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동 May 30. 2020

지독한 불면증...다 부숴버리겠다!!! <파이트 클럽>

“인간이 질병이나 배고픔에 대해 아무런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유시민 작가가 어느 강연에서 한 말이다. 영화 <파이트 클럽>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결국에는 도시 전체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영화 속 ‘파이트 클럽’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점점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 나오는 동물의 왕국을 닮아간다. 이들은 마치 자연 상태의 원시 공동체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다시 배고픔과 질병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시기로 말이다. 영화를 진지하게 보았다면 이런 궁금증을 한 번쯤 가져볼 법하다.


왜 주인공은 애써 질병과 배고픔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할까. 왜 그것이 알 수 없는 묘한 쾌감을 주는가.


(주의: 본 게시글은 영화 <파이트 클럽>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이트 클럽>


영화를 재밌게 보았다면 그것은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파이트 클럽의 노력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아니라면 적어도 반복적인 도시 생활에 지쳐 일탈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 잭(에드워드 노튼)은 그런 파괴적인 욕망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또 다른 자아를 생성해낸다. 바로 테일러(브래드 피트)다. 잭은 파이트 클럽 초기의 모습에 만족하지만 테일러는 그렇지 않다. 테일러는 처음에는 영화 필름 중간에 야한 장면을 삽입하거나 웨이터로 일하는 가게의 음식에 몰래 소변을 누는 등 소극적인 반항을 한다. 그러다가 점점 나아가 결국에는 도시 전체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테일러가 잭에게 강요하는 자연 상태 정신은 끊임없이 점층 된다. “아직 부족해. 더 가야 해” “링컨과 간디랑 싸우고 싶어.” “직업이나 돈이 다는 아니다.” 테일러는 잭이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운전을 하다가 핸들을 놔버리는 무리수까지 둔다.


잭은 도시를 파괴하는 단계에 이르러서야 테일러를 뜯어말리기 시작한다. 자신은 완전한 파괴는 원하지 않는다며 테일러를 없애려 하지만, 정작 없애고 나서는 테일러의 파괴적인 본능을 스스로 내재화한다. 테일러와 잭은 결국 동일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능이었던 테일러를 받아들인 잭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진다. 그리고는 말라(헬레나 본햄 카터)에게 솔직한 사랑을 고백한다.


이러한 설정은 테일러가 잭에게 말했던 모든 것이 잭 스스로가 하는 말이었음을 의미한다. 심각한 불면증을 앓고 있던 잭 스스로가 강력한 파괴적인 본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전체 흐름 속에 본다면 잭이 도시를 파괴하려는 목적은 불면증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던 셈이다. 영화는 테일러가 잭의 또 다른 내면임을 밝히면서, 불면증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배고픔과 질병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파이트 클럽>


테일러가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은 정확히는 도시의 화폐 경제 시스템이었다. 영화 마지막에서 테일러는 도시를 파괴하기 직전 잭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제 신용사회(financial history)가 무너지는 꼴을 우리 눈으로 보게 될 거야(Out these windows, we will view the collapse of financial history).”


그래서인지 파이트 클럽은 도시의 소비문화를 경멸하는 모습을 보인다. 화폐 경제 시스템 하에서의 삶은 소비로 점철된 삶이다. 파이트 클럽은 테러 단체이지만 사람을 직접적으로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개개인의 생명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인다.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현대사회의 소비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노력한다. 잭의 본능이 파괴하고 싶었던 대상은 실은 도시 그 자체보다 현대사회의 소비문화였던 것이다. 모두 자연 상태와는 상반되는 것들이다.


테일러와 잭은 계속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린 누구죠?/ 단순한 소비자./ 맞아요. 우린 소비문화의 부산물이오.” “그건(이케아 가구) 그냥 물건들이 아니고, 나 자체였소.” “우린 필요도 없는 고급차나 비싼 옷을 사겠다고 개처럼 일을 한다.”

<파이트 클럽>


잭이 불면증을 겪었던 이유는 도시 생활 속에서 고립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도시의 소비문화는 고립감을  자극하고 불면증과 같은 불안증상을 유발한다. 잭이 환우회에서 잠시나마 불면증을 치유하는 장면에서 이 같은 내용이 나온다. 잭은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에게 찾아가 약을 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잭의 불안함의 원인은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통받던 잭은 우연히 ‘암환자들의 모임’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잭이 느끼는 불안함의 원인은 도시 생활에서의 고립감이었던 것이다.



소비로 점철된 삶은 우리 일상에서 두 가지 고립감을 느끼게 한다. 하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외로움이다. 게오르그 지멜은 화폐 경제가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를 연구한 철학자다. 그는 화폐 경제 하에서는 ‘인간-인간’의 관계가 ‘인간-돈-인간’의 관계로 환원되면서 개인주의가 심화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두고 “돈이 개인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킨다.”라고 표현했다. 인간관계 사이에 돈이라는 매개가 존재하면서 거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파이트 클럽>


지하철에서의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지하철에서 노약자석이 아닌 자리에서 젊은이가 앉아있다. 바로 앞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힘겹게 서 가고 있다. 앞에 서 있던 노인이 자리의 젊은이에게 말을 건다. “젊은 사람이 몸도 성한데 자리 좀 비켜주지, 에헴.” 이 말을 들은 젊은이는 기분이 나쁘다. 노인이 젊은이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노인의 머릿속에는 인간을 대하는 전통적인 관계 방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연공을 통한 서열 관계’,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유교적 전통 가치’, ‘이웃 시민으로서의 상호 호혜적 호의’ 등의 사고방식이 노인의 무의식에 자리해 있다. 반면 청년이 생각하는 노인과의 관계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그에게 노인은 그저 ‘같은 값을 지불하고 지하철 교통 서비스를 구매한 소비자’일뿐이다. “똑같이 1250원을 주고 지하철 서비스 이용 권리를 구매한 사람인데, 왜?” 청년에게 노인의 요구는 당연히 기분이 나쁘다.


영화에서 이 같은 내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잭이 처음으로 테일러를 만나는 장면이다. 우연히 기내에서 옆자리에 앉은 그들은 잠깐 동안 대화를 나눈다. 대화를 나눈 후 잭은 테일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회용 친구 중 가장 재밌군. 기내에서는 모든 게 일회용.” 기내에서 우연히 만난 잭과 테일러의 초기 관계는 돈이라는 매개로 인해 비인간화된 관계였던 것이다. 우리는 기내에서 만난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려 하지 않는다. 옆에 앉아 있는 손님을 그저 항공 운송 서비스를 구매한 다른 소비자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그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굉장한 무례를 범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항공 운송 서비스라는 상품으로 인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거리가 생긴 것이다. 화폐 경제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이런 문화를 갖고 있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선”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인도와 같이 화폐 경제가 오래되지 않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이 ‘선’을 침범하는 사례가 잦다.



현대사회(산업사회)에서 인간은 이와 같이 일대일의 거리가 멀어진 동시에 무수히 많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모두 돈을 매개로 말이다. 도시생활에서 우리는 필요에 따라 수많은 다른 사람을 만난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사고 출근을 할 때까지 우리는 수많은 사람과 마주친다. 그와 더불어 직접 만나지는 않지만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지해가면서 산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하나가 나오는 데는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친다. 그것은 그들의 이타심 때문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도시에서는 화폐를 매개로 수많은 역할 분업이 이루어진다. 끼니를 한번 해결하는 데도 우리는 필요에 따라 수많은 다른 가게를 방문하고 수많은 다른 사람을 만난다. 도시에서 우리는 양식을 먹기 위해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고, 초밥을 먹기 위해 일식집에 가고, 그것도 부족하면 새로운 퓨전 음식점을 찾는다. 도시에서의 소비 생활은 돈을 매개로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수많은 관계를 맺게 했다.


반면 농경사회에서는 이와는 다르다. 그곳에서는 모든 생활방식과 생존을 돈이라는 매개체에 의지해 생활하지 않는다. 농경사회에서 우리는 몸이 아프면 동네 어르신을 찾아가고, 걱정거리가 있어도 동네 어르신을 찾아가고, 제사를 지낼 때도 동네 어르신을 찾아갔다. 사이가 좋으면 서로의 사회적 안전망이 돼주기도 한다. 몸이 아프면 죽을 끓여다주며 걱정해주고 대신 농사일을 봐주기도 한다. 죽 가게에서 죽을 사고, 나를 돌봐줄 간병인을 고용하고, 병가를 써가며 집에서 쉬어야 하는 도시에서의 생활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파이트 클럽>


소비문화가 자극하는 또 다른 고립감은 도시 생활에서 느끼는 공허함이다. 영화에서 잭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케아 가구를 마구 사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 일뿐 그가 느끼는 외로움은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뭔가를 사들이지만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다. 그것은 도시에서의 소비문화가 끊임없이 ‘결핍’을 조장하는 물리적 환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잭이 이케아 제품을 사는 것은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이케아의 카탈로그를 보고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케아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부족함을 만들어내는 데 달인이다. 그것이 그저 스웨덴의 작은 잡화점에 불과했던 이케아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성공 요인이다. 영화에서 잭이 이케아 제품을 사는 데 쓰는 돈은 실제로 그 가구를 얻기 위해 들인 돈이 아니다. 그것은 ‘외로움 비용’에 가깝다. 현대인들이 입지도 않는 옷을 마구 사들이고, 배고프지도 않은데 마구 음식을 먹는 것은 모두 이 외로움 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이를 비꼬는 내용이 나온다. 폭탄을 만들기 위해 지방 제거 시술소에서 인간의 지방을 훔치는 장면이다.


<파이트 클럽>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소비의 삶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소비에 익숙해진 삶은 더 많은 부족함을 자극하는 유행에 노출되는 생활을 뜻한다. 소비는 부족함을 느낄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옷을 정말 필요에 의해서만 산다면 패션산업은 오늘날처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 “예전에 샀던 옷이 촌스럽다”라는 느낌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사람들은 옷을 더 이상 사지 않는다. 새로운 유행을 만들기 위해 패션산업은 유행의 콘셉트에 맞는 연예인을 모델로 세우고, 패션쇼를 열고, 잡지에 멋진 이미지를 연출한다. 그것이 패션산업이 성장해나가는 생리이자 유행이 돌고 도는 원리이다. 얼마 전까지 불었던 각종 ‘리단길’ 열풍도 이와 같은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파이트 클럽>에서 잭은 도시에서의 소비 생활에 신물을 느끼고 매일 밤 잠 못 드는 고통에 빠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도시 문명에 익숙해진 자아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테일러를 만들어낸다. 감독 데이빗 핀처는 테일러가 결국 잭의 또 다른 분신이었다는 설정을 통해 잭이 겪은 모든 우연한 사건을 필연으로 만들어버린다. 도시를 부수기에까지 이르면서 겪은 우연한 사건들이 모두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한 필연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말 잘 만든 영화라 할 수 있다.


<파이트 클럽>


“이제 다 잘 될 거야. 우린 이상할 때 만났어.”


잭은 마지막에 말라에게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잭이 말하는 “이상할 때”는 도시 문명에서 고립감을 크게 느꼈던 때이다. 감독은 “이상할 때”라는 표현을 통해 도시 생활이 인간의 본능과는 맞지 않는 삶이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도시에서의 소비 생활이 주는 고립감이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과는 어긋나 있다는 말이다. 잭이 자연적인 본능과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말라와의 관계가 계속 삐걱거렸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낀 것은 도시의 소비 생활이 당신에게 내재된 자연적인 본능을 억압하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


게오르그 지멜의 화폐 철학을 연구한 이마무라 히토시는 화폐가 자연세계의 동물과 인간을 구분시켜주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화폐는 자연 상태의 인간 세계의 폭력적 충돌을 통제하는 매개체”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폭력적인 충돌이 자연에서의 본능이라면,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충돌이 있는 자연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배고픔과 질병의 세계로 돌아가야만 도시에서의 고립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파이트 클럽>


지멜은 화폐 경제가 가져다준 개인주의에 대해 고찰하면서 질적 개인주의를 주창했다. 도시에서의 소비 생활은 인간에게 고립감을 가져다주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이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도시 생활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과 맞는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동네 어르신이 만약에 ‘꼰대’라면, 그의 강요에 맞추어 억지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양식, 일식, 퓨전음식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점의 단골이 될 수도 있다. 돌고 도는 패션의 유행 속에 자신의 취향에 맞는 스타일을 선택할 수 있다. 지멜은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고, 화폐 경제가 개인에게 가져다주는 자유와 해방이라고 말한다.


도시 생활에서 고립감을 느낀다고 도시를 파괴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배고픔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신 ‘일회용 친구’와 아닌 친구를 구분할 수는 있다. 비즈니스 관계와 진짜 인간관계를 적절히 구분하는 방법이다. 영화 <파이트 클럽>은 퇴근 후 집에서 느끼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을 해소해주는 데 제격인 영화다. 하지만 근원적인 고립감은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의 고립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에 대해 곰곰이 곱씹어보는 것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초동이야? 광화문이야? 진짜 문제는… 영화 <더 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