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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떰브 Sep 02. 2020

한국어 선생님 이야기 07-2

07-2 초대  받지 못한 파티

살면서 노력하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는 경우가 꽤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절박하리만큼 온 힘을 다해 정성을 쏟는다고 하여 원하는 걸 얻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 절박함은 대체로 독에 가까웠다. 어쩌면 깊은 곳에서 실패를 예감하고 생긴 불안함이 절실함으로 발현되는 걸지도 모른다. 간절하게 외쳐도 대답 없던 모든 연(緣)들이 머릿속을 긁었다. 절박함의 대상은 물건이거나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며 간절함에 처절히 배신당한 기억을 하나 둘 적립하게 됐고, 그 결과 무언가에 죽을 듯 매달리거나 바라지 않는 무심함을 가지게 되었다. 의지박약에 운명론이란 허울 좋은 옷을 입혀 ‘될 사람은 된다.’를 입 밖으로 흘려 보내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절박하지 않았다. 나름 담백했다. 물론 열심히 했고, 이보다 더 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수는 없을 것이라 믿었다. 아직 다음 레벨로 가기엔 사회 경험치가 한참 부족한 나는, 사회생활이라는 살얼음판 위에서 중심을 잘 잡기 위해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조심했다. 내가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이 살얼음판은 언젠가 시멘트 바닥으로 바뀌겠지 하는 생각조차 오만이었을까? 아주 평화로웠던 학교에 갑자기 묘한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날은 주 30시간 수업으로 정말 힘들었던 만큼 기다린 수료식이 있는 날이었다. 보통 때처럼 전체 회의가 잡혔으나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야 수습 기간이 끝났는데, 지난 학교에서처럼 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 날 전체회의가 끝난 후 나는 동기들과 처음으로 함께 술을 마셨다. 어떤 사람들은 훌쩍거리며 울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허탈한 얼굴로 허허 웃기도 했다.


학교에서 강사들을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했다. 학교에서는 그동안 열악한 대우에 대해 끊임없이 말이 많았던 이 업계에서 가히 축하할 일이라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신입인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2년 이상 일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기회였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그보다 짧은 기간을 일한 사람들은 갑자기 뒤집힌 모래시계 신세가 된 것이었다. 무기계약직 한국어교원과 기간제 한국어교원. 신분이 생겼다. 수료식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주말은 온통 까만색이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 올라왔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모든 계약조건이 달라졌다. 방학이 없어졌고, 근로시간이 훨씬 길어졌지만 받는 임금은 그대로였다. 이러한 변화를 반기는 사람보다는 당황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학교 측에서는 해당 계약 조건에 동의하고 싶지 않으면 사직서를 쓰고 나가라는 말을 남겼다.


모래시계가 엎어진 사람들은 함께 모여서 살 길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우리들만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또 다른 그들은 그들만의 이야기를 했다. 방학이 시작하는 날 갑자기 학교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은 사람도 있었고, 당장 다음 학기에 계약이 종료될 사람도 있었다. 나뉜 신분의 사이에서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이 느껴졌고, 깊은 곳에서 반감이 끓어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학교에서는 법리적인 판단을 마친 상태였고, 계산기를 잘 두드려 영리하게 움직였다. 암묵적으로 무기 계약으로 오래 일을 해온 이들에게 확실한 단어를 붙여주고 앞으로 뽑힐 사람들을 손쉽게 계약직으로 채워 넣겠다는 수가 보였다. 갑이 할 수 있는 일종의 선포였다. 학교 측에서는 많은 인원이 그만둘 것을 예상했지만, 사실상 그렇지는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먹고사니즘’에 시달리는 ‘을’이자 ‘약자’고, 쓴 겨자도 웃으며 먹어야 할 처지니까 말이다.


그렇게 간절하지도, 애걸복걸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 나는 된통 당한 기분이었고 꽤나 상처를 받았다. 역시 이불 밖은 위험했다. 이 정도면 세상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을 더 크게 두들겨 맞아야 알게 될까, 새삼 두려워 지기도 했다. 하지만 학기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순응하고 또 적응해 나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들이 준 모래시계를 들고 아래로 흐르는 모래알들을 가끔씩 되새기며 일을 하고 있었다. 괜한 반항심에 어차피 나가야 하는 처지인데 눈치 볼 필요가 있나 하는 마음도 생겼지만 잠깐이었다. 나는 다시 주어진 자리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좋은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건 내가 순진해서가 아니라 그저 스스로에게 끝까지 당당해 지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이 조금 더 어른에 가까운 모습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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