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에 존재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와 침대 위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이 침대 위에서 했던 생각들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 됐다.
감정의 폭풍이 몰아친 하루였다. 연습 경기까지 뛰고 오니 몸도 마음도 정말 피곤했다. 터질 것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코치님이 아까 나를 잠깐 불러서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많은 생각하지 말고 지금만 생각해 봐." 이게 무슨 뜻일까? 침대 위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만 생각해 보라니... 지금 난 뭘 하고 있지?
나는... 그냥 침대에 편하게 누워 있었다.
"나는 그냥 침대에 누워 있구나."
그 순간,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과 침대 매트리스가 내 몸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느껴졌다.
갑자기 깨달았다. '아, 이게 바로 지금만 생각하는 거구나!' 정신을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니 이불의 감촉, 매트리스의 포근함, 두 다리를 편히 뻗고 누워있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편히 누워 있음에 왠지 모를 감사함까지 들었다. 모든 복잡한 생각들이 제 발로 문을 열고 머릿속에서 나가 주었다.
이걸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죽지 않나... 이건 너무 잔인한 비유다.) 아무튼, 그런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이거다!" 하는 느낌.
나를 괴롭히던 고민과 걱정, 불안, 부담감, 긴장감은 모두 미래에 대한 상상과 생각들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현재에 존재하지 못해서 고통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현재에 존재하자.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밥 먹을 생각만 하고, 오전 운동이 두려우면 밥 먹고 잠깐 쉰다는 생각만 하고, 오전 운동에 나가면 그냥 운동하고 있다는 생각만 하고, 그다음 점심 먹을 생각만 하고, 그리고 낮잠 잘 생각만 하고, 일어났으면 오후 운동을 한다는 생각만 하고, 끝나면 저녁 먹을 생각만 하고, 저녁 먹으면 쉬는 생각만 하고, 자러 갈 때는 그냥 잔다는 생각만 하고... 그렇게 단순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가지기 힘든 능력이라 생각한다. 나는 원래 상상력이 엄청난 사람이다. 내 머리를 열면 큰 테마파크 하나가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 미친 상상력이 나를 미쳐버리게 할 때가 많아서 문제다. 항상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상상과 생각들로부터 스스로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의심, 불안, 걱정들이 파생되었었다.
그래서 단순하게 살아가고자
생각 없이 살기 위한 생각들을 나의 무의식에 열심히 건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쉽게 되지 않았다. 인간은 의식보다 무의식에 지배당할 때가 많다. 여태껏 사고해 온 체계들이 무의식에 남아 있어서 현재에만 집중하려 해도 무의식적으로 나의 정신이 미래 또는 과거를 떠돌아다녔다.
생각들은 전개하려면 언어가 필요하다. 긍정적인 생각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매일 일기장에 "지금에만 존재하자", "지금 내가 하는 행위에만 몰입하자", "현재를 살자", "주어진 것에만 집중하자" 같은 글들을 매일같이 적으며 다짐했다. (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방법을 쓰고 있다. 이 방법을 통해 변화됨을 몸소 느꼈다.)
변화는 천천히 시작되었다. 축구화 끈을 매고 운동장에 나갈 때, "오늘 경기 못하면 어떡하지?", "실수하면 어떡하지?", "후보로 밀려나면 어떡하지?", "짤리면 어떡하지?" 같은 미래에 대한 걱정들을 멀리 치워버리려 노력했다.
볼을 터치하는 순간, 패스를 주고받는 순간, 슈팅을 하는 순간, 달리는 순간, 거친 호흡을 내쉬는 순간... 나는 내가 하는 행위들에만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축구는 다시 순수한 즐거움으로 돌아왔다. 모든 순간이 무언가를 위한 것이 아닌 그저 그 순간 자체가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축구를 하는 그 순간들을 만끽하며 즐기기 시작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 이 순간이 내가 가진 전부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현재에 존재한다면 딱히 고통받을 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 순간을 만끽하려는 태도로 삶을 대했다. 그러니 내가 느끼는 모든 순간들이 풍부해졌다. 매 순간이 내겐 전부이니 더욱 최선을 다해 살게 되었고, 무슨 일이 오든 최선을 다해 즐기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변했고, 내가 사랑했던 축구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이 날 이후로 6년쯤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이날이 나의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하고 싶었던 이 날, 고여있던 것들을 비워내고 새로운 것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 날을 돌아보며 또 한 번 교훈을 얻는다. 힘든 순간들은 내게 무언가를 알려주러 오는 것이구나. 내게 고통을 주는 그 어떤 순간들도 결국 나를 성장시켜 줬던 감사한 순간이 되어주겠구나.
그러니 아파도 괜찮고, 무너져도 괜찮다. 더 아프고 더 무너지자. 그리고 그 고통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자. 최선을 다해 부딪혀보고 맞서 싸우고 즐겨내자.
세상은 결과가 전부라고 말하지만,
주어진 모든 순간들이 결국 내 삶이고 내 전부이다.
환영하고 끌어안고 만끽하고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모두 각자의 여정에서 화이튕~!
enjoy
p.s 이전글 댓글창에 기다리다가 목이 빠져 기린이 되었다는 분들께
세계최초 기린인간을 탄생시켜 버려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