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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May 09. 2023

슬퍼할 겨를이 없었는걸요

수달 지음, <아직 슬퍼하긴 일러요>


 한쪽으로 치우친 이야기만 있으면 제대로 된 현실을 알기 어렵다. 많은 문제들이 밖으로 꺼내지기 전에 곪을 수도 있다. 상대가 암을 경험하면서 어떤 상태에 놓인 줄도 모르면서 암이 삶의 축복이라고 섣불리 말하는 건, 선을 넘는 행위다. 축복인지 폭탄인지는 당사자만이 판단할 일이다. (...)
 질병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꺼내주길 바란다. 당신과 나의 해방일지를 같이 써 내려가 보는 건 어떨까? 그것이 암 혹은 어떤 질병이 모두에게 축복일 수는 없어도 최소한 형벌이 되지 않는 것에 큰 힘이 되어줄 거라고 믿는다.

<아직 슬퍼하긴 일러요> 158쪽


 올해 초, 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에서 폴란드로 돌아오는 길, 14시간의 비행을 앞두고 어떤 책을 들고 비행기를 탈까 고민하다가 그녀의 책을 한번 더 읽고 싶어졌다. <아직 슬퍼하기 일러요>는 해외근무 중인 남편과 여섯 살 아들을 둔 30대 초반의 가정주부가 유방암 판정을 받은 후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쓴 에세이다. 여자로서, 엄마로서, 아내이자 딸로서... '암'이라는 질병과 싸우면서 맞닥뜨린 불편하고 낯선 세계에 대해 저자는 담담하게, 그러나 부드럽고 강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암이 자신에게 준 싸움의 기술과 위로의 기술에 대해서, 그리고 암 환자로 살면서 느끼게 된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한국에 오기 두 달 전에 읽었던 책이고, 저자인 수달 작가님과 시 필사 모임을 함께하며 생긴 친분으로 이번에 서울에서 처음 만나 책에 사인을 받고 즐거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나는 폴란드행 비행기를 타기 전에 초음파 상으로 '모양이 좋지 않은' 결절을 발견하여 갑상선 조직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하기 위해 찾은 병원에서는 아주 높은 확률로 '암'이 맞을 거라는 말을 의사로부터 들었다. 깊게 바늘을 찔러 넣었던 목에 두툼한 붕대를 붙이고 비행기를 탔다. 다시 책을 펼치자 두 달 전 읽었을 때와 다른 문장에 밑줄이 많이 그어졌다. 비행은 지루했고 아이들은 얌전했고 많은 생각이 남았다.



 "제가 폴란드에 살고 있어서요, 내일모레 출국이라 결과 상담을 하러 병원에 올 수 없어요. 혹시 조직검사 결과를 이메일로 받을 수 있을까요?"

 검사를 받기 전, 진료실에서 이렇게 말했을 때 의사는 작게 탄식하며 초음파 사진을 다시 살펴보았다. 가족력이 있어 거의 매년 초음파검사를 받았는데, 지난 1년 새에 결절은 모양도 이상해지고 크기도 눈에 띄게 커져있었다. 위치도 기도와 가깝게 붙어 있어 좋지 않았다. 육십 퍼센트 정도의 확률로 암으로 보입니다,라고 1분 전에 검사를 권유할 때 의사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는데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칠십 퍼센트라고 확률을 높여 말하며 이렇게 말했다.

"초음파에서 이 정도로 보이는 건 거의 암이 맞습니다. 조직검사를 받지 않더라도 초음파를 보면 대충은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환자분들이 많이 물어보시는데, 사실 대충이 아니라 꽤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폴란드에 사신다고 했죠. 앞으로의 해외생활을 어떻게 하실지 고민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머리가 멍해졌다. 가슴이 쿵 내려앉으며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끝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폴란드 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오는 건 남편의 귀임 때문일 줄만 알았지 내가 암에 걸려 치료를 받기 위해 들어와야 한다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30대 중반에 암을 진단받는 건 그야말로 남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나는 이 책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질병, 사고, 혹은 다른 불행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 제삼자의 시선. 철저한 독자의 시선. 그것은 그야말로 오만이었다. 두 달 만에 책을 다시 펼쳤을 때, 이전과는 다른 문장에 밑줄을 치며 나는 몇 달 전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아이가 겨우 여섯 살, 내 몸에서 암을 발견했다.

<아직 슬퍼하긴 일러요> 89쪽

 

 책 속의 이 문장이 그대로 나를 설명하는 문장이 될 줄을 그땐 미처 몰랐는데. 내가 조직검사를 받았던 날은 막내아들의 여섯 번째 생일 바로 다음날이었다. 새해의 시작과, 아들의 생일과, 그리고 어쩌면 내가 암 진단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사실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둔 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폴란드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이틀 후에 아이들은 개학을 했다. 시차적응 기간을 가질 새도 없이 학교로 돌아가야 했고, 가뜩이나 오랜 여행으로 지쳐있었을 아이들이 추운 날씨에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마음을 한가득 안고 정신없이 개학을 맞았다. 타이트한 일상 속에서 나를 더욱 정신없게 만들었던 건 아들의 생일이었다. 겨울방학 기간 중에 생일이 있었던 아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뿐인 이 소중한 날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아들은 개학 다음 주에 유치원에서 같은 반 친구들과 조촐한 생일파티를 하기로 약속했었다. 담임선생님과 언제 파티를 할 건지 일정을 잡고, 필요한 준비물을 상의하고, 파티안내문도 만드느라 개학 첫 주부터 바빴다.


 대망의 생일파티날. 같은 반 아이들에게 나눠줄 컵케이크를 굽고, 작은 장난감과 사탕을 사고, 동네 문방구에서 'Happy Birtyday'라고 적혀있는 예쁜 하늘색 풍선도 스무 개나 샀다. 이 모든 준비물을 들고 내가 교실에 찾아가기로 약속했던 시간은 오후 두 시. 이른 점심을 먹고 선물을 포장하며 오늘의 이벤트를 준비하다가 문득, 내가 혹시 약속시간을 착각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담임선생님의 이메일을 다시 확인해 보려고 노트북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주정현 님. ㅇㅇㅇ병원입니다."라는 제목의 새로운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날 오후, 암 확진을 받았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요동쳤는데 첫 번째의 감정은 허망함과 허탈함이었다. 어쩌면 양성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아주 적은 확률이었고, 암이 거의 확실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국에서 들었었기 때문에 결과가 심각하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암이 맞습니다'라는 결과지를 원격으로, 이런 소식마저 이메일로 받아봐야 하는 해외생활자의 삶이 왠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즈음 황동규 시인의 '이별 없는 시대'를 읽었었는데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나도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사는 이민자의 일상을 살고 있지만, 막상 암 진단마저 이메일로 받으니 이렇게까지 모든 걸 원격으로 하고 싶진 않았다는 허탈함이 몰려왔다. 그보다는 두 눈으로 의사를 마주하고, 조금은 따뜻하고 동정 어린 위로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러나 진지하고 진심이 담긴 어조로, 나의 건강상태에 대한 진실한 조언을 얻고 싶었다. 하얀 모니터 위의 검은 글씨는 너무 차가웠다. 그래서 내가 암환자가 맞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 너무 외로웠다.


 그런데,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는데, 그 바람에 아들의 소중한 생일선물이 눈물에 젖을 뻔했다. 아, 한 시간 뒤에는 유치원에 가야 하는데. 나는 저 스무 개의 풍선을 불어야 하는데. 컵케이크도 포장해야 하는데. 이메일을 닫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Happy Birtyday'라고 적혀있는 예쁜 하늘색 풍선에 공기를 채워 넣는 일이었다. 풍선을 연달아 열 개쯤 불고 나자 머리가 띵 하며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는데, 그 순간 '와, 나 암환잔데. 무리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머리를 스쳤다. 그러자 진단을 받은 지 30분도 안 되어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너무 우습고 웃기고 불쌍하고 허탈하여 또 웃음이 났다. 이메일을 좀 나중에 열어볼걸. 적어도 생일파티가 끝난 다음에 이메일을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루만 검사 결과가 늦게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슬퍼할 겨를도 없이 엄마 역할에 다시 집중해야 하는 그 순간이 웃펐다.


  "지금 네가 어떤 마음일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언제나 네 곁에 있을게. 울고 싶을 때 울고 힘들다고 말할 때 가만히 들어줄게. 먹고 싶은 게 생각나면 제일 맛있는 걸로 사줄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변함없이 널 사랑한다는 말이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니 이 시간을 부디 견뎌줘!"

<아직 슬퍼하긴 일러요> 93쪽


 이 즈음 수시로 이 책을 많이 펼쳤고 마음이 힘들 때마다 위의 문장의 소리 내어 읽었다.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 수달작가님에게는 '모양이 좋지 않은 녀석'이 몸 안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했었다. 그래서 근래 들어 작가님 생각이 많이 했다고 사랑고백도 곁들이면서. 암이 확실해졌고, 폴란드에선 치료받고 싶지 않은데, 남편의 주재 기간은 남아있고, 아이들 학교 문제도 있고... '가족이 세트로 움직일 때 기혼여성이 겪는 고충(154쪽)'을 직접 경험하면서 나는 책의 또 다른 부분에 밑줄을 쳤다. 그래서 이 책에는 알록달록, 여러 색깔의 밑줄이 참 많이도 남았다.


 사실 지난 몇 달간 이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리고 치료계획을 세우면서, 내게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처음 경험해 보는 것들 투성이라 그 과정에서 스치는 생각들이 워낙 많고 다양했다. 그래서 그 모든 경험과 생각들을 잘 정리해두었다가 보다 정돈된 형태의 글로 풀어내고 싶었다. 올해의 첫날부터 이 책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쭉 했었다. 그러나 한 문장 한 문장 쓸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망설였고, 여전히 쓰고 싶은 이야기의 반의 반도 못한 느낌이지만 그냥 일단 여기까지만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많은 감정들은 차츰 휘발되기 시작하였고, 지금 이 순간에만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기에. 나머지 이야기는 언젠가 시간이 써줄 것이라 믿는다.


 <아직 슬퍼하긴 일러요>는 암 판정을 받은 지 10년 후에 쓰인 이야기다. 나도 그녀처럼 담담하게, 곧은 어조로 이 질병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일단 이 소용돌이에서는 한 발자국 뒤로 빠져나와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수술 잘 받고, 잘 회복하고, 그 와중에 한국과 폴란드를 오가며 해외 이사도 신경 쓰는, 세트로 움직이는 기혼여성의 일상을 씩씩하게 살아내다 보면 또 그때 쓸 수 있는 글이 오겠지. 지금은 치료와 회복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라는 걸 스스로도 안다. 그러니까 지금은 제대로 된 위로를 해 주는 이 책을 곁에 두고, 제삼자가 아닌 일인칭의 시점으로, 앞으로도 더 많은 문장에 오색찬란한 밑줄을 쳐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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