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내가 우크라이나어를 하고 있었다....?!

by 주정현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폴란드. 육로로 일곱 개의 국가와 국경이 맞닿아 있다. 서쪽으로는 독일과 체코, 동쪽으로는 러시아, 벨로루시와 발트 3국 그리고 남쪽으로는 슬로바키아와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이룬다. 그중에서도 폴란드만큼 영토가 넓으면서 인건비가 저렴한 옆 나라 우크라이나에서는 매년 어마어마한 수의 외국인 노동자가 이 나라에 와서 일한다. 우리 집에 청소를 도와주러 오는 도우미 아줌마도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이 청소도우미 아줌마는 안타깝게도 영어를 단 한 마디도 못한다. 정말 단 한 마디도. Yes와 No도 못 알아들어서(게다가 폴란드어로 No라고 이야기하면 Okay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걸 해달라는 건지 말아달라는 건지 아주 기본적인 긍정/부정의 의사소통조차 되지 않아서 곤란했던 적이 많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와 온갖 바디랭귀지로 겨우겨우 소통하던 나는, 그나마 폴란드 생활이 2년이 넘어가자 아주 기초적인 회화가 가능해져서 청소아줌마에게 그날의 일을 부탁하고 다음 청소 날짜의 요일과 시간을 이야기하는 수준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이상하게 이 아줌마는 그동안 핸드폰 문자를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다음 주에 언제 올 수 있나요?"하고 폴란드어로 문자를 보내면 꼭 전화를 걸어와서 음성통화로 다음 약속을 잡곤 했었다. 나는 문자가 백 배 천 배 편한데 이놈의 음성통화는 정말 고역이었다. 슬라브어 군인 폴란드어에는 '격'이 있어서, 앞에 붙은 전치사에 따라 뒤에 붙은 명사의 형태가 바뀐다. 그래서 시간과 날짜를 표현하는 숫자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데, 한국어에 비유하자면 '일곱'이라는 숫자가 '이레'로 변한다든지, '여덟'이 '여드레'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이렇게 바꿔 생각하니 폴란드어만 드럽게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한국어도 절대 만만한 언어가 아니다... ) 가뜩이나 전화기 음성으로 폴란드어를 들으려면 리스닝이 잘 안 되는데, 게다가 '목요일 네 시' 같은 단어는 '네 번째 날의 네 시'라는 뜻의 츄바르텍 츄바르타Czwartek czwarta로 이건 무슨 간장공장 공장장도 아니고..... 그래서 그녀와 약속을 잡으려면 열심히 폴란드어를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집이 금세 돼지우리가 되었으니까. 그녀가 아주 조금이라도 영어를 할 줄 알았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열성적으로 폴란드어를 공부했을까. 내 폴란드어 학습의 동기를 부여한 건 8할이 그녀였다.


그러던 그녀가 최근 들어서는 문자를 보내서 약속시간을 잡는다. 아니 왜 이제야 싶었지만(혹시 요금제를 새로 바꿨나....) 어쨌거나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그동안 몇 시에 오겠다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문자로는 만국 공통의 아라비아 숫자를 쓸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녀의 문자가 조금 이상하다. 어? 폴란드어랑 매우 매우 비슷한데 폴란드어에는 없는 악센트가 있었다.

게다가 미묘하게 스펠링도 다르다. 폴란드어로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인 진 도브르 dzień dobry만 해도 그렇다. 알파벳 e가 빠져있다. 혹시나 혹시나 해서 다른 문자들도 살펴봤더니 다 미묘하게 악센트와 스펠링이 다르다. 물론 뭘 쓰려고 했는데 알아듣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폴란드어 검색기에 그녀의 문자를 복사해서 넣어보니 번역 오류가 났다. 구글 언어 자동인식 기능으로 번역 언어가 바뀌었다. 우크라이나어.


알고 보니 그녀는 여태까지 내게 폴란드어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쭉 모국어인 우크라이나어로 말했을 뿐. 나는 지난 2년 동안 그녀가 폴란드어를 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헐? 나 그럼 여태까지 우크라이나어 프리토킹한 거야??


사실 폴란드어와 우크라이나어의 차이는 아마도 남한말과 북한말 정도의 미묘한 차이만 있는 것 같다. 조선족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한국으로 왔을 때, 그들이 원래 고향땅에서 쓰던 말로 소통을 하고 일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도 내가 배운 폴란드어를 가지고 전혀 다른 나라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의사소통이 된다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비슷한 일이 체코 여행 중에도 있었다. 나와 남편은 분명 체코어를 배운 적이 없었는데, 길거리의 간판을 모두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저기 주차장 몇 층이 비어있대, 메뉴판에 있는 이 음식 재료는 무슨 채소래.. 이런 것들. 작년 여름휴가 중에 우리 가족은 폴란드에서 출발해서 독일 - 체코 - 오스트리아 순으로 차례차례 국경을 넘었는데, 전혀 모르겠는 외계어 속에서 이틀을 헤매다, 체코에 도착하니 뭔가 문맹 세계를 벗어난 느낌이었다. 악센트는 좀 다르고 뭔가 미묘하지만, 마트에서 물건 가격을 이야기해도 숫자를 다 알아듣겠고, 도브리 지엔이라고 인사하는 체코 사람들이 아 진도브르 라고 이야기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들었다. 알고 보니 다 거기서 거기인 슬라브어의 세계였다.


폴란드어를 아주 잘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동유럽 국가를 여행하는 데 있어서 언어장벽이 스르르 무너지지 않을까. 물론 여행지만 다닐 거면 딱히 현지어를 하지 못해도 전혀 아쉬울 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우 동양적인 내 외모를 보고 영어를 하나도 못하는 사람들은 알아서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괜히 폴란드어 공부에 열을 올리는 나를 보면서 쓸모도 없는 폴란드어를 왜 공부하냐고, 그럴 시간에 영어공부를 더 하지 그러냐고 타박한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하나 폴란드에서 하나 큰 차이도 없는 영어공부를 굳이 왜 여기서 더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한 단어 한 단어 배울 때마다 이렇게 새롭게 열리는 세상이 큰데. 내가 또 폴란드어를 안 배웠으면 언제 우크라이나 사람이랑 프리토킹을 했을까...


오늘도 그녀에게 집안일을 하나라도 더 부탁하기 위해 열심히 단어를 외운다. 다림질 Prasowanie, 걸레질 Mopowanie, 세탁기 pralka.... 이런 단어들. 하, 어느 세월에 폴란드어가 영어만큼 편해질까. 아마 폴란드어를 아주 잘하게 되어 슬라브어의 언어장벽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날은 내 생애 없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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