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정현 May 24. 2023

2023년 5월 16일, FRAC

[오늘의 구매목록]

버터식빵 Toast maślany 500g 8.99 즈워티

대파 Cebula młoda pęczek 4묶음 11.96 즈워티

샌드위치햄 KrAkus Sznyka eksportowa 120g 6.99 즈워티

살라미치즈 Ser w plastarch salami 150g 7.49 즈워티

미니도넛 Mini pączki 334g 13.69 즈워티

사과 Jabłka duże 1.232kg 4.92 즈워티

감자칩 Fit ziemniaczki z solą morską 4.99 즈워티

수박 Arbuz bezpestkowy 2.58kg 25.77 즈워티

총 84.80 즈워티 / 26,910원 (1 즈워티당 317원 기준)



1. 굉장히 오랜만에 장바구니 일기를 올린다. 한동안 장을 보지 않았... 던 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무 많이 사 재껴서(...) 차마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바구니 기록을 남기겠다고 결심한 뒤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나는 정말로 식료품을 한꺼번에 많이 산다. 평소에 장을 볼 때 한 번에 약 300 즈워티에서 600 즈워티(약 10만 원에서 20만 원) 정도 비용을 쓴다. 사진 속에 올라온 식료품의 약 다섯 배 정도의 양을 구매하는 것이다. 도저히 한 장에 사진에 담을 수 없는 양의 식료품과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 끝없이 긴 영수증을 받아 들면 이걸 가지고 어떻게 글을 쓰나 막막해진다. 그럴 땐 그냥 쓰지 않을 수밖에.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장바구니 일기를 올릴 수 있었던 건, 5월이 되면서 슈퍼마켓에 갈 때 차를 끌고 가는 횟수가 부쩍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최저기온이 6도였던 바르샤바는(네, 5월 날씨 맞습니다만...) 드디어 봄 다운 봄날씨를 뽐내는 중이다. 날씨가 포근해지고 나니 슈퍼마켓까지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끌고 가는 일이 늘어났는데, 그러다 보니 장바구니 하나에 다 담길 만큼만 조금씩 자주 장을 보러 가는 일이 늘어났다. 아, 드디어 사진 한 장에 다 담길 수 있게 구매목록이 줄어들었다.


3. 습관이 만들어진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오랫동안 장바구니 일기를 쓰지 않다 보니 장을 볼 때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결심마저 까먹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슈퍼에서 '대파 님'(극존칭)을 마주하고 나니 이 즐거움을 꼭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1년 만에 슈퍼마켓에서 다시 대파를 만나는 기쁨이란, 대파와 1년 동안 이별해 있던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순수한 희열이다. 제대로 된 대파 한쪽 없이 한식을 요리해야 할 때마다 나는 얼마나 아쉬웠던가. 대파의 아삭하고 시원한 맛을 따라잡을 수 없는 비실비실한 쪽파와 뻣뻣하고 억세며 이파리 부분에는 빈틈없이 흙이 숨어있어서 세척하기 골치 아픈 릭(leek)으로 연명하던 지난 1년 동안 나는 대파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여름에만 아주 잠깐 한국의 대파와 거의 흡사한 굵은 파를 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데, 대파를 마주한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슈퍼마켓에 있는 파를 모두 (그래봤자 모두 합쳐 4단밖에 없었지만) 싹쓸이해 버렸다. 채소 코너에 있는 대파를 내가 모두 사버렸으니, 같은 동네에 사는 한인 교포들의 즐거움을 내가 빼앗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올랐으나, 다행히도 다음날 아침에 슈퍼에 가보니 채소코너의 대파는 무사히 리필되어 있었다. 아, 재고가 넉넉하게 있었나 보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채 썰어 냉동해 놓을 요량으로 2단을 더 사 왔다.)


4. 다행히도 대파는 다음날 무사히 리필되어 있었지만, 사실 폴란드의 슈퍼마켓에선 그렇지 않은 일이 비일비재하다. 내가 오늘 슈퍼마켓에서 만난 무가, 배추가, 청경채가, 혹은 팽이버섯이 다음 주에도 그대로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웬만한 채소들이 모두 다양하고 넉넉하게 구비되어 있는 한국의 슈퍼마켓과 달리, 폴란드의 슈퍼마켓에서는 어제 있던 채소가 오늘 없기도 하고, 슈퍼마켓에 있으리라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채소가 갑자기 뿅 나타나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구매 계획이 전혀 없던 채소라 할지라도 평소에 만나기 힘든 식재료를 일단 슈퍼마켓에서 만나고 나면

 "어, 숙주가 있네? 심지어 싱싱하잖아? 일단 사자."

 하고 장바구니에 담아 오게 되는 것이다. 친구에게서 숙주가 있다는 제보를 듣고 다음날 슈퍼마켓에 가 보면 싱싱한 녀석들은 다 팔려나가고 비실비실하고 상태가 좋지 않은 채소만 남아있거나, 아예 그 채소칸이 텅 비어있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보이면, 일단 사야 된다. 그리고 뭘 해먹을지는 나중에 생각한다.


5. 4월에 잠시 한국에 다녀오면서, 출국 전날 동네의 채소가게에 갔다. 바르샤바에 살고 있는 지인들에게 나눠줄 요량으로 채소가게에 있는 깻잎을 모두 사 왔다. (15 봉지쯤 되었던 것 같다.) 장바구니에 미친 듯이(...) 깻잎을 담고 있는 나를 보고 채소가게 아저씨가

 "깻잎 장아찌 담그시려나 봐요?"

 하고 물었다.  

 "아뇨, 제가 해외에 살고 있는데,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깻잎이 없어서요. 그래서 좀 많이 사가는 거예요."

  하고 말하며 나는 우리 동네에서 구하기 힘든 채소인 콩나물도 한 봉지 장바구니에 담는데,

 "아니, 깻잎이 없어요?"

 하고 채소가게 아저씨가 깜짝 놀라며 되묻는 것이다.

 "깻잎도 없고, 콩나물도 없고, 열무도 없고, 무도 없고, 심지어 대파도 없어요."    

 라고 답하자 채소 판매를 업으로 삼고 있는 그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위의 열거한 채소들이 없는 채소가게는 그의 상상 속에서 어떤 모습이었을까. 엄연히 얘기하자면 모두 다 바르샤바에서도 1년에 한두 번쯤은 만날 수 있는 채소이지만(한국식당과 한국슈퍼마켓에서 직접 농사짓거나 한국에서 수입해서 판다), '님'이라는 극존칭을 붙여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귀하디 귀한 존재들이니까.

 "그럼 대체 그 동네 채소가게에는 뭐가 있어요?"

 기가 찬다는 듯 되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감자랑... 양파요?"  


6. 대파 이야기만 하다가 장바구니에 있던 다른 식료품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이날 함께 구매한 수박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덧붙여볼까 한다. 이날 2킬로가 넘는 커다란 수박을 샀는데 근래 들어 먹은 수박 중에 가장 달았고, 맛있는 것은 귀신같이 잘 먹는 식구들 덕분에 이 커다란 수박 한 통이 하루 만에 금세 동이 나버렸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바로 같은 슈퍼마켓에 가서 수박을 한 통 더 사 왔는데(그렇습니다. 대파 재고 확인하러 간 게 아니라 수박 사러 갔던 거예요.) 두 번째 샀던 수박은 속이 너무 물러 있었고 너무나 맛이 없어서 아무도 먹지 않았다. 주부가 된 지 15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실패 없이 수박을 고르는 방법은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같은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같은 상표의, 같은 사이즈의 수박을 샀는데 이렇게까지 맛이 다를 수 있나 신기하기도.


7. 지난 장바구니 일기에서는 1 즈워티당 282원에 가격을 정리해서 올렸는데, 오늘은 1 즈워티에 317원에 정리해서 올린다. 환율이 많이 올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2년 11월 7일, Lid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