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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여행자 Sep 15. 2023

세입자와 비밀번호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8



사실 집주인이 바뀔 때까지 이보다 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집주인이 직접 도배 시트지를 들고 와 안방 벽에 바르기 전, 집을 보고 간 사람들이 꽤 됐다.  난 그들이 집값을 얼마에 내놓은 지 관심이 없었는데,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의 대화를 미루어볼 때 가격이 상당히 셌던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생각해 보면 투자 목적이 아닌 이상 전세 계약 만기가 한참이나 남은 집을 매수하기에는 너무 이른 타이밍이었다. 그야말로 매매가 이루어지기에 무리인 상황이었다.


"말씀하신 집이 이 구조와 같다는 거죠?"


가끔은 다른 집을 볼 수 없어 구조를 보기 위해 우리 집을 방문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불편함은 중요하지 않았다. 집이 나가야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 그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보다 큰 문제는 안방과 베란다에 남은 곰팡이 자국이었다. 곰팡이가 매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는 부동산에서 급히 전화가 걸려왔다. 집을 보러 당장 오겠다 했다. 미리 알려준 집을 보여줄 수 있는 날과 시간대가 전혀 아니었다. 집에 없다면 당장 비밀번호를 알려주라며 신경질을 냈다. 난 부동산 중개인의 무례함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분명 정해진 일과가 끝나면 최대한 집에 있겠다고 약속하고 최대한 집을 보여줬고 청소까지 말씀히 했었는데,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서 집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가 비밀번호를 알려줘야 한다 했다. 집을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아 매수가 되지 않는다고. 그때 부동산에선 집 값이 너무 비싸다든지, 곰팡이가 있어서 매수 희망자가 돌아간다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편은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가 집을 보여줄 수 있는 날짜를 미리 알려드렸으며 대략 몇 명이 집을 보고 갔는지까지, 그리고 그 사이에 오간 대화 또한 전달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부동산을 바꿔달라 요청했다. 그런데 답이 참 묘했다.


그 중개인분은 우리 교회에 다니는 아주 선한 분이십니다. 저희가 다른 부동산 전체에 내놓으면 하루 종일 연락이 와서 그쪽이 피곤해질걸요? 다들 예의 바르게 할 것 같나요? 그냥 그 부동산으로만 하는 게 세입자이 편한 길 아니겠어요? 마음씨 좋으시고 신앙심이 깊은 분입니다. 세입자분이 피곤하지 않기 위해 드리는 말씀이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왜 휘둘렸는지 모르겠지만, 10년 전의 나와 남편은 너무 어렸고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이제 경험이 쌓여 보이는 것이지만, 그 중개인은 가격을 너무 비싸게 내놓았다든지 곰팡이가 있다든지 등 집주인의 마음 상할 말을 전혀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장 손쉬운 세입자를 움직이려 했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말도 안 되는 요구사항이라 콧방귀도 안 뀔 것 같지만 그 당시 우리는 전세보증금 때문에 덜컥 겁이 나 그렇게 휘둘려 주었다. 집주인 또한 부동산 중개인과 속한 교회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매여있었던 것이라 짐작해 본다. 복비도 분명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오간 뒤에야 집주인이 곰팡이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더는 우리 집이라 생각되지 않는 18층 고층 뷰 아파트는 더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고층 감옥에서 빨리 탈출할 생각에 곰팡이에만 몰두해 집에서의 일과를 곰팡이 닦거나 추운 날에도 환기를 시키는데 전념했다. 


세입자였던 나는 전세금을 지불하고서도 왜 타인의 욕망에 휘둘려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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