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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Aug 22. 2024

제주도에서 28

三足오리탕

     

 서귀포 토평동에 있는 삼계탕집에 갔다. 닭오리 백숙을 좋아하던 터였는데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제주에서 그 맛을 보게 되었다. 섶섬이 멀리 보이는 전망 좋고, 주인도 소박하게 생겨서 인상도 좋았다. 한방오리탕을 시켰는데 기대만큼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오리 한 마리를 다 먹지 못하여 남은 것을 싸달라고 부탁해서 집에 가지고 왔다. 그런데 와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분명히 식당에서 오리 다리 두 개를 다 먹었는데 다리 하나가 더 있는 것이었다. 오리집에서 다리 하나를 서비스했나? 이런 일도 있구나-    


  아니면 이 오리는 원래 다리가 세 개였나라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들었다. 三足烏란 말이 있으니까-. 다리가 셋 달린 까마귀-  그것은 내가 먹은 오리는 아니지만 ‘오’라는 발음이 같아서 연상이 되었을 것이다. 삼족오는 고구려 벽화에도 그려져 있어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그림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삼족오는 일찌기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까마귀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까마귀를 흉조로 삼았는데 불길한 까마귀를 무덤에 그려넣은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山海經>에 해에는 금오, 혹은 백오, 청조라는 새가 살고 있다고 했다. 해가 금빛이라고 본 사람은 金烏, 청천백일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白烏, 곤륜산의 서왕모를 시중드는 새라고 생각한 사람은 靑鳥라고 했을 것이다. 이 새는 해를 동해에서 출발시켜 서산으로 몰고 가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 새를 까마귀라고 한 이유는 태양의 흑점을 보고서였다는 말도 있다. 사실이라면 대단한 천문학이었다. 처음에는 여느 새와 같이 투다리였었는데 한나라 때부터 다리 하나를 더 붙여 삼족오가 되었다고 한다. 뜨거운 해를 몰고 다니려면 다른 새와는 달랐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삼족오를 고구려의 고유문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이 우리 문화를 자기들 것이라고 하거나, 사사건건 우리 문화를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는 중국과도 다를 바 없다.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좋지만 억지로 내 것으로 만들려는 태도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탐욕이다. 이런 사고는 이웃 나라와 갈등을 빚고, 이웃을 적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지금 중국, 일본이 가깝고도 먼나라가 된 이유이다. 국수주의는 배타적, 감정적이라 위험하다. 고려는 원나라에 국토를 빼앗긴 상실감을 보상하기 위해 <삼국유사>에 단군신화를 기록하였고, 조선이 망국의 위기에 처했기에 자구책으로 <환단고기>가 만들어졌으며, 대원군과 북한이 쇄국정책을 편 것은 정권유지의 수단이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극우적 사고이다. 역사적 당위성은 인정될지라도 정당한 역사라고는 하기 어렵다. 역사를 왜곡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도 탐욕적인 국수주의, 극우적 발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묵과할 수 없는 역사만행, 침략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어야 하지만 우리도 저들과 같이 저열한 국수주의로 맞서기보다는 올바른 역사의식과 이성적인 자세로 대처해야 한다. 고구려의 역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대륙지배설을 강변해서는 저들의 동북공정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앞장서 일제강점과 수탈을 합리화하고, 신명을 다 바친 독립투사들을 테러리스트 빨갱이로 몰고, 친일파들이 판치는 이 정권은 반역사적이고 부도덕하다. 이는 보수도, 극우도 아닌 굴종과 패륜일 뿐이다. 진정한 보수나 우파는 우리 것을 지켜내는 것인데 이 정부는 무엇을 지켜내고 있는가?

 

  우선 문화는 끊임없이 교류하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유사 이래로는 중국문화가 우리에 앞서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일부의 주장처럼 만약 한글에 앞서 가림토 문자가 있었다면 구태여 신라가 향찰문자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위하여 그렇게 고심참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우리가 한자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백두산이 진정 민족의 영산이요, 단군이 내려온 神市라면 왜 우리 正史에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을까? 단군신화가 기록된 <삼국유사>에도 백두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대종교나 <환단고기>는 19세기에야 나타난 것으로 역사적 신뢰성이 적다. 조선 시대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때에도 우리는 천지를 올라가 보지도 않았다는 것은 백두산에 대한 염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독도에 대한 관심이나 의지가 부족하여 오늘날과 같이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긍지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반성 없는 국수주의적인 역사관은 오히려 위험하다. 최근 유튜브에서 우리 지명과 같은 중국지명을 열거하며 그것이 마치 우리가 중국을 통치했다는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거꾸로 우리가 중국의 지명을 차용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리적이다. 우리 어휘 70%는 한자어인데 그것도 우리가 한자를 만들었다는 증거라고 할 것인가? 신라 때부터 우리의 지명과 용어를 중국식으로 고쳤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유치한 유투버의 관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부의 굴종적 대일외교나 일제강점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은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짓으로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역사적 범죄이다.  뉴라이트 중에는 일본유학파가 많은데 이들은 일본의 지원과 돈을 받은 자들이다. 대통령도 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서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들이 일본에 대한 행적을 보면 일본밀정이란 말이 억지로만 들리지 않는다. 이번 광복절 사태를 수수방관하는 우리는 역사와 선열의 죄인이 아닐까?  

 

  오리집에서 서비스한 ‘세발 오리탕’을 잘 먹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은 것 같지만 우리는 중국의 과대망상이나 일본과 같은 억지를 안 부렸으면 좋겠다.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는 우리 고유의 오리가 아니라 중국의 문화를 수용한 현상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저들보다 나은 수준일 것이다. 그것은 중국문화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용한 정당한 역사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저들을 능가할 수 있다. 언젠가 다시 가서 三足오리탕의 진상을 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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