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여행자 Sep 20. 2023

팥, 쑥, 소금. 18층 전셋집에서 이사하던 날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11

팥, 소금, 쑥 그리고 방 안의 나


우리 부부의 첫 공간이었던 텅 빈 전셋집을 바라보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 부부의 삶에 한 편으로는 뭉클해지기도, 다른 한편으론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던 곰팡이가 가득한 집을 탈출하게 되니 이곳에서 경험한 다양한 감정들이 한 번에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순간,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세입자예요. 먼저 짐좀 정리할게요.



신혼집과 작별을 고할 새도 없이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닥쳐왔다. 이삿짐을 다 비우고 부동산의  뒤 새로운 세입자가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전세금을 돌려받기 전까지는 절대 다른 이가 문을 따고 들어오거나 짐을 풀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직 전세보증금을 받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런데도 세입자의 어머니는 미리 청소를 해야 한다 완강하게 주장하다가, 결국 집 상태를 잠깐 봐야겠다고 말을 바꿨다.


저기 새댁. 좀 나가있으면 안 될까? 내가 청소를 좀 해야 해서.


또다시 청소 이야기. 당연히 그럴 순 없었기에, 제가 있는 동안 편하게 청소를 하시라고 말했다. 그런데 세입자의 어머님의 손에는 청소도구가 들려있지 않았다. 그분은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더니 뭔가를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셨다.


'아니 이게 이상한 사이비가 아니라......'


붉은 무언가가 '촤~' 하고 집안 곳곳에 나뒹굴었다. 팥알들이었다. 그분은 집안 곳곳에 팥을 뿌렸고, 집안 각 모서리에 소금을 놓고 그 위에 쑥을 태웠다. 매캐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잘은 모르지만 악을 물리치는 전통의식인 것 같았다. 그렇게 연기가 자욱해지는 것을 보고 아주머니는 현관을 나섰다. 악귀를 막아주는 주술이 결로를 막아줄까? 팥이 나뒹구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 나는 혼자 부동산으로부터의 보증금 처리 연락을 기다렸다.

여기저기 흩어진 팥알을 바라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몽글해졌던 기분이 쏙 들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손에 들려진 수표 한 장, 우리 가족의 전 재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