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폴란드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by 주정현


한국에서 폴란드로 이사오기 석 달 전, 알파벳을 읽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 폴란드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게 재작년 가을의 일이니 어느새 1년 8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어학원을 다닌 것도 아니고, 제대로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 혼자 집에서 단어를 외우고 알음알음 팟캐스트를 들으며 틈틈히 공부해 온 것이 전부이다. 비록 몸은 폴란드에 있지만, 하루종일 집에서 애들이랑 부대끼고 있으니 그 이점은 전혀 살리지 못했다.

올해 1월부터 세 아이들이 모두 기관에 다니기 시작하자 드디어 뭔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을거라 기대했다. 독학으로 공부하기에는 폴란드어는 너무 어려웠고, 격변화같은 생소한 슬라브어군의 문법적 규칙은 아무리 반복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같은 법인 주재원가족 중에서 폴란드어 어학원에 다니고 있는 분께 정보를 물어보고, 알고 지내는 대사관 직원분께 바르샤바대학교 한국어과 학생 중에 언어교환을 원하는 학생을 알아봐주십사 부탁드렸다. 이제는 이 곳 생활이 어느정도 적응이 되어서 굳이 폴란드어를 배우지 않아도 일상생활을 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왕지사 앞으로 수년간 이 나라에서 더 살아갈 예정이니 언어를 제대로 익혀 좀 더 삶의 지평을 넓히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 도서관에서 폴란드어로 된 책을 빌려서 아이들과 함께 읽고 싶었다.

한국에 사는 동안에는 동네 도서관에서 식구 수 만큼 만든 다섯 장의 대출카드로 매달 100권이 넘는 책을 빌렸다. '엄마가 도서관에 다녀온 날'에는 그날 빌려온 책들을 수북히 쌓아놓고 도장깨기 하듯이 차곡차곡 읽어 해치우는 재미가 있었다. 폴란드에 와서 살 집을 구할 때도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는지가 중요했다. 세들 만한 빈 집 주소를 알게되면 구글지도에서 biblioteka(도서관)라는 검색어를 넣고, 얼마나 도서관과 떨어져 있는 곳인지를 찾아보는 게 제일 처음 하는 일이있다. 덕분에 지금 사는 집에서 5분만 걸어가면 어린이서가와 성인서가가 모두 크고 좋은 공공도서관이 있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단 한 칸 짜리 영어서가가 전부. 수북히 쌓여 있는 폴란드어책을 볼 때마다 얼른 저 책을 읽고 싶었다.

폴란드는 이미 다섯번이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했을 만큼 세계적인 문학강국이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동문학분야에서도 야뉴슈 코르착이나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같은 몇몇 작가들은 이미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만, 생소한 언어이다보니 영어권 국가의 그림책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폴란드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다면, 아니 적어도 어린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을 정도만큼만 된다면, 도서관에 있는 그림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고 훌륭한 어린이책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을텐데. 그리고 혹시 이곳에서 나만 아는 원석같은 그림책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 책을 번역해서 한국에 소개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꿈을 안고,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 있는 동안 동네 도서관에 가서 그림책을 필사했다. 글밥있는 책은 너무 어려워 한 페이지에 한 줄짜리 문장이 있는 어린아기용 그림책을 가지고. 도서관 열람실에서 그렇게 그림책을 한 권씩 필사하는데, 앞 책상에는 금발머리 여대생이 두꺼운 전공서적을 쌓아놓고 공부하고 있고, 뒷 책상에서는 턱수염이 더부룩한 아저씨가 커피를 마시며 잡지책을 읽고 있는데, 그 사이에 낀 웬 동양인 여자는 아기들 그림책을 한글자 한글자 열심히 필사하구나.. 싶어 좀 우습기도 했다. 그래도 그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그러던 중에 2월부터 유럽의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지고, 3월에는 모든 학교와 유치원에 휴교령이 내렸다. 뭔가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모두 멈췄다. 어느새 휴교령이 내린 지도 9주차. 아이들이 언제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지 기약도 없고, 24시간 전투육아체제 속에서 나의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그렇게 폴란드어 공부에 대한 의욕은 사그라들었고 그나마 띄엄띄엄 하던 공부도 완전히 손을 놔 버린 게 벌써 두 달 째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어떤 유명한 번역가 분과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기회가 생겼다. 이야기의 시작은 전혀 다른 주제였는데, 해외에서 살고있는 나의 특수성 때문이었을까, 주재원 남편을 따라 해외에 살게 되면서 번역을 시작한 다른 번역가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연한 대화가 어떤 계시처럼 느껴졌다. 사그라들었던 의욕에 다시 작은 불꽃이 일었다. 그날 저녁에 다시 폴란드어 교재를 폈다.

필사하던 그림책과 소설책도 다시 책장에서 꺼냈다. 오랜만에 다시 폴란드어 단어들을 노트에 옮겨 적으니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그래, 뭐가 되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고작 이런 걸로 공부를 멈췄다니. 사실 폴란드어는 한국에서는 비주류언어로 취급받는지라 내가 지금 열심히 공부한 시간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유용하게 쓰일 지 알 수 없다. 외국어대학교에서 폴란드어를 전공하는 학생들에 비하면 내 실력은 정말 아기들 그림책도 버거울 만큼 부족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나중에 쓰임이 있겠지. 나는 지금 인생의 수 많은 점들을 만들어가는 중이고 그것이 내 삶의 선택의 가능성을 넓혀줄 것이다. 그게 선이라는 것을 지금은 모른다. 나중이 되어야 아는 것.

그렇게, 나는 다시 폴란드어 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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