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결재선
강남역 미아 제2부 2장 8화
- 보이지 않는 결재선
1. 권력의 침묵
회사에는 늘 존재하지만 아무도 문서로 설명하지 않는 것이 있다.
조직도에도 없고 인사규정에도 없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다.
결재선보다 먼저 존재하는 또 다른 결재선.
회장이 떠난 뒤, 회사는 놀랍도록 조용해졌다.
아침 회의가 30분 빨라졌다.
출장 일정은 정확해졌다.
영수증 처리 속도도 빨라졌다.
전자결재도 드디어 정상 작동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처음엔 효율이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건 효율이 아니라 권력이 이동한 신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질문하는 조직
일본 본사에서 법인장 겸직으로 내려온 아시아 사업부장은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했다.
“왜 이 숫자가 나왔죠?”
그 질문 하나면 충분했다.
회의실 공기가 굳었다.
누구도 대답을 길게 하지 않았다.
설명은 짧아졌고 보고서는 길어졌다.
회장은 결재를 늦췄지만, 지금은 결정을 늦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 다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3. 책임 없는 속도
어느 날, 재무팀장이 조용히 말했다.
“저... 요즘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결재는 빨라졌는데... 아무도 책임을 안 집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면 일이 멈추고,
권력이 흩어지면 사람이 멈춘다는 진리.
지금 회사는 후자였다.
4. 공기 속의 승인
예전에는 회장실 문 앞에 결재판 줄이 섰다.
지금은 줄이 없다.
대신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본다.
보고서를 올리기 전에 먼저 메신저와 전화로 공기를 읽는다.
“본사 의견은 어떻습니까?”
“이 방향 괜찮겠습니까?”
“혹시 리스크가 있습니까?”
결재는 시스템에서 이루어졌지만, 판단은 공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5. 이름이 사라지는 문서
그는 자신의 이름이 문서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그가 처리했다”는 증거가 남았다.
지금은 “아시아 사업부 협의 결과”로 남았다.
책임이 사라진 조직은 사람을 지워버린다.
6. 방향 없는 효율
그날 저녁, 그는 강남역을 걸었다.
퇴근 시간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회사도 저들과 같았다.
방향은 있지만 목적지가 없다.
회장이 있을 때 회사는 느렸지만 그래도 한 방향이었다.
지금 회사는 빠르지만 방향이 없다.
회장은 권력이었고,
본사는 시스템이며,
지금 회사는
관리되는 조직이 아니라,
관리 회피 조직이 되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7. 판단 요청
다음 날 아침, 그는 보고서를 하나 수정했다.
‘결재 요청’이라는 제목을 지우고 새로운 제목을 달았다.
‘판단 요청’
그리고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몇 분 뒤 답장이 왔다.
“추가 검토 후 회신 예정.”
그는 피식 웃었다.
회사는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결국 아무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이 조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
8. 남아 있는 사람
강남역 출구 위로 밤 전광판이 켜졌다.
그는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누군가의 오른팔도, 대변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떠나지도 못했다.
조직은 떠나는 사람보다,
남아 있는 사람을 더 오래 붙잡는다.
그는 다시 회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결재선은 사라졌지만,
보이지 않는 선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