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단테 게이브리얼 로세티, "자화상"

by 룡하

(자화상을 보고 쓴 시입니다. 시와 자화상을 같이 보시길 바랍니다.)



희망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첫 여자인 판도라

호기심이 많은 그녀에게 상자를 주었네


인간에게 불을 준 프로메테우스

그에게 분노하여 저주한 제우스


절대 열지 말라고 했지만

상자를 연 아름다운 재앙


상자안의 모든 험악한 것들이

세상에 나와 불행이 생겼지만


어떤 불행도 희망 덕분에

인간은 이겨낼 수 있구나



로세티가 19세때 그린 자화상(1847).


술탄(이슬람 국가의 지도자). 학창 시절 로세티의 친구들은 로세티를 농담 삼아 그렇게 불렀습니다. 명령 한마디만 하면 하인들이 달려오는 술탄처럼, 로세티가 한 마디만 부탁하면 수십 명의 친구들이 앞다퉈 그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과장이 좀 섞여 있는 별명이었지만 그만큼 로세티는 매력적이고 인기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로세티는 잘생긴 얼굴의 미소년이었습니다. 그의 다정다감한 말투 속에는 톡톡 튀는 재치와 유머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국적인 혈통과 출신이 신비로운 매력을 더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시인으로 활동하다 정치적인 탄압을 받아 영국으로 망명한 대학 교수였거든요. 로세티의 누나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로세티는 가족과 친구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았다. 마치 어린 왕자와도 같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 로세티를 한 번 만나면 그의 매력에 푹 빠졌다.”


시인이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로세티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글을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화가가 될지 시인이 될지 고민할 정도로요. 로세티는 그중 화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열일곱 살의 나이에 왕립아카데미에 입학해 미술 공부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왕립아카데미의 가르침은 따분했습니다. 로세티에게 왕립아카데미가 추구하는 그림은 고지식하고 쓸데없이 까다로우면서도 감상적인, 말하자면 ‘구린’ 그림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로세티는 존 에버렛 밀레이를 비롯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젊은 아카데미 학생들을 끌어모았습니다. “그림에 ‘오버’ 좀 하지 말자. 르네상스 시대, 라파엘로 이전의 자연스러운 그림으로 돌아가자.” 눈부신 색채, 과장되지 않았지만 극도로 섬세하고 세밀한 표현을 추구하는 ‘라파엘(라파엘로)전(前)파’의 탄생이었습니다.


출처 : 성수영, ""성공하고 싶다"며 아내 무덤 파헤친 男…꺼낸 물건 정체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한국경제, 2025.06.01,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505307445i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회색 눈동자를 가진 젊은 여인이다. 하지만 왠지 그녀의 눈빛은 무척 복잡해 보인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의 그녀가 길고 하얀 손으로 꼬옥 쥐고 있는 작은 상자에서는 붉은 빛의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는데, 그녀가 오른손으로 뚜껑을 꽉 누르고는 있지만, 기세 좋게 흘러나오는 연기를 막을 수는 없다. 여인의 얼굴은 몹시 아름답지만 꽉 다문 작은 입술 탓인지 연약하기보다는 선이 굵고 고집이 세어 보인다.


그녀의 얼굴표정으로 보아선 그녀가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된 비극에 대해 두려워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건지 알 도리가 없다. 붉은 빛의 옷깃이 넓은 드레스는 그녀를 마치 여신처럼 보이게 하는데, 물결치는 적갈색의 곱슬머리와 점점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주홍색 연기 때문에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녀의 이름은 판도라...!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최초의 여인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몰래 불을 훔쳐다 준 것을 알게 된 제우스는 격노하여, 그에게 저주를 내려 코카서스의 바위에 결박하고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지독한 고통을 매일 겪게 한다. 그 고통은 훗날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그를 풀어 줄 때까지 계속된다.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어도 신의 신분인 그는 영생해 계속 새살이 돋기 때문이다.


그런 저주를 내리고도 분이 안 풀린 제우스는 헤파이토스에게 흙과 물을 반죽해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도록 하고, 신들로 하여금 그녀에게 하나씩 선물을 주도록 한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허리띠를 만들고 화장을 해주었으며, 아프로디테는 매력과 동경과 비탄을, 헤르메스 신은 그녀에게 설득력과 기만과 사기, 교활한 심성을 주었으며, 아폴론은 음악을 주었다. 제우스는 그녀로 하여금 인간남자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것인데, 땅으로 내려 보내는 판도라에게 상자 하나를 주며 절대로 열지 말 것을 당부했다.


‘미리 아는 자’란 뜻의 프로메테우스는 이 모든 것을 예상해서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로부터 어떤 것도 받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건만,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반해서였는지 덥석 판도라와 상자를 받고 만다. 호기심이 많은 여자인 판도라는 ‘절대 열지 말라’는 제우스의 당부에 상자 속에 든 것이 더욱 궁금했고, 그래서 살며시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상자안의 모든 험악한 것들이 빠져 나와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불행이 나간 후 망연자실하고 있는 판도라에게 상자 속의 희망이 문을 두드려 자신을 내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겨우 상자 밖으로 나온 ‘희망’ 덕분에 인간은 어떤 불행도 ‘내일은 좋아지겠지’라는 희망 속에서 이겨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아름다우나 고집스러워 보이는 판도라는 이탈리아 라파엘전파 화가인 단테 게이브리얼 로세티(1828~1882)가 그렸다. 판도라와 상자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으나, 대개는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 것처럼 아주 연약한 호기심 많은 소녀처럼 그려진 반면 로세티의 판도라는 어린 소녀라기보다는 세상 물정을 제법 아는 듯한 성숙한 여인이다.


출처 : 배정원, "‘사랑해도 지켜야 할 비밀 있으니...!’", 코메디닷컴, 2015.08.28, https://kormedi.com/1216042/


헤시오도스는 『일들과 나날』에서 ‘판도라’라는 이름이 붙여진 경위를 “모든 신들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서술하고 있다.12) 그러나 ‘판(Παν)’은 ‘모든 것’, ‘도라(δώρα)’는 ‘선물 또는 선물을 주다’로도 해석될 수 있다. 더욱이 ‘게 판도렌(Γῆ πάνδωρην)’이 지모신 가이아의 별칭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헤시오도스가 의도적으로 판도라에게 모든 선물을 ‘주는 자’가 아닌 ‘받은 자’라는 수동성을 부여하였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13) 또한 헤시오도스가 두 작품 속에서 판도라를 지칭하는 용어로 정확한 명칭대신 “여자(γυναῖκα, γύνη)”라든가 “아름다운 재앙(καλὸν κακόν)”, “기만(δόλον)” 등14)의 추상적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이를 반증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즉 헤시오도스는 판도라를 칭하는데 이러한 수동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판도라가 지닌 부정적인 성격을 보다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12) Hesiod, Works and Days, 81-82.

13) Penglase (1994), 209.

14) 여자(Works and Days, 80, 94), 아름다운 재앙(Theogony, 585), 기만(Works and Days, 83; Theogony, 589).


출처 : 김예슬. (2015). 판도라에 대한 여러 인식과 그 배경 -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를 중심으로 -. 서양고전학연구, 54(2), 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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