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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의불빛 Sep 16. 2020

LP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

【친구 이사하던 날】


이사한 지 한 달 만에 TV를 연결했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스스로 게으르다고 이야기하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친구가 이사 당일 제일 먼저 짐을

풀어 자리를 잡고 전원을 켠 건 다름 아닌 턴테이블이었다.

턴테이블은 오디오 장비 중에서 LP를 재생시켜주는 소스기기이다

LP의 역사는 194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과 지휘자 브로노 발터가 녹음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최초의 녹음이다

그 이전에 있던 LP와 같은 모양의 SP시대에는 1장으로 10여분 정도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지만, LP가 개발되면서 드디어 음반 1장으로 1시간 정도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이것은 혁명적인 사건이었으며, LP는 이후로 50여 년 가까이 음악을 재생하는 소스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1970년생인 그 친구가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LP의 최전성기였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음악들을 LP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한 취미는 이후로 CD가 등장하고 음원을 다운로드하여 듣는 시대를 지나 이제는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달라지지 않았다

익숙한 것들에게서 느끼는 편안함 때문에 그러는 것일 거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친구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LP로 음악을 듣는 이유는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편리함이 주는 달콤함을 능가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떤 일에서 유별나게 의미와 가치를 찾는 성향의 친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LP로 음악을 들을 때면 진지하게, 때로는  혼자 엄숙하게 어떤 의식을 치르듯 턴테이블에 바늘을 올린다

하긴 아무렇게나 다뤄도 절대로 훼손될 일이 없는 CD나, 무한 복제가 가능한 음원을 재생하는 일은 발가락으로 한들 어떻겠냐만은 LP는 재킷에서 LP를 꺼내는 일에서부터 턴테이블에 음반을 놓고 바늘을 소릿골에 올리는 일에까지 조심스럽지 않은 일이 없다

음악을 듣는다는 일에만 국한한다면 유비쿼터스의

세상이 된지도 벌써 오래다.


하지만 어느 때고 손가락 몇 번 꾹꾹 눌러서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듣는 음악과, 재킷이 상할까, 소릿골이 상할까, 바늘이 상할까 조심스레 몇 단계의 수고를 거친 후 드디어 들려오는 음악이 같을 수는 없다


아날로그가 어떻고, 디지털이 어떻고 하는 논쟁을 떠나서, 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정해진 자리에 잘 모셔두었다가 조심스레 꺼내 듣는 음악과 ,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고 다시 들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듣는 음악이 같을 수는 없다

갑자기 그 친구가 이사하던 날 들려줬던 음악이 생각이 난다

반포장으로 이사를 해서 방안 여기저기 커다란 바구니들이 쌓여 있고, 평소 운동 부족으로 허약한 친구들 서너 명이 몇 번 짐 나르는 것을 도와주고는 지쳐 방바닥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그 친구가 혼자서 조용히 오디오를 설치하더니 엘피가 넣어져 있던 플라스틱 박스를 뒤적여 LP 한 장을 꺼내 턴테이블에 놓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LP에 바늘을 올렸다

창 밖으로 시선을 향하니 흰 구름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때  Mercedes Sosa의  Mon Amour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짐 더미에 잠시 몸을 기대고 반쯤 누워 있는데, 

 ”좋다. 이대로 눈을 감고 한 숨 잤으면 좋겠다 “
그때 이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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