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from scratch'

밭에 씨를 뿌리는 것부터 시작하는 요리 동영상을 아시나요?

by 주정현


자본주의 사회의 세포 격인 상품을 우린 거의 모르고 사용한다. 농사짓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쌀을 얻어 밥을 먹고, 옷 만드는 사람의 처지와 얼굴을 모르고 옷을 사서 입는다. 결과물만 쏙쏙 취하니까 슬쩍 버리기도 쉽다. 그렇게 편리를 누릴수록 능력은 잃어간다. 물건을 귀히 여기는 능력, 타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능력,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는 능력.
“분업은 사회의 생산물들, 사회의 힘, 사회의 향유를 증가시키나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사람들 각각의 능력을 빼앗고 감퇴시킨다”라고 일찍이 프랑스 경제학자 세이가 분석했듯이, 거대한 시스템에 하나의 부속으로 끼워져 파편화된 노동을 수행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기 ‘맡은 바’ 책임을 다할수록 ‘총체적’ 삶에는 무능해지고 만다. 그리고 무능과 무지는 필연적으로 무례와 불통을 낳는다.

출판하는 마음 | 은유 | 제철소


얼마 전에, 이곳 바르샤바에 사는 이웃으로부터 반건시를 선물 받았다. 모양이 삐뚤빼뚤 하고 여기저기 검은 반점이 있는 모습을 보니 가정집에서 직접 만든 모양이었다. 곶감을 좋아하는 딸아이 때문에 나도 올해 직접 곶감을 말려볼까... 하다가 비가 자주 오는 습한 날씨 때문에 포기했었다. 정성스레 만든 귀한 곶감을 받아,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다. 우리가 다섯 식구라 그런지 딱 다섯 개를 주셨는데, 더 많이 나눠주고 싶어도 공장형 생산 시스템이 아니라 가정집에서 만들 수 있는 만큼의 적은 양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을 거다. 물건을 귀히 여기는 능력, 타인의 노동을 존중하는 능력,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는 능력. 박스나 비닐봉지 안에 수북이 담긴 곶감을 어디서든 볼 수 있었던, 서울 한복판에 살았을 땐 느끼지 못했던 마음이다.



이곳에서는 한국에서 당연히 사 먹던 많은 음식들을 다 손수 만들어 먹는다. 우리 집 찬장엔 찹쌀이나 팥, 메밀, 혹은 백태 같은 콩이나 곡물 따위가 여기저기 수북이 담겨 있다. 한국에서는 집 앞이 재래시장인데도 한 번도 장바구니에 담아본 적 없는 곡물들이다. 찹쌀은 전날 밤에 물에 불려 놓았다가, 믹서로 갈아 찹쌀가루를 만들어서 인절미나 찹쌀떡 따위를 만든다. 팥은 대여섯 시간씩 푹푹 삶고 조려 팥앙금을 만들어 찹쌀떡 앙금으로도 쓰고 단팥빵 앙금으로도 쓴다. (물론 단팥빵도 밀가루와 이스트를 사용해서 몇 시간 동안 발효해서 반죽을 만든다) 메밀은 덖어서 메밀차를 우려 마시고, 백태는 한나절 물에 불린 다음 일일이 손으로 비벼가며 껍질을 벗기고 삷고 갈아 콩비지를 만든다. 올해로 주부가 된 지 12년 차. 그동안 세 아이를 키우며 매일 부엌에서 무언가를 사부작 거리며 만들어 왔지만, 이곳 폴란드에 오기 전까지는 내가 이렇게까지 먹는 것에 정성을 쏟으며 하루 이상 걸리더라도 기어코 원하는 음식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인지는 몰랐다. 그리고 들이는 수고에 비해 먹는 건 순식간이다.


From scratch. 보통 요리를 할 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수프를 만들 때 시판되는 수프 가루를 섞어 끓이는 게 아니라, 밀가루와 버터를 볶아 루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는 식으로. 혹은 내가 콩비지 찌개를 끓인다 할 때 슈퍼마켓에서 '풀무원 콩비지'를 사서 끓이는 게 아니라 비지 콩을 물에 불리는 것부터 시작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가장 처음'의 단계에서부터 시작하면 내가 그동안 누구의 노동에 빚지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결과물만 쏙쏙 취하던 삶에서 벗어나 내가 두 발 딛고 있는 땅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바쁜 현대인들에게, 게다가 나처럼 아무것도 없는 해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마켓 컬리 클릭 한 번이면 온갖 반조리식품을 배달받을 수 있는 이 편리의 시대에 굳이 몇 시간을 들여 콩껍질을 까고 있으라고 종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휘핑기를 오천 번 저어야 만들 수 있다는 달고나 커피처럼 쓸데없는 노동의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다른 의미있는 노동 행위가 있다. 내가 상대적 비교 우위를 가지고 있는, 나만 할 수 있는 노동. 어찌보면 나더러 그 소임을 다하라고 분업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국민이 매일 몇시간씩 콩껍질을 까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쌀이 나무에서 열리는 줄 안다는 충격적인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나도 그렇게까지 무지한 건 아니었지만 고백하자면 스무 살에 일본에 있는 파인애플 밭에 가보기 전까지는 당연히 파인애플이 나무에서 열리는 줄 알았다. Dole과 Del Monte 같은 세계적 규모의 거대 청과회사가 내 식탁을 점령하고, 그에 의지해 아무 의식 없이 쏙쏙 결과물만 취해먹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밥상에 올라온 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가장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면, 내가 적극 추천하는 유튜브 클립이 있다. 구독자 1400만 명에 육박하는, 중국의 유튜버 리쯔치(李子柒)의 영상이다.


https://youtu.be/hR4DiU8wcVk


동영상 속의 그녀는 정말 모든 것을 말 그대로 from scatch, 처음부터 만든다. 함께 사는 할머니에게 따뜻한 솜이불을 만들어주고 싶다면? 그녀의 동영상은 정원 한 구석에 목화씨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목화 모종을 기른다. 밭에 옮겨 심는다. 두 계절이 지나고 목화밭에 꽃이 소담스럽게 열리면 손으로 그 꽃을 따서 바구니에 한가득 담는다. 목화솜을 빗질하여 고르고 털고 말리는 동안, 솜을 감쌀 천을 이불만큼 커다란 베틀에 실을 엮어 만든다. 그렇다면 그 베틀은? 그녀가 직접 나무를 잘라 만든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녀는 요리 유튜버다. 모든 동영상의 마지막은 그녀가 차린 맛있는 식탁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요리에 쓰이는 식재료는 그녀가 모두 직접 기르고 재배한 농산물들이다. 슈퍼마켓 냉장 코너에서 채소를 담아본 경험밖에 없는 우리가, 주방에서 쓸 재료를 구하겠다고 텃밭으로 소쿠리를 들고나가는 모습을 보면 처음에는 '대체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든다. 10분 정도 되는 짧은 동영상 안에, 실제로 담긴 시간은 1년이 넘어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한 그릇의 음식이 완성되기까지 그 과정을 정말 처음부터 담길 원한다면 그 동영상의 시작은 재래시장도, 냉장고도, 주방 조리대도 아니었다. 땅, 그리고 하늘이었다.


https://youtu.be/YKIXHn3kDL0


이웃이 나눠준 반건시를 먹던 날, 곶감을 만드는 리쯔치의 동영상을 아이와 함께 보았다. 이거 한국에서 먹던 거랑 조금 다른데? 왜 이렇게 거뭇거뭇하지? 하고 아이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직접 나무 위에 올라가 전지가위로 하나하나 감을 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리고 일일이 끈에 달아 말리는 그 수고를 보며, 감을 말리는 바람과 시간의 힘을 느껴본다. 곶감을 오물거리던 아이의 입이 천천히 느려진다. 엄마, 우리도 내년엔 직접 저렇게 만들어볼까? 하고 묻는다. 지난여름에 텃밭에서 부추와 깻잎을 수확했던 이야기도 꺼낸다. 아, 맞아 우리 그랬지.


내가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건 수학공식도 영어단어도 아니고 이런 감각이다. 밥 짓고, 빨래하고, 잠을 자고, 자신의 '몸'을 돌보는 모든 사소한 일상 행위 뒤에 숨어있던 노동의 과정들을 깨닫는 것. 나 역시도 매일 새롭게 배우고 있다. 도시에서 자라고, 도시에서 살며, 스무 살이 넘도록 밥솥에 취사 버튼 한 번 눌러본 적 없던 내가 이곳 폴란드에 이사 와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켓 컬리도 배민 라이더스도 없는 이곳에서, 부추를 한 묶음도 아니고 허브라며 세 가닥씩 파는 이곳에서.


그래, 내년엔 곶감에 다시 한번 도전해볼까... 하며 마음이 갈팡질팡 하다가 혹시나 싶어서 아이에게 물어본다.

"설마 너도 쌀이 나무에서 자란다고 알고 있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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