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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Sep 05. 2024

탈모기(脫毛記)

  몸에 털이 나고 네 발로 걷는 동물을 짐승이라고 한다. 사람은 우선 두 발로 걸으니 아무리 못해도 짐승하고는 다르다. 그러나 털을 가지고 있으니 짐승의 요건도 갖추고 있다. 만약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면 털이 많을수록 짐승에 가깝고, 적을수록 진화된 인간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털이 빠지는 것도 진화현상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아무래도 늙는다는 것은 진화가 아니라 ‘털과 함께 사라지는’ 이라고 해야 옳다. 진화도 생명력이 강해야 가능하다면 ‘늙어 진화’는 얼토당토 않다.  


 몸에 있는 털은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 잘 간직하는 것이 효도라는 생각은 아니더라도 털은 소중한 보물이다. 털 중에서도 머리털이 가장 고위층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 나는 것은 ‘털’이지만 머리에 나는 털은 특별히 ‘머리칼’이라고 불러준다. 남자는 털이 아닌 수염을 달고서 스스로 위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머리칼은 ‘머리가락’이 줄어서 ‘머리칼’이 되었을 것이다. 부모께 받은 신체발부(身體髮膚) 중에서도 머리칼이 으뜸이다. 그래서 단발령(斷髮令)이 내렸을 때 우리 선인들은 ‘목은 잘라도 머리칼만은 자를 수 없다’고 상투를 지켜냈으니 지금 생각하면 웃픈 이야기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도 만주족들이 변발령(辮髮令)을 내렸을 때 그랬다. 이렇듯 사람에게 머리카락은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유태인 삼손도 머리칼이 힘의 원천이었다. 머리칼을 잃고나서 삼손의 힘도 사라졌다. 머리칼은 힘뿐 아니라 사람의 품위와 권위를 세울 수 있다. 머리칼이 없으면 옛날에는 ‘중’이라고 천대했고, 지금도 여자한테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모든 것은 용서되더라도 대머리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여자도 있다고 하니 편견이 지나치다. 자신들에게는 대머리가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정수리에 머리가 없으면 ‘속알머리’가 없다고 하고, 머리 주변에 머리가 없으면 ‘주변머리’가 없다고 대놓고 핀잔한다. 앞이마에 머리칼이 없으면 대머리라고 부르는데 대머리가 여자들에게 대접받은 적은 유행가 ‘8시 통근길에 대머리총각’밖에 생각나는 일이 없다. 대접은커녕 모 탤런트는 대통령과 닮은 대머리라 해서 출연정지까지 당해야 했고, 본래 땡중이었던 주원장(朱元璋)은 대머리트라우마로 이름에 禿자만 들어가도 죽여버렸고, 光자까지 쓰지 못하게 했다니 그들은 머리가 아니라 ‘대갈통’이었다. 머리칼이 없으면 머리가 더 커 보여서 대머리라고 했다고도 한다.   

 

 대머리의 치명상은 터무니없이 늙어보이는 것이다. 독수리는 머리털이 없어서 독수리이고, ‘독’은 원래 대머리 ‘禿’이다. 그러므로 대머리는 禿頭이지 大頭가 아니다. 독수리는 머리털만 없는 것이 아니라 느려터져 사냥도 못하고, 숨어있다가 죽은 고기만 훔쳐먹는 비겁한 청소부이다. 그야말로 대머리 망신이다. 정작 사냥을 하는 위엄있는 새는 독수리가 아니라 그냥 수리, 매라고 한다. 독수리 같은 대머리가 싫어 사람들은 몰래 가발을 쓰고, 비싼 돈을 들여 머리칼을 이식한다. 지금 나라를 주름잡고 있는 사람 중에는 이런 사술을 부리는 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대머리는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가발은 곱게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한때는 겁도 없이 흰머리를 뽑은 적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흰머리마저 고맙게 되었고, 지금은 대머리를 걱정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 내 처지로서는 염색 같은 변장술은 언감생심이다. 거울을 보면 이마에 겨우 몇 가닥 머리칼이 위태위태하게 붙어있고, 속알머리가 빠져나가 정수리가 훤하다. 이제는 헤어스타일을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환절기 털갈이가 끝나면 어느 정도 복구가 되었는데 이제는 철도 없이 이 모양이니 옛날의 영화는 다시 올 수 없게 되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르면 머리칼이 바닥에 떨어져 그득하던 옛날의 모습은 어디 가고,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반백의 머리털 패잔병만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다. 미용사는 일을 덜겠지만 나는 속알머리가 다 보일 것 같아 감히 울을 쳐다 볼 용기도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통 머리칼이 없는데도 머리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애초 머리가 좋았더라면 그런 걱정은 않겠지만 원래 총명하지 못한 처지라 남들이 내 정체를 알아챌까 주눅이 든다. 식소사번(食小事煩), 나이가 들다보니 입맛은 떨어지고 부질없는 일은 많아 체중은 줄고, 주름은 늘고, 근육은 말라가는데 머리칼마저 다투어 빠져나가니 허전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두보처럼 ‘비녀 꽂을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머리 빠진 삼손처럼 도무지 힘과 의욕을 낼 수 없다. 삼손은 그래도 회개하고 힘을 얻었지만 나는 그럴 희망도 없다. 광고에 탈모방지 비방이 쌓여있지만 그대로 된다면 세상에 돈 있는 대머리는 없을 것이니 믿을 바가 못 된다.


  그렇다고 가발을 쓰자니 정치인들처럼 거짓말을 얹고 다니는 것 같고, 모자를 쓰자니 천박스럽고, 모발이식을 하자니 돈이 아깝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니 그런 돈이 있으면 칼 없는 머리를 주억거리면서 이웃에게 밥이나 사면서 인심이나 쓰는 편이 낫지 않을까? 허튼 위장술을 부리느니 노추(老醜)를 의연히 받아들이며 없는 소갈머리를 채우는 데 나머지 세월을 보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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