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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여행자 Sep 21. 2023

내 손에 들려진 수표 한 장, 우리 가족의 전 재산.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12

팥이 사방에 흩뿌려진 텅 빈 전셋집에 앉아 부동산의 연락을 기다렸다. 전세보증금을 빨리 받아서 이사할 집 계약을 마무리지어야 하는데, 도통 연락이 오지 않았다. 2시가 지나서야 연락을 받았고, 나는 집을 돌아보지도 않고 부리나케 부동산으로 내려왔다. 


그곳엔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집주인 부부, 새로운 집주인인 매수자, 그리고 들어올 세입자 부부가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부동산은 시끌시끌했고, 집주인과 매수자 사이에 문제가 있는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연히 내 전세보증금 반환은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양측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내 전세보증금 반환은 완전히 뒷전이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이제 다른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죠.


참아왔던 수많은 감정이 가슴에 고이고 고여 하나의 문장에 응축되어 나왔다. 부동산엔 정적이 퍼졌다. 더는 이 관계에 엮일 필요가 없다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여태 잠자코 있던 세입자의 말에 놀랐는지, 집의 하자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으니 빨리 보내야 한다 생각했는지 집주인이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래요 여기 세입자분께서 기다리실 필요가 없죠. 빨리 보내드립시다."


양측은 언쟁을 멈추고 내 전세보증금 반환과정을 진행했다. 매수인이 내게 보증금을 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터라 계좌번호를 알려주려 하는데, 매수인이 꺼내든 것은 수표였다. 맙소사. 심지어 평소에 거래하지 않는 은행의 수표. 타행수표처리는 하루가 걸렸기 때문에, 평소 거래하지 않던 해당 은행을 찾아야 했다. 시각은 2시 30분, 은행 영업시간에 맞추려면 아슬아슬할 것 같았다.


"누가 요즘 수표를 들고 오나요!"


거래가 종결된 뒤에야 불쾌한 내색을 할 수 있는 나도 참 비겁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거액의 수표를 손에 들고 앞으로 있을 내 매매계약이 틀어질까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힘들 것 같았다. 그간 집주인의 상식 밖의 행동과, 뜻밖의 수표, 그리고 새로운 세입자의 팥 쑥 소금 공격에 불쾌지수가 정점을 찍었던 터였다. 

수표를 챙긴 뒤 부동산을 나서는데  집주인이 그간 미안했는지 머쓱하게 인사했다. 그간 행동에 얼굴을 제대로 볼 낯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인사를 무시하고 나왔다. 굳이 나쁘게 끝낼 필요는 없지만, 굳이 좋게 끝낼 필요도 없었다. 한쪽에게만 일방적으로 좋은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남의 감정을 배려하기엔 내 손에 들려진 우리 가족의 전재산이 너무 무거웠다. 빨리 은행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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