 사후점검 및 감독관리하는 내부 시스템도 확립하였다.
PMM들은 늘 절차를 지켜 까다롭게 심사하고 승인을 해주는 P와 티격태격하였다. 공격과 수비의 다툼이었는데 PMM 출신이면서 왜 그렇게 엄격하게 심사하느냐는 불만도 들었다.
중구난방으로 진행하던 경비사용을 적절히 통제하기 시작하였고, 마케팅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회의장 경비나 식사 메뉴까지 점검하였다. 마케팅 입장에서 보면 악역을 맡은 것이었지만 P 본인이 직접 경험해 본 일들이었기에 오히려 현장의 불만을 잠재울 수가 있었다.
모든 국내 및 해외 계약서의 사전 검토와 모니터링, 파일 관리도 진행하였다. 변호사도 아니고 법대출신도 아닌 P가 이런 일을 수행한 것은 혼자서 관련 법과 규정을 공부하여 대응한 결과였다. 본사의 법무팀과 밀접하게 접촉하면서 관련 지식을 익히고, 변호사에게 물어가면서 습득한 노하우를 적극 활용하며 대응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P가 몸담았던 조직에서 수행했던 업무는, 마케팅과 경영관리의 성공 사례를 만들고, 경쟁업체의 전략을 면밀히 분석한 대응책을 강구하여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는 벤치마킹도 수행했다. 자유로운 토론으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끌어내는 기획 미팅인 브레인스토밍이 주요 골격이었다. 시의적절한 관리통제를 수반하며 균형 잡힌 업무를 수행하도록 한 것은 덤이었다.
점점 한국에서의 성공 사례가 아시아 각국에 전파되어 레벨이 상승되기 시작하자, 약사 업무나 부작용보고 등의 메디컬 업무에 있어서는 글로벌 표준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의약품 부작용보고나 Medical Assurance를 하는 업무는 미국과 유럽의 글로벌 수준에 맞추도록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했다. 아시아 각국도 미국 유럽과 같이 회의에 참석을 하였기 때문에 레벨업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마케팅 미팅과 메디컬 업무 미팅에는 본사 관계자들과 수뇌부가 반드시 참석하여 활발한 의견교환을 나누었다. 미국과 유럽도 아시아의 상황을 참고하도록 유도하여 열띤 분임토의를 거듭하였기에 상당히 커다란 의미를 갖는 지구촌 대축제로 확산되었다.
늘 많은 현안들이 있었기에 미국과 유럽, 아시아가 일본 본사와 함께 소통하는 회의가 많았다. 보통 그런 경우에는 시차를 고려하여 한국 시간으로 자정 무렵에 전화회의나 웹미팅 연결을 시도했다. 여직원들이 상당히 고생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회의는 영어 발표가 원칙이었기 때문에 직원들의 언어 구사력도 많이 상승되었을 것이다.
P는 새로 입사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본사 단기연수도 기획하고 추진하였다. 보통 10명 이하의 그룹을 인솔하고 도쿄 본사와 오사카의 아시아사업부, 그리고 발상지의 연구소와 공장, 국제미술관과 교토 관광까지 순회하는 일정이었다. 반드시 게스트하우스에 숙박하면서 회사의 역사와 문화를 익히게 하였다. 상당수의 직원들이 말로만 듣던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부여하였다.
한국 유명 여대의 약대에서도 학생들에게 견문을 넓혀주기 위해 똑같은 일정의 연수를 부탁하여 이것의 기획과 실행, 정산까지 집행해 주었다. 그 학생들은 이제 30대가 되었는데, 우연히 친구 딸의 결혼식장에서 P를 발견하고 멀리서 달려와 고마움을 표현한 갸륵한 약사도 있었다.
P가 몸담은 기업은 본사인 일본에서 미국 유럽에 맞춰 아시아를 하나로 통합하여 결집시키는 헤드쿼터 업무를 요구했기에 힘들긴 했으나 보람찬 날들이 이어졌다. P는 직원들과 함께 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 임상시험, 경비 편성과 점검, 사내교육, 업무 미팅 등을 통하여 각국의 특징들이 파악되는 즐거움을 실컷 맛보았다. 공격수이자 동시에 수비수였던 시절이었다.
이런 것들은 18년의 업무내용을 압축해서 표현한 것들이지만, 모든 비즈니스 상황에서 일어나는 활동들이 거의 다 망라된 것이다. 모든 영역에 TFT(Task Force Team)의 일원이자 지휘자로 뛰어다닌 것인데, 특정 목적이 달성되면 다음 목적으로 옮기거나 계속 겸직하며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H는 P에게 두루두루 일을 경험하게 하였다. 후계자 수업을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P의 강점을 적극 활용하여 본인 연명을 위한 용도로 활용하였던 측면도 있었다. P는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서 해야만 했다. 노욕(老慾)은 무서운 것이어서 H는 9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를 용인한 본사도 대단하였다. 하지만 P를 어르고 달래며 조직을 이끌고 간 H의 용병술이 더 빛났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P는 마리오네트 역할을 18년간 수행하였다.
2004년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오너의 눈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P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18년간 권좌를 유지하던 H, 그는 이제 영면해 있으니 아무런 말이 없다. 하지만 모진 풍파를 견뎌내며 H를 보좌해 온 P는 입술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인내하며, 지난날을 회고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