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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Jan 14. 2021

두 개의 가을



 "엄마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무슨 계절이 제일 좋아?"

 산책을 나서는 길, 열흘만에 겨우 만난 파란 하늘을 보며 아이가 물었다. 날씨가 추워진 이후로 며칠 동안 계속 집에만 있었다. 지난달부터 쇼핑몰, 레스토랑, 카페 등 모든 실내공간은 문을 닫았고, 바깥 날씨는 춥고 쓸쓸하다. 유난히 힘들게 느껴지는 이번 겨울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혹독한 계절이다.


 무슨 계절이 가장 좋을까. 어릴 때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 계절도 좋고 저 계절도 좋았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좋아하는 이유만큼 싫어할 만한 이유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봄은 꽃가루 때문에 괴롭고, 여름은 음식이 쉽게 상하고 초파리같은 해충이 늘어나서 주부에게 힘든 계절이다. 그나마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었는데 폴란드에 온 이후로 가을은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우울'이 덮치는 계절이 되어버렸다.

"원래는 가을을 제일 좋아했는데, 폴란드의 가을은 싫어."


그해 가을 하늘은 온통 갑갑하게 메운 낮은 구름 때문에 컴컴하고 우중충하고 적막하던 어느 날, 나는 온종일 홀로 말을 달려 시골 마을 중에서도 특히 더 황량한 지역을 지나, 저녁 어스름에 그림자가 길어질 무렵 마침내 음침한 모습의 어셔 저택이 보이는 곳까지 당도했다. 어떻게 해서 그리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저택이 눈에 띄자마자 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우울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에드거 앨런 포 단편 '어셔가의 몰락'


 에드거 엘런 포의 단편을 필사하다가 첫 문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갑갑하게 메운 낮은 구름, 우중충하고 적막한 날들. 문장에서 선연히 그려지는 음침한 모습이 무엇인지 나는 이제 안다. 청명한 하늘과 시원한 공기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던, 길고 무더웠던 여름이 끝났음을 알리는 한국의 가을만 나의 가을이었던 시절엔 모르던 풍경이다.


 폴란드에 살게 되면서, 나는 그동안 서구의 작가들이 숱하게 묘사해 온 음습한 분위기가 무엇인지 내 경험으로부터 알 수 있게 되었고, 대신에 계절성 우울증을 얻었다. 지난 두 번의 가을을 보내며, 내 일기장에 '우울'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적혔는지 당최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제 가을을 좋아한다고 선뜻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각 계절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우리는 모든 계절을 '한국'과 '폴란드'로 이분해서 논했다. 한국은 미세먼지가 심해서 봄이 싫은데, 폴란드는 '지겨운 겨울이 드디어 끝났다' 하는 계절이야. 한국의 여름은 덥고 끈적끈적하지만 폴란드는 시원하고 정말 좋지. 그렇지만 모기가 너무 많아서 싫어. 가을은 한국이 최고야. 폴란드의 가을은 맨날 흐리고 춥고 겨울이랑 다를 게 하나 없어. 겨울에는, 눈만 펑펑 내리면 어디든 좋을 텐데. 아, 함박눈 좀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눈 언제 올까?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떠드는 아이의 입을 보며, 아이의 기억 속에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네 개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이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네 살때 미국으로 이사를 가게되어 어릴 때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기후 속에서 사계절 내내 거침없이 뛰어놀았다. 한겨울이라고 해도 영상 10도 정도라, 얇은 점퍼 하나만 입고 매일 지칠 때까지 뛰어노니 하루가 짧았다. 지금은 냉대 기후의 나라로 옮겨와 긴긴밤과 추위를 묵묵히 견디며, 시간을 버티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오후 2시에 노을을 보고, 오후 3시에 일몰을 보며 잿빛 하늘과 어두운 하늘에 익숙해져 간다.


 어쩌면 너는 커서 러시아 대문호의 작품에 스민 실존적 우울도, 남미 문학의 환상적 사실주의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네 속에 여러 겹의 계절이 있는 것처럼, 세계에 대한 너의 경험은 다층적이니까.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속에서나 볼 것 같은 바르샤바의 낯선 하늘이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멋져 보이기도 했다. 위안이 되었다. 저 하늘이 우울한 만큼, 이질적인 만큼, 네 안에는 내가 모르는 세상이 피어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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