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사는 방식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이 분명한데 요즈음은 ‘혼자’라는 말이 자주 들립니다. ‘혼자’는 사회에서 격리된 특수한 상황인데 그 특수상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신주의자는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요즈음은 특별한 사유 없이 일생을 ‘홀로’ 사는 사람이 늘어가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혼자'와 '홀로'는 비슷한 말이지만 혼자는 '신분의 처지나 위치가 독신, 독자, 개인'이라는 뜻이고, 홀로는 '상황, 행위가 독자적, 개인적'이라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혼자가 '사회적인 문화작용'의 결과라면 홀로는 '개인의 의지적, 능동적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문법적으로 말하면 ‘혼자’는 명사이고, ‘홀로’는 혼자라는 명사에 ‘로’라는 접사가 붙어 부사로 쓰인다는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더불어 살면서도 홀로 행동해야 더 편리한 현대인의 삶의 방식이 '홀로 사는 법'입니다. 혼자 먹으면 밥맛이 없는 줄 알았는데 홀로 먹어야 편하다는 '혼밥족'이 늘어나고, 술은 주고받는 재미로 마시는 줄 알았는데 독작을 즐기는 '혼술족', 여행은 어울려 다녀야 하는 줄 알았는데 홀로 다녀야 편하다는 '혼여족', 가족은 옹기종기 모여 살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홀로 살아야 편한 '원룸족'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더불어 같이 살면서도 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중 속의 고독’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입니다. 달콤한 데이트였던 영화관도 홀로 가는 사람이 많고, 음식점에서도 1인석이 늘어나고, 음식이나 생활도구도 일인용 포장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핵가족까지는 합리적이라 해도 1인가구는 분명히 반사회적입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 전 가구의 1/5이 1인가구라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홀로문화는 비효율적인 경제구조도 문제이지만 탈사회적, 반사교적, 비인간적인 세태라서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홀로문화에 대한 경제대책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사회윤리적인 고민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시대가 이렇다면 우선 노인부터 홀로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대가족이 붕괴된 현실에서 노인은 구태여 따로 애쓰지 않아도 홀로일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친자식도 부모 장수를 싫어하는 세상에 노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냉정히 생각해보면 경노, 노인복지도 노인이 좋아서가 아니라 전통적인 문화를 지키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입니다. 심지어는 당연한 부모봉양도 자식입장에서 보면 사회적 관습에 의한 일종의 의무적 행위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의무감마저 없어지면 노인은 가만히 있어도 혼자 남게 되어 있습니다. 50년 후에는 전 인구의 절반이 노인이 된다는데도 그 알량한 의무감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걸 알고 그러는지 노인들은 기를 써가며 무리에 끼지 못해 안달입니다. 혼자 떨어져 있으면 인생의 낙오자, 왕따가 되는 줄 알고 비에 젖은 낙엽처럼 붙어다니다가 여의치 않으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치매의 위험도 높아진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에 노인이 고독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순리대로 살면 홀로라도 자연스럽겠지만 억지로 무리에 끼려는 조바심은 자신의 노년을 더 초라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구차한 빌붙기보다는 당당하고 떳떳한 홀로를 즐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당하고 떳떳하다면 혼자라도 외로울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혼자를 더 보람되고 가치 있게 보낸 사람이 많습니다. 노년의 친구는 인생의 재산이라고 하지만 술친구, 운동 친구, 동호인 친구, 경로당 친구, 여자친구는 권세와 재산이 있을 때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늙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젊은이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노인이 적지 않지만 그것은 젊은이에게 부담을 주거나 귀찮게 하는 짓입니다. 아무리 ‘내 나이가 어때서’를 외쳐본들 세상에 노인 좋아하는 젊은이란 없습니다. 젊은이들로부터 존중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인격으로서라기보다는 나의 지위에서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위를 잃고 나면 그 존중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 지위가 높을수록 상실감은 더 큽니다. 그래서 노인들끼리 어울려보아도 운동과 취미활동도 때가 있는 법이고, 때를 맞추어도 몇 조금 못 가서 힘이 달리고, 그런 형편에 여자친구는 아무나 사귀는 것이 아니어서 자칫 망신만 당하기 십상입니다. 늘그막에 쾌락을 즐기고, 연애도 해 보는 것이 다시 못 올 낭만이겠지만 나 좋자고 자식 걱정시키고,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마저도 성욕감퇴를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쾌락주의를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노년이라면 끝내주는 향락보다는 절제할 줄 아는 신중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노년에 이르면 어울려 재밋거리를 찾아다녀도 눈치 보기 마땅찮고, 그래서 노인복지센터나 경로당에라도 가 보면 힘도 없는 노인들끼리 과시하고, 싸우기 바쁩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홀로 지내는 요령을 터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혼자 살면 우울증이나 치매를 염려하지만 홀로살기의 진수를 터득하면 그런 걱정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무리에 끼어 살려면 번거로운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왕년의 권위,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 척하고, 내세우고, 이기고, 갖추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여전히 번거롭게 쌓여 있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무리 중에는 나보다 더한 늙은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들과 일일이 다툴 수도 없으니 마뜩잖고 눈꼴 신 일들을 보아 넘기는 비상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끼어살다 보면 살맛 날 정도로 즐겁고 유쾌한 일도 있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무료함을 잊게 하거나 늙은이의 소외감을 덜 수도 있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고, 그것이 또한 노화방지와 건강에도 좋다고 합니다. 이것이 노년 최고의 행복이라고 내세우지만 이러다가는 자칫 속물적 향락에 빠지기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한 무리들에 끼어서 말초적 즐거움을 쫓아다니는 것보다는 외롭더라도 노인의 품격과 담담함으로 살고 싶습니다. 게다가 거기에서 즐거운 일보다는 인내해야 할 시간이 더 많다면 구태여 아까운 시간 낭비하면서, 스트레스 쌓아가면서 끼어살기에 골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비웃거나 잘난 척한다고 핀잔하겠지만 즐거운 속물보다는 외로운 홀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어치피 노년이 되어서 홀로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젊은이의 부담을 덜어주는 배려요, 여생을 보다 노년답게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자식에 의지하여 효도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자식한테 그런 부담을 주지 않는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힘들여 키웠으니 효도는 당연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면 자식과 거래하자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때는 혼자 가는 것이니 조용히 삶을 돌아보고 미리 고독을 견디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독사는 분명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어차피 세상을 떠나는데 화려하고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서 달리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능력이 있어 죽은 후세에 부러움과 칭송을 받으며 영광스러운 이름을 남기면 좋겠지만 그런 호사는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위해 말년을 부자연스럽고 수고롭게 살아야 할까 싶습니다. 무리에 끼어서 어색한 체면과 명예와 쾌락을 좇아다니다 보면 정작 자신을 놓쳐 가장 중요한 죽음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까 걱정됩니다. 설령 인생은 헛되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속되고 무의미하게 살다 죽고싶지는 않습니다. 짧은 인생에 환락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억울해 하는 낭만보다는 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도 성찰하고, 왜 죽어야 하는지는 몰라도 어떻게 죽어야 할지는 진지하게 생각하는 지혜를 기르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
옛 성현, 고승들은 혼자, 홀로 살면서도 우울증은커녕 관조와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기왕에 당당하게 살지 못했다면 홀로라도 떳떳하게 죽을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노인에게 홀로는 외로울 수도 있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우아하고 호젓한 품격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낯설고, 병원도 멀지만 화장장(火葬場)도 있으니 돌하르방처럼 홀로 살다 가기에는 여기가 적격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