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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창인 Jan 11. 2023

110. 한 시대의 끝

  그들은 간밤에 보던 영화를 마저 본 뒤에 집 밖을 나섰다. 담배를 태우기 위함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넷플릭스가 생긴 건 참 잘된 일이야, 남자가 중얼거렸다. 여자는 사실 그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그날 아침에 이별을 말했다. 너를 사랑하는 법을 잊었어. 남자는 우두커니 서서 그 말을 곱씹었다. 마침내 남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뭐야? 남자는 내심 그것이 ‘너’이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여자는 ‘법‘이라고 했다. 사랑이라는 나라가 무너졌다. 패잔병이라도 되고자 했던 남자는 난민이 되었다.


  남자는 해가 한 번 졌다가 뜰 때까지만 함께해 달라고 부탁했다. 붙잡지 않을게. 달콤한 말도 없을 거야. 그냥, 어제 보다 만 영화가 남았잖아. 여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너진 나라라고 곧바로 지도에서 지워지는 건 아니니까.


  그들은 나란히 등을 벽에 붙이고 다리를 뻗었다. 각자의 허벅지가 한 쪽씩 노트북을 받들고 있었다. 그런 밤들은 늘 섹스로 이어졌고, 그들의 눈동자에는 미결된 이미지들이 함박눈처럼 쌓여갔다. 그것은 사랑이었지만 한편으로 유예였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원하는 남녀가 완결에 대항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한 시대는 끝났고, 그들은 같은 속도로 결말을 향해 달려야 했다. 여자에게는 그것이 고문이었고, 남자에게는 그것이 의식이었다. 여자는 울음을 들키지 않으려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남자는 어떠한 이미지도 잊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떴다. 검은 화면에 알지도 못하는 이름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둘 모두에게 그것은 부고였다.


  넷플릭스가 생긴 건 참 잘된 일이야, 남자는 중얼거렸다. 여자는 사실 그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잘된 불행도 있는 거라고. 마취에서 깨는 것과 같은 불행들이. 그들은 이 나라의 마지막 담배를 눌러 껐다. 희멀건 해가 엔딩 크레딧처럼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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