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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Aug 28. 2023

여름 휴가지에서 읽은 시

시 필사모임 2주 차


 시 필사모임 2주 차엔 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무려 10박 11일의 장기간 휴가였지요. 사실 모임을 시작하자마자 나흘 째 되는 날 여름휴가를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휴가 날짜라는 건 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더군요...) 모임 시작을 조금 미룰까 고민했었는데요, 그렇게 하면 연말까지 100편의 시를 필사하지 못하고 내년으로 넘어간다는 걸 알고 8월 시작을 강행했었어요. 예상은 했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 보니 매일 시간 맞춰 멤버들에게 시를 배달하고 꾸준히 필사에 참여하는 데에는 약간의 요령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달리 오타도 많았고, 우여곡절도 많았고, 때론 제 날짜에 맞춰 마감을 놓치기도 했었던 2주 차였습니다. 덕분에 2주 차 기록도 4주 차 필사를 시작한 오늘에서야 남기네요.


 그렇지만 또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시의 모습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를 읽는 순간은 여행에서 한숨 쉬어가는 시간이기도 했고요. 어느 날엔가는 시를 배달하는 시간인 한국시간 자정에 제가 인터넷이 안 되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갈 예정이라는 걸 깨닫고, 전날 밤 11시에 미리 시를 배달했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전파를 사용하며 전 세계로 시를 배달하고, 오랜 산행으로 지친 다리를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다시 온라인에 연결되었을 때, 한꺼번에 우수수 쏟아지는 멤버들의 필사와 단상을 만났어요. 그때의 뭉클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자연에서 만날 수 있는 충만함도 좋았지만, 다시 연결된 현대문명에서 마주한 유대감도 참 좋았습니다.


필사모임의 두 번째 주, 여섯 번째 배달 시는 안나 스위르의 '나의 고통'입니다.




시필사 6일 차. 8. 14. (월) 안나 스위르, ‘나의 고통' - 시집 <시로 납치하다(더숲, 2018)> 중에서


[나의 고통]


나의 고통은

쓸모가 있다.


그것은 나에게

타인의 고통에 대해 쓸 특권을 준다.


나의 고통은 하나의 연필

그것으로 나는 쓴다.  



 사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마음속으로 살짝 반발이 일었어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쓸 특권, 그건 대체 누가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걸까요. 나의 고통에 대해 쓰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해 쓰는 건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 어려운 일들이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 슬프고요.


 저는 임상심리학 대학원에서 석사공부를 했었는데요, 대학상담센터에서 일했을 때 센터나 보육원에 있는 청소년들이 심리검사를 받으러 많이 왔었어요. 대학연구소 부설기관이라 시설아동들에게는 바우처지원이 되었거든요. 그 아이들의 심리평가보고서를 쓰면서, 나는 이 보고서를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너무 많았습니다. 내가 뭐라고 이 사람의 심리상태에 대해서 글을 한 줄 보태나 하는 마음에 더해... 그렇게 내가 쓴 글이 '전문가적 소견'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그 사람의 인생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니 보고서를 쓰는 마음이 참 무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감히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안나 스위르의 시와 더불어 그전 주말에 함께 읽은 시에서는 시인이 '너의 고통을 내가 안다'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시간을 거슬러 가져와봅니다.






시필사 5일 차. 8. 11. (금) 라이너 쿤체, '뒤처진 새' - 시집 <나와 마주하는 시간> 중에서


[뒤처진 새]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가로지를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이 시를 읽었을 때도 휴가지에 있었는데요, 도나우강이 흐르는 비엔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강 위를 날아가는 철새 떼를 바라보면서 시를 읽으면 뭔가 색다른 감상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도나우 강 귀퉁이도 보지 못하고 비엔나를 떠나버리고 말았네요. (대신 저는 비엔나의 놀이터를 실컷 경험했습니다.)

 

 이 시를 읽고 '실은 뒤처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면에서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 있었어요. '방향'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던 그 이야기를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출산과 육아로 하고 싶던 공부와 일에서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고, 때때로 그 사실이 후회스럽고 가슴 아파요. 어떻게든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고 애쓴 적도 있는데요, 타국에서 주변의 도움 없이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언어와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려고 하니 많이 버겁더라고요. 그런데 가끔 마음이 부글거리기도 하고, 조급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요. 나만 여기에 멈춰 서있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요.

 

 그런데 저 혼자만 이런 마음을 겪는 건 아닐 거예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는 해외이주 여성상담은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이도 셋이나 키워봤으니 양육스트레스에 대한 이해도도 높겠지. 봄과 여름에 굵은 나이테를 그려내는 나무도 가을과 겨울에는 잎을 떨구고 쉬어가잖아. 제대로 쉬어야 제대로 피어날 수 있을 테니 지금 이 자리에 멈춰 있는 것에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대신 내가 앞서 나갈 수 있는 '다른 방면'에 대한 탐구를 쉬지 말자.


 힘든 시기를 보낸다는 걸,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살면서 찾아오는 크고 작은 불행들이 유독 저 혼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닐 테니까요.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이 말을 할 수 있는 값진 굴곡을 지나가는 중이라 생각하면, 나의 시련이 조금은 위안이 될까요. 그러면 언젠가 이렇게 말해줄 수 있겠죠. "내가 안다."






 둘째 주에 필사했던 결이 비슷한 시 하나만 더 소개할게요. 여기에 옮겨 적으려고 보니 이 시도 번안 시네요. 이번 주에는 유난히 외국 시인들의 시를 많이 배달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도 여름휴가의 영향일까요.



시필사 10일 차. 8. 18. (금) 션 토머스 도허티, '왜 신경 쓰는가' - <마음 챙김의 시> 중에서


[왜 신경 쓰는가]


왜냐하면 지금 저곳에

너의 위로의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상처를 지닌

누군가가 있기 때문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시를 필사했습니다. 덕분에 글씨가 '괴발개발(저 이 단어 참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개발새발이 맞는 표현인 줄 알고 살아왔다가 중학생이 되어 괴발개발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표준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하다고 양해를 구했는데, 대체 어디가 괴발개발한 거냐는 필사모임 멤버들의 항의를 들었네요. 평소의 제 글씨도 이 상태에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여행 중이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시를 필사하다 보니 여러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어요. 저는 '왜'라는 단어와 '(신경) 쓰는가'라는 두 단어에 확 꽂혀버렸습니다. 저는 왜 브런치에 글을 쓸까요. 왜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걸까요. 이 글쓰기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요.


 예전에는 제 개인의 일상이 괴로워서 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은 글을 쓰고 싶었어요. 찬찬히 거울을 마주할 때 느끼는 위로감이 좋아서요. 그러다 나를 비추는 유리를 넘어 세상을 투영하는 창문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심리치료를 공부하겠다고 결심했었던 순간의 마음과 참 닮아 있었어요. 그러나 공개된 공간에 글을 쓰다 보니 창문 너머에서 저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늘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독자의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 글쓰기가 괴롭게 느껴져서 저는 사실 지금 갈등하는 중입니다. 지금 저곳에, 저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위로의 말'이 될지 '상처의 말'이 될지 자신할 수 없네요. 그 때문에 되려 제 마음은 자꾸만 작아집니다.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 나아지는 날이 올까요?







 시를 배달하는 중에 만났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여 소개해봅니다. 안나 스위르의 '나의 고통'을 필사하고 싶다고 보내주신 분이 시인 안나 스위르가 폴란드 사람이라 더 눈이 갔다며(제가 지금 폴란드 바르샤바에 살고 있으니까요) 시인의 소개글을 보내주셨어요.


 "안나 스위르(1909-1984)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화가의 딸로 태어나 가난한 성장기를 거쳤다. 일을 하면서 혼자 힘으로 대학을 다녔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치하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기 직전에 풀려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여성의 육체와 사랑의 행위에 대한 매우 솔직한 시들을 썼다. 같은 폴란드 시인이며 노벨 문학상 작가인 체스와프 미워시가 그녀의 시를 번역해 세상에 알렸다."

- <시로 납치하다> 87쪽  


 하지만 그 메시지를 본 저는 "응? 시인이 폴란드 사람이라고?" 하며 의아한 마음이 들었어요. 만약 시인이 폴란드 사람이라면 이름이 이렇게 심플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스위르'는 폴란드계 성씨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폴란드의 이름은 복잡하고 긴 것이 '보통'입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유명한 동화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라든지,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라든지, 혹은 퀴리 부인의 결혼 전 이름도(퀴리는 남편의 성입니다) '마리 스크워프도스카'라는 걸 생각해 볼 때... '스위르'가 폴란드 이름처럼 느껴지지 않은 이유를 아시겠죠?

 이러한 길고 긴 폴란드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유머가 있는데요, 유튜브에서 무려 조회수 254만 회를 기록한 영상입니다. '그제고쉬 브쥉치슈치키에비츠'라는 제목의 짧은 무비클립입니다. (영상 길이는 짧은데 제목은 짧지 않군요...) 전쟁 포로의 폴란드식 이름이 너무 길고 어려워 이름도, 성도, 주소도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하는 독일인 장교를 풍자한 장면이에요.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 제목을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어요. 영상 댓글에서는 폴란드 사람들의 이름이 너무 길고 어려워서, 데스노트가 실존해도 아무도 죽일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폴란드 이름에 대한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던 저는 시인의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몇 번의 검색을 통해 '스위르'는 그녀의 성씨의 앞글자만 따서 만든 영미권의 필명이고, 실제 폴란드 이름은 '스위르슈친스카(Świrszczyńska)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 폴란드 시인 맞군요." 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네요.


 




 또 다른 외국 시인 션 토머스 도허티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여볼까 해요.

 

 한국시간 자정에 시를 배달하기 때문에 유럽시간으로는 오후 5시에 시를 배달하게 되는데요, 여행 중에는 한창 이동 중이거나, 관광 중이거나, 혹은 저녁식사장소를 물색하는 중이기 때문에 바빠서 미리 준비했던 시를 배달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잊어버리곤 했어요.

 그런데 이 날은 일몰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라 저녁 무렵의 일정을 대비해서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요, 시를 배달하고 나자 '영어로 된 시라면 번역본이 아니라 원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부랴부랴 구글링을 하며 원문 시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션 토머스 도허티'라는 한국어 검색어로는 번역본 시만 가득 등장해서, 원문 시를 찾아보려면 영어로 검색을 해야 하겠더라고요. 그렇다면 시인의 영문 이름의 철자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일단 '토머스 도허티 Thomas Doherty'까지만 검색을 해 봤는데요, 굉장히 젊고 잘생긴 배우가 나와서 당황했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렇게 젊고 잘생긴 사람이 시인일 리가 없어... (응?)


 아니 저런 디즈니재질의 남자배우 말고 내가 원하는 건 시인의 이름이란 말이다.라고 구글에게 이야기해 봤자 소용이 없겠죠. 몇 번의 삽질구글링을 반복하다가 배우의 이름 앞에 영문이름 션(Sean)을 더해 풀네임을 완성하니 드디어 시인의 프로필이 나왔습니다.


그래그래, 이게 바로 시인의 얼굴이다! (편견입니다.)


그리하여 원문 시를 구할 수 있었는데요, '왜 신경 쓰는가'의 원제는 'Why Bother?'입니다.


[Why Bother?]

- Sean Thomas Dougherty


Because right now, there is

someone out there

with a wound

in the exact shape of your words


 원문 시를 읽고 나니 약간의 의아한 마음이 들었어요. 류시화 시인 번역본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등장했는데, 원문에는 어디에도 위로라는 단어는 없으니까요. 시인이 한 행을 추가하며 넣었던 '위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의 말(your words)이 위로의 말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시의 원문을 추가한 이후에 멤버들 사이에도 번역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는데요, '위로의 말'과 'your words'가 어떻게 비슷하면서도 다른지, 이 사이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계기였던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위로의 마음을 바탕으로 타인의 고통을 생각한다는 것. 그런 마음이 담겨있는 저의 언어가 과연 고통받는 사람에게 순수하게 위로의 감정만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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