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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홍 4시간전

받은 사랑의 보답으로....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메일을 받곤

제일 먼저 소식을 전 한 사람은 큰아이에게였다.


딱, 작년 이맘때 큰아이에게 장담했던 말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꼭 작가가 될 거야!"

"대신 비밀이야~ 비밀로 해줘~내년에 보여줄게."


큰아이에게 그동안 엄마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기 친구들에게도 엄마는 요즘 말로 인싸(?)였다.

"엄마! 우리 친구들이 엄마보고 새엄마냐고 자꾸 물어봐~ 엄마 나이 말하면 안 믿어~"

오히려 큰아이 친구들이 나의 카톡프사를 더 많이 살피고, '문여사'라 부르며 나의 근황을 큰아이를 통해 묻기도 했었다. 

이런 큰아이에게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아싸(?)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얼마나 불안했을까? 

아무 계획도 없어 보이는 엄마가,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는 엄마가, 

돈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엄마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어떤 희망을 보여주기를, 용기 내서 힘차게 다시 일어서주기를, 

그리고 다시 한번 대단했던 엄마로 돌아와 주기를 그 누구보다 절실히 바라고 있음을...


이런 나에 대한 바람은 비단 큰아이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했던 시간들을 견디고 버틸 있게 해 준 지인들의 사랑과 지지였다. 평생 갚아야 할 마음의 빚으로 나는 곱게, 감사하게 마음에 새겨두었다.


십수 년 쌓아놓았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갈 때 세상의 모든 비난과 화살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걸 보면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을 내 목숨과 맞바꾸려 했다. 

그때 경찰과 119 대원들을 앞세워 집에서 잠들어가고 있는 나를 살려내 주신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이 계셨다. 울며 절규하며 나를 꺼내주신 분들이셨다.


수천만 원의 돈을 이자도 없이 빌려준 지인도 있다. 

수백만 원의 돈을 빌려준 후배도 있다.

언제 갚으라는 말도 없이 빌려준 선배, 친구...

가겟세 내려고 마련해 둔 돈, 아이들 학자금으로 마련해 둔 돈,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친구는 대출을 받아서 빌려줬다. 누구 하나 나을 것 없는 형편에, 누구 하나 여유로운 돈일리가 없는 그런 피 같은 돈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폐물이며 자동차며 다 팔아도 모자라 아직도 나는 빚쟁이다. 

그런데도, 

"기다릴게, 너 몸이나 챙겨..", 

"언니사정 아는데 괜찮아요, 기운 내요! 좋은 날 있을 거예요"

하~~~~ 나는 당신들에게 이 마음의 빚을 어떻게 다 갚으면 좋을까요?


가끔 소주 한잔 마시러 나오라는 지인들.

"야! 그렇게 집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소주 한잔 해!"

"세상이 무너졌냐! (그래 나는 세상이 무너졌으면 좋겠다!) 너만 힘든 거 아니야~나와!"


"어디 아픈 데는 없지? 비타민이라도 사서 보낼까? 잘 챙겨 먹어야 기운도 나는 거야!"


"너 여행 다녀온 지 좀 됐지? 우리 이번에 **가는데 같이 가자! 경비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가자~!"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멀리 전주에서 한 달에 한 번씩(자기 말로는 여행이라고 하지만) 들여다보러 오는 후배도 있다. 매일 입만 열면 장사 안 돼 죽겠다는 친구가 매달 이렇게 나를 보러 비행기 타고 와준다.

하~~~~~~ 당신들에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뭐라고 이렇게.....

딱히 기억나게 해 준 것도 없는, 해줄 것도 없는 내가 뭐라고...


나는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친구나 동생들에게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자연스럽게 손 편지 쓰는 것도 좋아했고 글짓기나 독후감상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일기 쓰는 것은 멈추지 않았고 여행을 다닐 때도 항상 비행기나 숙소에서 책 보는 것을 좋아했다. 오히려 책을 보기 위해 여행을 다닐 때도 있었다. 

사람들이 힘든 일이 있어서 무언가를 상의해 오면 진지하게 대답도 해주고 같이 울기도 하며 관계를 그렇게 맺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래된 관계들이 많다. 일 년에 한두 번 연락하는 관계들이 오히려 나를 더 걱정해 주고 지지해주기도 한다.


내가 이런저런 고난을 겪어내며 알량한 자존심에 연락 한 번을 못했을 때도 먼저 연락하며 안부를 챙기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건지, 무슨 일을 할 건지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물어온 사람이 없었다. 그저 

"네가 하는 건 다 찬성이야!", "찬성일세!"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의 못돼 먹은 이기심을 한 방에 무릎 꿇게 만든 사람들이다.


작가가 되는 건 내 인생의 최종 목적지이자 쉼이었다.

어떤 복잡한 생각들을 글로 표현하고, 정리할 때 나는 비로소 머리가 비워지면서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을 갖는다. 내가 지난 몇 년 차갑고 뼈아픈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한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였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삶이었다.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용기를 내야 했다.

쉰 한해를 살아온 날들을 과거로 묻고 될 때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를 담아 지난 일 년 [도광양해]의 마음으로 죽은 듯이 몰두했다. 뭔가를 해 보이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오롯이 나의 꿈을 위해서 준비한 시간이었다. 나의 자유와 쉼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미래를 위해서.


큰아이가 작년이맘때 내가 했던 호언장담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정확히 일 년이 지나 내가 말했다.

"엄마 드디어 브런치 작가 됐어!"

그리고 그동안 나를 기다리고 지지해 준 응원팀에게 일일이 문자를 보냈다.

'저 이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제 꿈을 찾아왔습니다. 이제 제가 보답하겠습니다!.'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다시 나는 꿈을 꿉니다. 

머리 하얀 백발의 할머니가 오래된 책상 앞에 앉아 돋보기 콧잔등에 걸치고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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