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여행자 Jan 03. 2024

이사 갈 집이 가처분되다 -1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20

등기부등본에 '이것'이 들어있으면 절대 계약을 해선 안된다고 한다.

그건 바로  '가'다.




잔금일, 우리가 매수하고자 하는 집 서류엔 '가처분'이 뚜렷하게 찍혀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큰 금액의 중도금을 지불했고, 우리의 집도 매도한 상태였다. 이 거래가 잘못된다면 우리에게 큰 손실과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될 것이었다.


매도인인 A의 주장은 이러했다. 중도금은 줄 수 없고, 가처분은 A가 자신이 반드시 말소시킬 것이니 매수자가 자신을 믿고 잔금을 치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약을 위해 몇 번 본 것이 전부인 사람을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가처분에 소송까지 걸린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매수인 입장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매수인인 우리에게 필요한 건 깨끗한 서류일 뿐이었다. A는 자신의 일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더욱 상황을 복잡하게 몰아가고 있었다. A는 이렇게 말했다.


"이 집값이 올라서 배 아파 그러는 게 아니고요. 어차피 소송해 봐야 불리한 건 그쪽이에요. 저는 이 거래되든 말든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우린 소송을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고, 집값이 올랐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없었다. 대체 뭐가 불리하다는 것이었을까. 매도인은 자신의 말들을 통해 자신이 몰래 짜낸 시나리오와 숨겨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불발되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듣고 계시던 아버지가 조용히 말씀을 꺼냈다. 

"그러면 아내의 명의는 깨끗한 거네."


A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아버지는 은행 법무팀에 계셔서 이런 상황을 서류상으로 자주 접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아내의 명의를 넘긴 뒤, 나머지 명의에 대한 가처분이 말소가 된 것을 확인하고 잔금을 치르면 되지 않나? 계약서를 추가해 다시 쓰면 되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뭐 있어."


그때 A가 이렇게 답변했다.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 가족은 A의 뻔뻔한 답변에 할 말을 잃었다. 


 "제가 어떻게 믿고 명의를 넘기나요? 잔금을 안 주면요?"


"그러면 우리는 뭘 믿고 거래를 하나? 서류상으로 가처분이 되어있는데. 이 거래를 진행시키는 건 오히려 우리가 그쪽을 믿고 상황을 봐주는 것이지."


사실 이 후로 A는 열변을 토하며 가처분은 회사 잘못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자신을 죄인 취급해 기분이 더러우니 엎어버리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러고는 얼토당토않은 지리멸렬한 자신의 주장을 펼쳤고, 협박도 했다. 나중에 이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이야기 까지도 나왔다. A의 반응을 보니 앞으로 어떻게 나올 지 몰라 어르고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A를 믿을 수 없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동행해 있던 법무사가 그들의 인감도장도 증명서와 미세하게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러면 거래 불발 아닌가요?"

A가 희망을 찾은 것 같았다.


법무사와 부동산은 이때 인감도장이 다르면 사기죄로 고발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거래는 미뤄졌고, A는 제대로 된 인감도장을 다음날 찾아왔다.  


물론 다음 날에도 가처분 상태에도 매수자가 잔금을 치러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되었지만 이미 모두가 질린 상태였고, 이 방법 말고는 대안이 없으니 부인 명의를 가져오는 절차를 진행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였다. 양측 부동산 사장님들도 이런 경험은 살면서 처음이라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사실 이 거래가 결국 진행된 데에는 신의 한 수가 있었다. A와 그의 부인이 짐을 뺀 상태로 언제든 다시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분쟁 상황에서 내가 인테리어 사장님의 전화를 받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장님께 분쟁 중이니 철거 진행을 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는데, 내가 몇 시간 내내 전화를 받지 않자 일정이 빡빡했던 나머지 화장실까지 밀어버린 것이었다. 분쟁 중인 상황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A가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변기마저 사라진 이 집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가처분은 상당기간 동안 말소되지 않았고, 우리 집에는 A를 수신인으로 한 법원 서류가 계속해서 도착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층에서 로열층, 그리고 2층으로.  집에 대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