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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Mar 02. 2024

강남역 미아 4장 1화

서울의 아시아사업부-1

P는 2004년에 중국에서 귀국하였다.

북경과 천진을 기반으로 성장한 중국의 수액제 조직에서, 2002년에 P의 부임을 계기로 의약품 조직만 따로 떼어내서 만든 상해를 기반으로 한 치료약 전문 회사를 발족시키고서 돌아왔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맥킨지 컨설팅의 조언에 근거한 본사의 체제개편으로 만든 아시아사업부 역할은 각국의 지사들을 하나로 통괄하며 경영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P가 배속된 서울의 신생 회사는 아시아사업부의 서울사무소 버전으로, 2004년 여름에 기존의 한국 지사에 있던 국제사업부를 떼어내서 만든 마케팅과 약사(藥事) 업무로 특화시킨 글로벌 조직이었다.


P는 전문 치료약 5개를 중심으로 구성된 아시아 담당 PM들을 지원하는 입장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가 한국에서 줄곧 몸담아 왔던 한국 지사는 영업과 생산을 하고 있었지만, P가 속한 회사는 헤드쿼터 역할을 수행하였다.

소위 Regional office라고 불렸다.


본사에서는 P가 중국에서 돌아왔으니 중국 가기 전 연봉으로 회귀시켜 놓았다.

냉정한 오너의 지시였다.

PM도 아니었기에 수당도 받지 못하고 기본급만으로 생활을 하는 빡빡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내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 집을 구하고 애들을 학교에 배정하며 중국의 색깔을 빼내야만 했다.

P는 저녁이 없는 삶을 시작한 샐러리맨으로 부활하회장을 보필하였다.

다시 강남역 근처를 맴돌기 시작했다.


P는 여러 가지로 자존심이 상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순신 장군의 심정을 떠올리며 일단 현실에 순응하기로 하였다.

위에서 시키면 따라야 하는 것이 직장인 신세인 걸 어찌하겠는가?

절이 싫으면 스님이 나가는 것이 진리다.


P의 얼굴은 회장과 웃으며 식사하면서도 머리로는 수없이 퇴사를 고민해 봤지만, 아직은 P가 해야 할 뭔가가 있을 것 같아 쉽게 그만두지 못했다.

하지만 소문을 들었는지 헤드헌터들이 연락을 해왔다.

회사를 옮기기에 딱 좋은 40대 중반이었다.


미국의 거대 기업에서 임원 자리를 제안했지만 처우가 별로 내키지 않아서 거절했다.

어느 날 어떤 헤드헌터가 북경에서 일하는  자리로 연락을 해왔기에 도대체 어떤 회사인지 알아보러 커피 한잔을 같이 하였다.


그는 당시 국내 거대 기업을 추천하였는데 야심 차게 중국 진출을 추진하고 있던 회사였다.

또다시 중국에서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국 기업이 중국에 들어갈 때의 조언을 해줄 겸 또 유명한 오너 회장과 독대의 기회를 마련해 줬기에 면접에 임하였다.


언론에서만 봤던 자수성가한 오너 회장님과 단독면담을 했는데, 화려한 회장실을 보고 왠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 당시 잘 나가던 성공신화의 주인공인 회장실은 커다란 자사 건물의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는데, 벽에는 온갖 종류의 상장과 상패, 트로피, 그리고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P가 몸담았던 기업의 오너는 중국에서 조기 귀환한 P를 멀리하고는 있었지만 아시아의 갑부에 낄 정도로 부자였는데, 회장실은 그리 크지 않았고 소박한 인상이었다.

내실을 기하는 일본인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차이인가?


P는 언젠가 한일 공동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유심히 양국의 유명 교수들을 관찰한 적이 있었다.


일본은 백발이 성성한 교수가 다 낡은 가방에 감색 상의, 회색 바지, 빛바랜 구두를 신고서 65세까지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한국은 40대 중반의 교수가 윤이 흐르는 명품 가방에 검은색 싱글 양복, 번쩍이는 구두를 신고 미국 유학 시절부터 연구한 결과를 자랑스럽게 발표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차이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검소함과 화려함, 드러나지 않게 입는 의복과 튀는 모습을 선호하는 기풍, 연령과 연륜이 묻어나는 슬라이드 작법에 내면의 깊이와 표현 방법 등이 대비되면서 학자의 풍모는 어디가 적합할까 상상해보기도 하였다.


회의 석상에 참가한 양국 교수들의 모습도 판이하게 달랐는데, 아날로그 일본은 두툼한 파일을 꺼내놓고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면, 디지털 한국은 노트북을 봐가면서 활달하게 농담을 섞어가며 회의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양보의 미덕에서 비롯된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이 원하던 것은 거의 다 수용됐고, 한국이 원한 것은 보류가 많았다.

웃으면서도 냉정하게 실리를 챙기는 민족과, 언성은 높았지만 야무지게 매듭짓지 못한 민족성의 차이였을까?


각설하고 P는 그동안 같이 일했던 국제사업부 직원들이 그대로 한국 지사에서 넘어왔기에, 그들과의 의리를 저버리기도 어려웠다.


국내 기업에서 임원을 몇 년 하면서 경력을 쌓고, 또 다른 기업에서 CEO를 하다 국회의원도 입후보할 수 있다는 달콤한 헤드헌터의 유혹을 뿌리치고 말았다.


면접 본 회사에서는 중국 프로젝트의 적임자라며 자료제출만 하면 즉시 입사를 통보하겠다고 연락해 왔으나 임원들의 사관학교라 불릴 만큼 군기가 센 조직에서 개성을 죽여가며 살기는 싫었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지는 않지만 후회는 없었던 결정이었다.


P의 회사는 이제 막 돛을 올리기 시작하였고, 글로벌 조직의 꼴을 갖춰 나가려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였기에 절대적으로 P라는 존재가 필요했던 시기였다.


이전 한국 지사에서 국제사업부 담당 부회장이었던 H는 회장으로 승격되어 오너의 배려로 신생 조직을 이끄는 분이었는데, 오너보다 10살 위였다.


S대 의대를 졸업한 수재였고, 긴 미국생활과 M.D.(Doctor of Medicine)에 Ph.D(Doctor of Philosophy)의 학위는 글로벌 이미지를 부여하기에 매우 매력적인 스펙이어서 오너의 간택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일어와 영어가 자유스러운 한국 태생의 미국 시민권자였다.


P가 중국으로 떠나 있던 2003년, 한국 지사에서는 신제품 도입에 얽힌 견해 차이와 그동안 쌓인 경영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된 대규모 내부 분규가 발생했으며, 노조까지 생기게 되었다.


H는 분규의 갈등 속에서 오너의 뜻을 지지하였고, 젊은 대표가 끌고 있던 한국 지사와 결별하고 신생 회사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77세였지만 누구보다 건강해서 60대로 보였다.


H는 오너의 미국 진출을 위해  스카우트되었다가 한국 지사를 돕기 위해 대관업무와 마케팅, 임상시험에 본인의 인맥을 활용하였는데, 당시 그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제자나 현지에서 도움을 받았던 교수들은 그를 H박사님이라 불렀다.


영업과 마케팅, 그리고 대관업무를 수행한 개발부 직원들은 그를 하늘같이 여기고 현장에 동행하길 희망했다.

그만큼 H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알고 있었으며, 일본과 한국의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

아마도 그것이 그를 지탱한 힘이었을 것이다.


H는 P의 처가가 본인의 고향 근처라서 더 각별히 아껴주었고, 남들 앞에서는 P를 자신의 양아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P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립서비스였을지도 모른다,


P는 중국에 있을 당시 본사의 움직임과 오너의 의중을 파악하여 H와 한국 문제의 타개책을 상의하기도 했지만, 물리적으로 몸이 떨어져 있는 현실에, SARS로 인해 일시 귀국이나 출장도 금지되어서 동고동락한 직원들과 교감을 나누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경영의 화근을 없앤다는 방침을 정한 본사의 결정으로 회사를 키워온 수십 명의 베테랑들이 짐을 쌌고, 한국 지사는 새로운 외부세력의 피를 수혈하기 시작하였다.


본사가 파견한 1세대 사장에서 젊은 한국인 대표로 바뀌어 가던 과도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분을 못 참고 회사를 떠난 동료들은 의약품과 무관한 일을 찾아 나서 그들 맘속의 서운함을 보는 듯하였다.


당시 현장에 없었던 P는 두고두고 이를 애석해했으며 사석에서 그들을 만나 위로하고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벌써 그들도 환갑을 지나고 있지만 아직도 마음만은 20년 전의 서운함에 갇혀있는 듯하다.


외부에서 스카우트된 사람들은 주로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기업에서 성장해 온 서양물을 먹은 약사나 MBA들이었다.

한국에 기반을 둔 글로벌 조직은 없었기에 헤드헌터들은 신이 나서 유능한 인재들을 소개하였다.


바야흐로 아시아사업부 체제 발족에 발맞춰 일본만의 색깔에 서양의 칼라가 덧입혀지기 시작하였고, 다양성을 추구한 이념 구현은 서울이 그 실험무대였는데, 여기서 P는 박힌 돌의 역할이었다.


외부에서 영입된 사람들은 늘 이런 불만을 내뱉었다.

"내가 근무하던 글로벌 기업에는 이러이러한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그게 왜 없나요?"라는 주문이 많았다.

H는 그럴 때마다 창업주의 기업이념이나 아시아 기업의 유연한 장점을 들어가며 이 그룹만이 가진 특유의 도전정신과 창의성을 DNA로 이식할 것을 강조하며 불만을 차단하였다.


당시 오너는 '동서역전'이란 책을 나눠주며 반드시 서양식 문화나 경영법이 능사는 아니라며 오히려 동양의 강점을 서양에 전파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대세는 글로벌라이제이션, 글로벌 스탠더드를 부르짖으며 시스템으로 움직이던 서양의 목소리가 더 컸던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P는 가끔 동서양의 분기점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하지만 시스템 구축의 몫은 기획담당인 P의 과제로 넘겨져 왔다.

고령의 H는 본인이 직접 개입하기 힘든 일들은 P에게 넘겨 해결시켰다.

P는 부하직원도 두지 않고 외자기업의 장점과 시스템을 배워가며 이 회사에 맞는 옷을 찾아 입혔다.

특공대 해결사였다.


P가 귀국할 때 기존의 한국 지사와 신생 회사를 놓고 선택권을 부여받았었는데, 당시 P는 별 주저 없이 H의 새 회사를 택하였다.

기존의 한국 지사에는 P랑 친했던 동료들이 옷을 벗은 상태였고,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직원들이 이미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별로 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 큰 이유였다.


P가 선택한 회사는 조직의 머리인 H를 구심점으로 하고, P는 허리 역할을 맡고, 밑으로는 발로 뛰는 직원들을 다독여가며 3위 일체를 이뤄내야만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아시아의 레벨업을 추구하는 글로벌 마케팅과 글로벌 약사업무(Regulatory Affairs)의 중심체였고, 그룹의 세계화를 추진하던 오너의 직속 조직이며 아시아사업부의 핵심부대였다.


수시로 바뀌던 아시아사업부의 사업부장은 H에게 전권을 맡긴 오너의 눈치를 봐가면서 이 조직을 활용하여 자신의 목표를 맞추려 애를 썼기에, 안건이 있으면 협조적으로 임해주어 한국 스태프들이 일하기는 편한 환경이었다.


아시아사업부에서는 정기적으로 지역책임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상반기 결산과 하반기 계획발표를 여름에, 1년 종합결산과 신년 계획을 발표하는 연초 미팅이 큰 줄기를 이루는 글로벌 미팅이 있었다. 


각국의 사장단과 본사 관계자, 그리고 아시아사업부와 P의 회사도 참석한 이 미팅은, 100명도 넘는 인원이 성황을 이루는 잔치 마당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반년에 한 번씩 아시아 사장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P가 몸담은 회사의 상당수가 발표자나 사회자로 나서며 회의를 이끌어나갔다.


P는 이런 기회마다 중국 재임 시절에 만났던 중국인 총경리들이나 일본인 총경리들을 만나서 과거를 회상하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거나 현황을 들어보았다.


여러 안건을 협의하고 지원 방안을 검토하는 자리를 마련했는데, 중국은 P가 떠난 이후 후임 총경리들이 수시로 바뀌어서 만날 때마다 얼굴이 달랐다. 격변의 시대였다.


아시아사업부에 소속된 중국 이외의 국가들도 10개를 훨씬 넘었기 때문에 수많은 아시아 지사들의 현황 발표를 듣고, 커피 브레이크 타임이나 런치나 만찬 때에 그들과 섞여 앉으며 많은 정보를 서로 교환하게 되었다.


아시아 글로벌미팅에는 치료약뿐만 아니라 수액제나 의료기기, 그리고 영양제품 회사들도 다 같이 참석하였기에, P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룹사 전체에 대한 안목이 높아지고 시야도 넓어지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다.

넓은 인맥이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P는 마케팅 기획 업무, 해외지사들을 상대하며 업무를 교류하는 대외업무, 사내 내근부서를 통합하는 경영기획 업무까지 맡아 H를 보좌해야 했다.

각국을 대상으로 한 업무 교류미팅과 예산 미팅까지 추진해야 했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어느덧 중국 재임시절이 꿈처럼 아스라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중국에서 배운 노래를 노래방에서 흥얼거리며 추억을 되살리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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