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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Jun 06. 2023

시골길을 달리며 생각한 것

먼 훗날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

 

 골프장에 가는 길이었다. 바르샤바에서 골프는 한국에 비해 많이 저렴하고 비교적 접근성이 좋은 스포츠 중 하나이다. 집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가족 회원권을 구매한 골프장이 있는데, 그 골프장으로 가려면 10분 정도 고속도로를 타고 30분 정도 국도를 달려가면 된다. 많은 교통량에 비해 겨우 왕복 2차로에 불과했던 국도는 최근 일부 구간의 차선을 늘리는 공사 중이어서, 올여름에는 골프장에 가려면 평소와 가던 길에서 벗어나 우회도로로 달려야 한다. 구글이 안내해 주는 대로 공사 중인 길을 뒤로한 채, 로터리에서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아주 조금 핸들을 다른 방향으로 틀었을 뿐인데 우회도로인 교외의 작은 시골길로 들어서자, 국도를 달리는 동안에는 존재하는지조차 몰랐고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만나기 어려웠던 또 다른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운전 중에 사진을 찍었던 건 아니고요, 가장 비슷한 느낌의 이미지를 인터넷에서 주워왔어요. (출처:unsplashed)


  늘 가던 길에서 아주 조금 핸들을 꺾었을 뿐인데, 이런 곳이 있었구나 싶게 한적하고 조용한, 전형적인 폴란드의 시골길이 나타났다. 아스팔트 길 옆에는 작은 시골 초등학교와 성당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주말마다 즐겨갈 것 같은 시골 식당이 있었고, 좁은 길을 따라 숲이 우거져 나무는 아치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구글내비게이션이 안내해 주는 길을 따라 모르는 시골길을 달리고 있으니 뭐랄까, 지구라는 행성에서 지금 여기, 이 좌표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게 '현실감'이란 과거의 내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가 '이런 일이 벌어질 법하다'라고 예측했던 경험의 재현이다. 그러나 내 예측의 범주를 벗어나버린 아름다운 시골길의 풍경과 그 감동은 과거의 내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미래였고, 그것을 지금 이 순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제 나의 경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이 장소에 있는 미래의 나를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폴란드의 어느 시골길을 홀로 달리고 있는 30대 여성. 이건 몇 년 전만 해도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미래였다. 나는 운전을 싫어했기 때문에 운전면허를 따고 나서도 한동안 운전대를 잡을 생각을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뚜벅이 장롱면허로 아무 불편함 없이 살았고, 더군다나 해외에서 운전을 하는 삶 같은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미국,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에서 운전을 해봤다.) 게다가 이 지구의 많고 많은 나라 중에서 폴란드에 살고 있다는 건, 이미 5년이나 살아온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여전히 이상하게 느껴진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내 인생을 수식하는 문장이라기엔 어색하게 느껴진다. 내가 막 10년 후에 칠레 같은 지구 반대편의 나라라든지, 뉴질랜드 같은 또 다른 남반구의 나라라든지, 아니면 중동의 어느 나라나 이집트나 몽골이나 멕시코처럼 책으로만 접해보고 이름만 겨우 알고 있는, 단 한 번도 방문해 본 적 없는 나라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 예언한다면 황당무계하게 들리지 않을까. 내게 폴란드는 그런 의미였다.


 그런데 그런 폴란드 안에서도 이렇게 외진, 길거리에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었던 바르샤바 교외의  한적한 시골길을 여름 햇살을 받으며 달리고 있다. 이 기분은 마치 뭐랄까, 앨리스의 토끼굴을 지나 새롭고 낯선 세계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일상의 순간이 아니라,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순간.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오늘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아침의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 않았는가. 이 길을 달리는 건 내가 태어나서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인데, 이렇게 처음 가보는 시골길을 운전해서 갈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었다니. 나는 지금 경험하는 것 중에 그 무엇도,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예측불허의 삶을 살고 있다니. 과거 나의 상상력이란 얼마나 비루했던가.


  그렇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에는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미래의 삶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데에 내가 예측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옵션만 계획에 넣는다면 내 인생은 실제 확장될 수 있는 범주보다 아주 좁은 영역에 그치고 말 것이다. (나보다 미래세대인 내 아이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고.) 이 좌표, 이 자리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신기하면서도 또 다른 미래에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상하다 보니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내가 생각하고 기대한 경계의 바깥에 실제 미래가 존재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작은 일상의 디테일에서부터 커다란 인생의 갈림길마저도.


  먼 훗날 후의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수십 년 후의 일상 속에서도 나는 지금과 똑같이, 변하지 않고 어디에서든 다 잘 살아낼 수 있을까.  나의 크고 작은 선택이 만들어낸 미래는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까. 오늘 만난 시골길의 풍경처럼 '평생 처음 경험하는 일'은 그때 뭐가 남아 있을까. 나는 그 나이에도 지금처럼 낯설고 생경한 마음을 가득 안고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며 즐거워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골길을 달리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아, 나는 골프장에 가던 중이었지. 오늘의 본격적인 일상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가장 큰 선물을 이미 받아버린 느낌이었다. 이게 다 직진도로가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아니 덕분에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 조금 핸들을 다른 방향으로 틀었을 뿐인데 내 예측의 범주를 벗어나버린 너무나 아름다운 시골길의 풍경을 만났다. 그동안 쭉 직진도로만 달려왔던 나는, 이제 내가 예측할 수 있는 한계의 바깥세상을 만나기 위해 핸들을 어느 쪽으로 틀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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