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여행자 Mar 15. 2024

이사 갈 집이 가처분되다 -2(A 씨의 탄원서 강요)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21

나는 사람을 가려 만난다. 옷깃 스치는 것 만으로 결을 섞는 것 같아 두렵다. 사실 만나자마자 한 사람의 성품을 헤아리는 것은 어렵고, 누군가를 가려내는 것은 섣부른 판단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번 일로 스치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화상을 입히는 그런 결을 가진 사람, 자신이 지나간 자리를 새카만 숯덩이로 태워버리는 사람이 분명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사 직전, 그러니까 잔금일 직전에 매수하고자 하는 집이 가처분되는 일은 흔하지 않은 일이라 그 어디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었고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가처분 상태인 집으로 이사 들어가게 되었다. 중도금을 돌려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가처분되지 않은 절반의 명의를 우리 것으로 가져온 뒤, 가처분이 말소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집을 부수고 인테리어를 하면서도 설레는 마음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가처분이 말소되지 않으면 이 집에 들인 비용이 허투루 쓰인 것이 되는 건 아닌지 하는 마음에 집에 애정을 다하기 어려웠다. 처음부터 가성비 좋은 인테리어를 목표로 하고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투자하는 그 적은 돈도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테리어를 한 집에 이사 들어온 뒤 하루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전 집주인 A 씨에게 화가 나 잠에서 벌떡 깼다가 다른 날은 인테리어 비용이 아까웠고, 또 다른 날은 가처분이 말소되지 않으면 어떡하는지 걱정이 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진정될 만하면 법원 서류가 우리 집 주소로 날아왔고, 잊고 평온하고 잠잠해진 우리 마음에 돌을 던진 듯 물결을 일으켰다. 그런 날들을 훌쩍 보내고 몇 달이 지났을 즈음 우리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어쩌죠. A 씨가 탄원서를 써달라고 하는데요.


A 씨가 B에게 자신의 명의를 넘겼던 것이 이 모든 것의 문제였는데, A 씨가 회사 돈을 횡령한 뒤 재산을 은닉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심을 받아 가처분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A의 친구인 B 씨, 그리고 A 씨의 아내와 거래를 한 것이었다. A 씨의 요구는 우리가 A와 B의 거래가 정상적인 거래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A와 B의 거래를 우리가 어떻게 증명하라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A 씨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A: 어차피 가처분 말소 안되면, 피곤해지는 건 그쪽이에요. 전 상관없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부탁인지 요청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했단다. A 씨는 부동산 사장님에게 변호사가 건네주었다는 탄원서 내용도 보냈다. 그런데 그 변호사가 적어 주었다는 탄원서는 두서가 없는 문장으로 가득했으며, 맞춤법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가장 크게 거슬리는 것은 그 내용이었다.


집주인님께서 선의를 베풀어 이 집에 저희를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선의를 베푸는 것'이라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탄원서를 본 뒤, 나는 결코 이 내용을 변호사가 요구했을 리 없다고 판단했다. 분쟁당시의 내 감정을 글에 굳이 기록에 남기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주 짧게 남기자면 처음부터 A 씨는 자신의 문제에 다른 사람들을 엮어 들어가며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일관했고, 양측 부동산 사장님들에게 ‘갑질’하며 깡패처럼 협박하고 있었다. 양측 부동산 사장님들은 우리가 탄원서를 써주고 더는 A로부터 연락을 받지 않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무섭다고 하셨다. 그러게 질릴 만도 했다.


글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그저 글자를 연결하는 것, 의미를 전달하는 것처럼 치부되기도 하는데, 글에는 글쓴이의 성품이 드러난다. 그 탄원서에는 스스로를 높여 생각하는 A의 거만한 성품, 비뚤어진 자신의 관점과 생각이 글에 담겨있었다. 변호사의 글이 아니다.


그럴 리 없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탄원서를 써줄 이유도 없었다.


나: 탄원서 작성은 거절하겠습니다.


설령 탄원서를 작성한다 해도 판사에게 오해를 살 것이 뻔했고, 그것이 가처분 말소에 유리하게 작용할 리 없었다. 부동산 사장님은 A 씨의 부동산에게 그렇게 전했다. 사실 몇 번이고 거절을 했으나 가처분이 되어도 상관이 없다던 A 씨는 계속해서 부동산을 통해 '너희들 손해다'라며 부동산 사장님에게 협박 전화를 했고 온갖 욕을 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의아했던 건 A 씨에게 분명 계약서에 적은 우리 연락처가 있었는데, 우리에게 직접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부동산 사장님들에게 협박을 할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직접 연락을 할 수 있지 않았는가? A 씨가 왜 그랬을지 정말 궁금했는데 아버지는 이에 대해  이렇게 짐작하셨다.


'A가 너희에게 직접 거절당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니까, 사실 이미 거절당할걸 알고 있었을 거야. 그게 두려워서 부동산 사장님들을 힘들게 하는 방법으로 너흴 움직이려던 거겠지.'


나는 부동산 사장님께 힘드시겠지만 마지막 거절을 전하고 탄원서에 대한 요청은 걸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티다 보니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부동산 사장님의 들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00 씨 다행히 가처분이 말소되었다고 해요.


다행이었다. 나와 남편의 긴 불면의 밤이 끝난 듯했다. 서류상으론 확인되려면 1-2주 정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가처분 말소가 등기부등본에 나타날 그 1-2주 동안 A 씨의 협박이 또다시 반복됐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사 갈 집이 가처분되다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