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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Jul 14. 2023

다소 비관적인 독서의 쓸모

나는 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책을 읽을까

언제나 뭔가를 쥐어뜯고, 따지고, 몰아붙이고, 먼저 공격하고 싶었다. 대신 책을 읽는 걸 택했다. 소파에 길게 누워 닥치는 대로 읽어가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키웠다. 죽을 뻔했다 살아난 아이의 머리카락 아래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매일 샅샅이 검사하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아이가 아닌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 한 게 없었다.

정세랑 저,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매년 100여 권의 책을 읽어오다 작년 한 해동안 읽었던 책의 권수를 세어보니 70권이 조금 안되었다. 여전히 대한민국 평균 독서량보다는 한참 웃도는 기록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셋째를 출산한 이후로 가장 적은 수의 책을 읽은 한 해였다. 비로소 '읽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나날'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육아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책으로 숨었고,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될 만큼 아이들이 자랐다. 육아가 가벼워진 만큼 자연스럽게 책에서 멀어졌다. 아니, 멀어졌다고 말하기엔 여전히 많이 읽는 편이긴 한가. 올해 6월이 지나고, 올해 상반기에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독서노트를 살펴보았다. 서른일곱 권. 이 속도라면 올해도 작년과 비슷한 권수의 책을 읽을 것이다.


 한 가지 변수가 있다면 올해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 몸속에 있는 암세포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한번 여기에 빠져들게 되면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병'이라는 존재는 물리적으로 나를 아프게 해서 힘들게 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나를, 내 일상을 좀먹는 부정적인 존재가 된다. 아픔 그 자체가 아니라 아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나를 더 힘들게 한다. 그 생각을 멈추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다.


 6월의 마지막 날, 암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하면서 다섯 권의 책을 챙겨갔었다. 그중에 한 권은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이었다. 6인실 병동 창가자리에 앉아 정유정의 소설을 펼치는데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 정유정의 소설을 읽던 또다른 병실이 생각났다. 2016년 가을에 갑작스러운 조기진통으로 임신 32주에 산부인과 병동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남편에게 서가에 있는 책 몇 권을 가져다 달라 부탁했고, 그중에 같은 작가의 소설 <7년의 밤>이 있었다. 누군가의 살인충동이 섬세하게 묘사된 서늘한 미스터리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조기진통의 불안함을 잊을 수 있었다. 작은 불안감을 더 큰 불안감으로 덧씌우는 것이었을까. 이상하게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한 순간에는 정유정 작가의 소설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이번 병동생활 중에 읽었던 <완전한 행복>도 비슷한 감정의 기제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수술 당일에는 전날밤 12시부터 물도 마시지 못하고 금식을 유지했어야 했기에, 비어있는 위장만큼이나 명료하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소설을 읽었다. 손목에 혈관주사를 꽂고, 잠시 후엔 전신마취로 의식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면서, 수면제를 먹고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이런 소설을? 스스로가 자학적으로 느껴지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잔인할지언정 확실히 매력적인 페이지터너 소설이었다. 덕분에 수술방으로 내려가는 오후 3시까지,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물도 마시지 못하는 서른여섯시간의 금식이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 지난 10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해온 일이 있다면 책을 읽는 일과 아이들의 끼니를 챙겨준 일이었다. 아니, 아이들의 밥은 학교나 유치원이 대신해 줬을 때도 있었고, 동생들을 출산하려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리고 이번에 수술을 위해 입원했을 때도 내가 아닌 다른 가족들이 대신 해결해 주었다. 그러니 끼니를 챙겨주는 일에는 휴식기가 있었다. '읽는 사람'으로서 쉬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마다 더 강박적으로 책을 펼쳤다. 책을 읽어야만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거기에 있었다.


 요즘은 '병을 계획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절감하는 중이다. 수술을 받고 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몸의 신진대사에 관여하는 장기를 떼어낸다는 건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감각이 없어 의식하지 못했던 신체기관의 부재를 절감하는 중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질병을 그 자체로 불행이나 피해로 여기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안희제 작가의 문장을 곱씹으며, 최선의 결과를 상상하고 그렇게 되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지만, 때때로 무의식의 영역으로 꾹꾹 눌러담았던 불안한 마음은 수면 위로 올라오고야 만다. 어느날 밤에는 최선을 다해 치료했지만 전이를 막지 못했다는 절망적인 진단과 시한부 선고를 받는 꿈을 꾸기도 지만  또 다른 아침을 맞이하며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 하루를 맞이하며 다시 책을 펼친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나의 현재와 현실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이 현실과 책 속의 문장들의 괴리가 단지 나의 문제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 관한 이야기와 너에 관한 이야기이며 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을 펼치는 순간, 나의 이야기 하나에만 빠지지는 않을 수 있다.


거기에서부터 책의 쓸모가 시작되는 것 아닐까. 사람들이 책을 가까이하는 데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다소 비관적인 나의 독서의 이유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자가 위장에 병이 들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고 한다. 그 병이 나의 병과 같은 신체의 질병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왠지 올해 여름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권수의 책을 읽게 될 것 같다.  훗날 그럼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의미있게 이 계절을 기억할 수 있겠지.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그렇게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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