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인 듯 김장 아닌 김치 담그기

2020 김치의 날을 기념(?)하며....

by 주정현

오늘, 11월 22일은 '김치의 날'이다. 내가 김치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김치의 날을 일부러 기억하고 챙기는 건 아니고, 평소와 다르게 알록달록매콤한 네이버 배너가 알려줬다. (브런치에서 네이버 이야기한다고 뭐라 하진 않겠지... 혹시라도 이 사진이 다음메인에 걸리면 내가 진짜 대인배 인정한다!) '김치의 날'이라는 생경한 단어를 보니 세상에는 정말 별의별 날들이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바르샤바 시내에 있는 스페인 레스토랑에 갔다가, 오늘이 '세계 빠에야의 날'이라며 식당으로부터 작은 빠에야 한 접시를 무료로 제공받은 적이 있었다. 무슨 그런 날이 다 있냐며 차마 웨이터의 말을 믿지 못하고 그날 날짜를 구글에서 검색해봤는데 정말로 'International Paella Day'라고 나왔다. 오늘 같은 날에 한식집에 가면 혹시 공짜로 김치 한 접시를 내주려나? 그러나 김치의 날이든 김치의 날이 아니든 김치 같은 밑반찬은 어차피 공짜.


한국은 지금이 한창 김장시즌이다. 김치의 날이 이맘때쯤으로 정해진 것도 왠지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 추측해본다. 어머님, 올해 김장은 언제 하시겠어요? 김장은 뭐니 뭐니 해도 김치의 날에 해야지.... 뭐 이런 식인 걸까. 올해 김치의 날은 마침 일요일이기도 하니,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가정에서 정말 김치의 날에 김장을 할지도 모르겠다.


김장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김장 [명사]
1. 겨우내 먹기 위하여 김치를 한꺼번에 많이 담그는 일. 또는 그렇게 담근 김치
2. 김장거리로 무, 배추 따위를 심음. 혹은 그 배추나 무.


그렇다면 한꺼번에 많이 안 담그고 그냥 깨작깨작 담근 김치는 뭐라 불러야 할까. 혹은 그렇게 깨작거리는 소심한 행위를 부르는 말은 따로 없는 걸까.




이틀 전에, 배추 네 포기를 씻고 썰어서 절였다. 예전 글에도 썼지만 폴란드 배추는 심이 굵어서 포기김치는 아무래도 어렵고 막김치가 한계인데, 이걸 다 송송 썰어서 절이려면 커다란 대야가 필요하다. 막둥이가 신생아 때 목용통으로 썼던 지름 1미터의 핑크색 대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산후도우미 아주머니가 집 근처 새마을 시장에서 대충 샀던 이 욕조는... 아마 평생 살림으로 가져갈 듯하다.

폴란드에 오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김치를 담가본 적이 없다.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김치를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남편은 매일 야근이라 집에서 밥을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랬던 그가 코로나 재택근무로 삼식이가 되다니...) 내가 먹을 적은 양의 김치는 그냥 친정에서 얻어먹었다. 그래도 그마저도 남겨서 신김치가 되곤 했다.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김치를 만드는 날, 혹시 실패할까 봐 딱 한 포기만 소꿉놀이하듯 담갔다. 그 뒤에 조금 자신감을 얻어 아주 조금씩 조금씩 양을 늘리다가 어느새 네 포기까지 발전했다.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아쉽지만 네 포기보다 더 많이 담그고 싶어도 새 김치를 담을 김치통도 없고 김치냉장고도 없다. 신혼 때 샀던 살림들은 대부분 새로 장만해서 2인용 식탁은 10인용 식탁으로 바뀌고, 3인용 소파는 8인용 소파로 바뀌었는데 김치통만은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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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깨작 거리며 적은 양의 김치만 담그는데도, 내가 대야를 꺼내와서 배추를 절이고 있으면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오늘 김장하는 날이에요?" 차마 김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민망한데, 그렇다고 김장 아닌 다른 말로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서 그냥 "응."하고 만다. 그냥 김치 담그는 거야... 말고 '김장'처럼 똑 떨어지는 명사형의 단어는 없을까? 한여름에 담가도, 아무리 조금만 담가도 부를 수 있는 그런 말. 김치를 만드는 모든 행위를 죄다 김장이라고 부르는 아이들 덕분에 나는 어쩌다 보니 한 달에 한 번씩 김장 아닌 김장을 하고 있다.


신혼 때부터 손이 큰 편은 아니었다. 음식은 대부분 딱 한 끼에 먹을 만큼만 사람 수에 맞춰서 준비했다. 남편과 둘이 먹을 땐 2인분. 아이가 자라고서도 이유식과 유아식을 지나 우리와 같은 밥을 먹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그동안 항상 2인분에 맞춰 밥을 지었다. 나 스스로도 냉장고에 남은 반찬이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다음 끼니에 손이 잘 가지 않아서 음식이 애매하게 남는 걸 싫어했다. 쭉 몇 년 간 2인분에 맞춰 요리를 하다 보니 손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식구수가 늘어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먹는 양이 늘어나니 '한 끼'의 분량 자체가 많아졌다. 김치만 해도 그렇다. 한 포기만 담가도 먹는 사람이 없어서 두 달간은 충분히 먹었던 김치가... 이제는 한 달도 못되어 네 포기를 후딱 해치우게 된다. 게다가 코로나 이후로 모든 외식을 근절하고 집에서만 밥을 먹게 되니 집에서 제일 무섭고 어마어마한 지출이 식비가 되었다. 고기를 사도 이제는 한 끼에 한 근은 준비해야 다섯 식구가 넉넉하게 먹는다. 갈비처럼 뼈가 붙은 고기는 한 번에 2킬로그램은 양념에 재워둬야 서로 눈치 보는 사람 없이 풍족하게 먹는다. 벌써부터 이럴진대, 앞으로 뱃고래가 커질 아이들의 위대(胃大)한 여정이 두려워진다.


김치의 날은 김치문화를 계승ㆍ발전하고 김치의 영양적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하여 지정한 날이라고 한다. 김치문화의 계승이라. 우리 세대 중에 김치를 담글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 아이들 세대쯤 되면 김치는 으레 슈퍼에서 사 먹는 음식이라고 여기게 되지 않을까? 해외에 나와 사니 얻어먹을 김치도, 사 먹을 김치도 없어 매달 소소하게 김장 아닌 김장을 이벤트로 열게 되었다. 아이들이 크면, 그리고 다들 각자 가정을 꾸리면 집집마다 그래도 김치 다섯 포기씩은 나눠줘야지 하면서 한 번에 스무 포기, 서른 포기의 김치를 담그고 있을 나를 상상해본다. 그 정도면 김장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 전까지는 김장아닌 김장만, 소꿉놀이하듯 깨작거린다. 그래도 새 김치를 담갔으니 함께 먹을 돼지고기도 준비해보기로 한다. 얼마나 삶아야 하나. 한 근이면 충분하려나. 혹시 모자라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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